대학의 서열 매기기, 무엇이 문제인가


 

지난 9월 5일 교과부는 전국 364개 사립대학에 서열을 매긴 평가 결과를 발표했다. 하위권에는 상대적으로 예술대학들이 많았는데 특히 8개 평가항목 중 무려 20% 비중을 차지하는 취업률에서 추계예대가 꼴찌로 나왔다. 그 결과 추계예대는 정부의 재정 지원과 학자금 대출에서 불이익을 받는 ‘제한대학’이 되었다. 이를 두고 각종 미디어에선 교과부의 ‘부실대학’, ‘퇴출대학’, ‘낙인대학’ 발표라고 비유했다. 추계예대 학생과 교수들은 항의를 계속하고 있지만 현란하게 교체되는 뉴스 스펙터클 소비의 회오리 속에서 ‘그때 그 사건’ 중 하나로 잊히지는 건 아닐까 싶어 안타깝다.

 

예술, 그리고 대학 교육

 

곧 두 달째로 접어드는 이 사건은 한국 대학 교육의 폐단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는 교과부가 대학에 서열을 매기는 폐단이다. 이는 서열을 매길 수 없는 상호적 교육 행위는 부정하고, 서열을 매길 수 있는 것만으로 교육을 다룬다는 뜻이다. 또 하나는 서열 매기기의 주된 평가 기준이 4대 보험 가입 직장 취업률이라는 폐단이다. 이는 4대 보험 가입 직장이 아닌 형태의 모든 노동과 활동을 부정하고 동시에 대학 교육의 최우선 목표를 딱 그런 종류의 취업률에 고정한다는 뜻이다. 마지막 하나는 그 같은 취업률에서 하위권의 서열 대학에 불이익을 가하는 폐단이다. 불이익의 내용과 형식을 보니 이는 ‘제한학교’와 ‘제한학교의 학생’이라는 딱지를 붙여 그런 대학과 학생을 고사시키겠다는 뜻이다.

추계예대 사건은 ‘예술을 한다.’는 그들의 사건이 아니라 모두의 사건이 될 필요 조건을 갖고 있다. 예술대학의 문제 이전에 한국 대학 교육이 갖는 겹겹의 모순을 응축하고 있어서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모두의 사건으로 공감되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정황과 요인이 작용했을 터, 그 중 하나의 몫은 온전히 ‘예술’이라는 말의 용법과 용처에도 있다 싶다. 일반 대학이 아닌 예술대학의 예술로서, 그것도 실용 예술이 아니라 순수 예술의 대학으로 거듭 분류되고자 하는 예술로서 말이다. 이런 분류법에 의한 예술이 국가 정책, 교육 제도, 시장 경쟁에 처할 때의 갑론을박이 따로 있겠으나, 내 관심사는 우리의 의식 또는 무의식의 일부처럼 당연시되는 예술의 구별 되고자 하고, 분류 받고자 하는 쓰임에 있다. 예술을 하는 이들과, 예술인지 아닌지 상관하지 않는 이들과, 예술을 안 한다고 믿는 이들을 가르는 그 ‘예술’.

그러나 우리의 의식 혹은 무의식에 자리잡은 예술의 쓰임이 구체적인 윤곽과 실감을 드러낼 때는 추계예대 사건처럼 어떤 상황이 발생해서 분노하거나 열광하는 감정을 지닌 주체들의 에너지와 뒤섞이며 주장과 행동이 조직되는 경우일 뿐이다. 이 경우란 대부분 도발이나 우연처럼 엄습하는 사건에서 비롯된다. 이때 예술은 사건에 의해 촉발된 우리의 감정과 오롯이 구별될 수 없다. 반면 계보를 따르고 장르를 가리며 우열을 나눌 때의 예술은, 어떤 문법인지 식별하고 엄밀한 잣대를 사용하여 차이를 강조하고 그것을 정체성으로 못박아 ‘나는 다르다.’고, 그렇게 분류되고자 하는 예술이다.

그런 예술은 역사적 격랑 속에서도 불멸하는 예술, 우리가 대립하고 분열하는 이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합의된 것으로 간주하는 예술, 과학기술 발전과의 상호 작용이란 최신 주제 속의 예술이다. 이들 담론과 강론 속의 예술은 유치원 미술 시간에서 있을 법한 ‘내가 그린 그림에 내가 매료되는’ 황홀경이나 거리 음악가의 퍼포먼스를 접하는 순간 ‘내 전신에 소름이 돋는’ 갑작스러운 체험의 중요성과 그에 대한 사유를 빠뜨리기 쉽다. 그것은 기껏해야 예술의 당연한 향유 효과로 간주될 뿐이다. 이렇게 상반된 예술의 쓰임새를 따라 하나의 극단에 가보면, ‘예술을 한다.’고 믿을수록 예술가이며, 예술에 대한 전문성을 가져야 예술을 ‘진정으로’ 논할 수 있다고 자처하는 불모성 위에 있을 때가 적지 않다는 사실과 만난다.

 

대학 교육의 허울이 벗겨지다

 

추계예대 사건으로 돌아가면 이 사건은 예술의 위기나 예술대학의 의제로 점화된 게 아니라 존립의 근거를 잃어버린 대학 전체의 성마른 부분부터 불붙은 대형 산불의 신호탄이라 볼 수 있다. 따라서 일차적 문제 제기는 교과부의 서열 매기기와 불이익 주기가 공정한지, 즉 4대 보험 가입 직장 취업만을 취업률로 셈하는 교과부 및 이를 추종하는 대학의 잣대와 예술대학 졸업생의 활동 또는 노동이 거의 정반대에 있다는 엄청난 간극에서 촉발되지만, 그 항의는 비예술 전공 졸업생이 처한 별반 다르지 않은 동일한 현실 속에서 같이 분노하고 노래하는 연대여야 맞다. 이 사회의 주류가 신봉하고 주문하는 4대 보험 가입 직장 취업의 거짓 신화에 모든 대학이 교육이란 이름 아래 학생들을 볼모로 잡고 들러리 노릇을 계속하려는 것이 이 사건의 근간이자 문제의 핵심이라고 생각해서다.

