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가슴 속에 희망이 싹튼다

 

‘서로의 집이 되고 싶었다’는 한 노숙인이 2년 전에 발표한 시다. 위 시에는 우리가 거리에서나 언론매체에서 접하는 노숙인들의 이미지와는 다른 정서가 흐르고 있다. 물론 술과 싸움, 잠에 취해 인생을 탕진하고 있는 노숙인들도 있다. 하지만 이 시의 지은이처럼 마음속에 자기 몫으로 주어진 삶의 불꽃을 피우고 그 온기를 나누며 그리워하는 노숙인들도 있다. 이 시의 지은이는 열심히 살았다. 시간당 2만 원에서 많게는 일당 18만 원을 받으며 서울, 분당, 일산, 인천, 수원, 부평을 오가며 하루벌이 아르바이트를 했다. 단순한 녹음 아르바이트부터 병원의 임상실험까지 다양한 벌이를 하면서도 정규 직업을 갖기 위해 노력했던 흔적들을 찾아볼 수 있다.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열심히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한 노숙인 자립시설이 주관하는 인문학 교실에서 꾸준히 문학과 역사, 철학, 예술을 공부하고 접했다. 이 시는 그 수업의 결과물 중 하나다. 이 시를 읽노라면 사람이란 가능성의 존재라는 점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사람은 어떤 지원을 받는지에 따라 말할 수 없는 차이를 만들어내기에, 쉽게 예측할 수 없는 존재다. 이런 점 때문에 미래에 대한 비관을 쉽게 할 수 없다.

 

기업 사회공헌활동, 문화예술교육으로 나아가다

 

최근 우리 주변에서 기업 사회공헌활동을 자주 보고 들을 수 있다. 한 연구자에 따르면 국내에서 기업 사회공헌활동이 활발하게 시작된 것은 1994년부터라고 한다. 단순한 불우이웃돕기 수준을 벗어나 기업 사회공헌활동을 경영활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한 전략과 시스템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1990년대 중반부터라는 이야기다. 비록 짧은 시간이 흘렀지만 인식의 전환은 확고히 이루어졌다. 하여 최근엔 사회공헌활동을 기업에서 꼭 해야 하는 것인지 되묻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회공헌활동은 기업의 당연한 의무이며, 이것을 ‘어떻게 잘’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토론이 이어지고 있다.

 

기업이 어떻게 사회공헌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란 어느 정도의 돈을 몇 명에게 배분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물론 기업에서 하는 활동이다 보니 자원의 합리적 배분과 효율적 이용이 중요한 점이다. 하지만 기업 사회공헌활동의 본질을 이루는 질문은 ‘기업이 가진 유•무형의 자원을 투입해 만들어낼 수 있는 긍정적인 사회변화란 무엇일까?’가 아닌가 한다. 앞서 말한 ‘어떻게’란 긍정적인 사회변화를 유도하거나 그 성과를 낼 수 있는 방법론과 과정에 대한 이야기다. 과거처럼 전시용으로, 혹은 준조세 활동으로 기업이 사회공헌활동에 치중하는 것은 심하게 말해 헛돈을 버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009년 국내 220개 기업이 사회공헌활동에 사용한 지출금액만 2조 6500억 원에 이른다. 이렇게 큰 금액을 사회공헌활동에 쓴다면, 아주 잘, 유용하게 써야 할 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업 사회공헌활동이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문화예술교육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문화예술교육은 작품을 만들어 내거나 예술가를 양성하는 활동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복지와 의료, 교육을 비롯한 기존의 사회공헌활동이 추진했던 사업에 적용할 수 있는 ‘철학이자 서비스 전달의 경로’로 문화예술교육을 사고하자는 것이다.

 

발상의 전환이 더 많은 희망을 키운다

 

앞서 언급했던 노숙인을 위한 문학 교육은 노숙인의 자립 지원에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었다. 문학은 그 안에 타인의 삶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담고 있기에 문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기 삶을 설명하고 위로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할 수 있다. 이러한 자기해석은 자활을 위한 정신적인 근거가 된다. 남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닌 자기 내부로부터 피어 오른 삶의 목적보다 더 강력한 자활의 동력은 없기 때문이다.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다문화가정과 관련한 기업 사회공헌활동도 마찬가지다. 서로 언어가 다른 나라들에서 모인 여성들을 한 교실에 앉히고 한국어와 한국문화에 대해 교육을 하는 것도 우리 사회에 적응을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볼 수도 있다. 영국에서 있었던 다문화여성 활동의 예에서 보듯, 언어와 종교, 지역이 다른 이주여성들이 모여 퀼트작업을 진행하면서 각자의 문화가 지닌 다양성을 그들 고유의 색과 문양을 통해 표현하고 즐길 수도 있다. 자기 문화에 대한 자긍심과 타인의 문화에 대한 존경심을 느끼고 이해하며 다양성 간의 어울림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던 영국의 활동은 새로운 사회에 정착하는 이주민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을 공유하는 장이었다.

 

필요한 것은 발상의 전환과 분명한 목적의식이다. 지금까지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은 가용한 돈과 시간이 누구에게 전달되었느냐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진정한 변화는 이것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기업이 제공하는 돈과 시간을 받는 사람,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사람이 얼마나 이를 흡수했느냐에 따라 그 변화와 성과의 폭이 달라진다. 주전자에 있는 물을 모두 쏟고 싶거든 담긴 물을 받을 수 있는 크기의 잔을 준비해야 한다. 기업 사회공헌활동에서 문화예술교육은 튼튼하고 넓은 잔을 만드는 일이다. 특히 사회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다양성이 급증하는 현실 속에서 자기 모양과 색을 지니고 살아갈 수 있는 건강한 잔을 만드는 일이다.

 

‘사람’을 향하는 진정한 사회공헌활동을 위해

 

요컨대 우리의 기업 사회공헌활동은 기존에 규모와 수치로 파악했던 프로그램을 ‘사람’ 중심으로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방편으로 문화예술교육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화예술교육은 사람의 감각에 크게 의존한다. 시각과 청각, 촉각을 통해 전달되는 색채, 형태, 소리, 느낌은 그 하나하나가 각자의 감각에 찾아오는 고유한 기회이며 의미이다. 여기에 각자가 경험하거나 생각해낸 이야기가 덧붙여지고, 타인의 감각이나 이야기와 교환되는 과정에서 창조적인 소통이 형성된다. 그리고 이런 소통은 다시 자신의 감각과 감정, 삶에 대한 자신감과 자존감으로 전환된다. 이를테면 문화예술교육은 평화롭고 창조적인 소통과 건강한 자아의 정립에 기여한다. 이와 같은 ‘사람의 변화’는 기업의 사회공헌활동에 새로운 고민의 단초를 제시한다.

 

안타까운 것은 아직 기업 사회공헌활동 관계자들이 문화예술교육에 많은 관심을 보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문화예술교육을 기존에 하던 활동과 관계 없는 것으로 인지하거나, 예술가를 양성하는 사업으로 좁게 인식하는 경우가 많다. 우선은 현장에서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작은 일부터 시도해 보면 어떨까 싶다. 기업 사회공헌활동 관계자들이 가까운 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의 현장을 찾거나 그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보는 것은 이를 위한 좋은 시작이 될 수 있다.

 

글_ 조선일보 사회