이 사건은 쓸모가 불분명해진 데다가 피해 상황만 눈덩이로 키우는 ‘취업 사기 공장’ 대학을 막 나왔거나, 현재 대학에 몸 담고 있거나 들어가려 애쓰는 모든 ‘잉여’ 청년의 미래를 앞당겨 갈취하는 막장 드라마가 마지막 베일을 벗어 던진 것이다. 반값 등록금 절규에 돌아온 응답이 이것이다. 우리 사회의 대학은 마침내 불타기 시작했고 첫 불길은 추계예대에서, 라고 해야 옳다. 추계예대 사건은 대학 교육이란 ‘신성동맹’ 아래 청년들을 일회용품으로 대량 폐기하는 이 무덤덤한 광기를 당장 멈추라는, 곧 잿더미가 될 불길에서 청년들을 구출할 방도를 찾아 뭐든지 하라는, 우리 모두를 공범이자 목격자로 지목하고 있는 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이 예술대학이어서, 순수 예술이어서, 예술이어서 비롯되었다며 차이에 매달린다면 추계예대 사건의 번지수는 달라진다. 이는 모두의 사건이 될 충분조건에 눈감은 채 예술계의 고립적 이슈로 빠져나가는 자폐의 막다른 길이다. 만약 추계예대 사건이 여기에 머물러 있다면 교과부의 부당하고도 안이한 행정조치뿐 아니라 예술을 한다는 우리들 사이에 팽배한 예술의 위기도 함께 반증한다. 제도화된 예술 교육의 파탄과 젊은 예술가의 고독사(死)라는 불모지의 한복판에서 여전히 서성거리고 있는 예술의 위기 말이다. 이 위기는 우리 시대의 예술을, 이 사회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을 완전히 재정의하게 이끄는 근본적인 자문들을 거쳐야 출구를 찾지 싶다.

그 자문은 분류되고자 하는 예술에 실망한, 예술을 한다는 청년들의 소박한 의문과 더불어 유치원 미술 시간과 거리 음악가의 장소와 두리반 공간에서 일어나는 예술의 재탄생 사이에서 번성한다. 자문은 이렇게 추궁한다. 예술 작품 및 활동이, 예술가가, 예술 교육이 자신의 진리를 어디에서 재발견할 것인가. 요체는 이렇다. ‘잉여(한국)’와 ‘하류(일본)’로 틀 지어진 조건에서 고학력과 고스펙의 족쇄를 단 채 학습 동기(학력)와 일할 관계(경력)를 상실하는, 한 마디로 살아갈 의욕을 잃지 않을 수 없게 청년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노예적 삶의 체제를 거부할 것인가. 이에 대한 자문을 유독 예술대학의 학생들에게만 다르게 괄호 짓거나 한층 특별한 양 구분하려는 미망은 예술의 가치를 배반할 것이다.

 

숨을 쉴 수 있는 생태계를 이뤄야 한다

 

추계예대 사건뿐 아니라 연달아 벌어지는 한예종 학생들의 자살 사건은 고려대 김예슬 학생의 자퇴 선언, 그리고 카이스트 학생들의 자살 사건과 동일한 본질을 공유한다. 주목할 점은 그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예술대학에서 ‘예술을 한다.’고 배운 청년들이 (무엇보다 이들을 가르친 교수들과 선배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나의 예술 작품 및 활동을, 예술가라는 정체성 혹은 신분을, 예술 교육을 낯설게 돌아보며 교과부와 모든 대학이 한입되어 합창하는 취업률의 거짓 신화와 다른 삶을 상상하고 맛보게 되는 그 사건들을 몸소 겪는 동안의 변화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어제로 돌아갈 수 없는 오늘의 변화다. 그런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을 다르게 시도하는 경험을 만들고 고민할 때다.

다르게 살아보려는 시도가 경험으로 쌓이면 결코 고상할 수 없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경계를 떠나면 이도 저도 아닌 것 같은 불안과 이것이기도 저것이기도 하는 혼란의 나날이 시작된다. 요즘 비유로 치면 동물원을 나와야 비로소 만나게 되는 야생의 세계가 그렇다. 거기 들판에 황량하게 서야 고독(불안)과 자유(혼란)의 고단함과 해방감이 교차하는 부단한 사건과 대면하는 삶의 방식을 만난다. 다른 삶을 상상하는 새로운 예술은 거기에 있다. 이야기가 무거워졌지만, 달리 말하면 예술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예술가가 되어야만 하는 세상이 이미 아니다. 또 예술대학 바깥에서 예술을 한다는 생각조차 낙후시키며 ‘예술을 하고 있는’ 무수한 비예술 전공자 청년이 즐비하다.

생태계의 반대말이 동물원이라면 대학은 굳이 동물원으로 남고자 하는 것 같다. 당연히 용이 나던 개천은 대학에서 사라졌다. 우리에 갇힌 젊은 잠룡들이 집단 폐사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예술은 동물원을 나와 야생의 생태계로 돌아가고, 대학 바깥의 혼탁한 개천에 합류하면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아무쪼록 추계예대 학생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예술가가 숨을 쉬어야 할 그 생태계와 개천을 만나길 바란다. 우리, 서열 없이 모든 것이 연결되는 거기서 만나자.

 


 

글_ 사단법인 씨즈 상임이사 김종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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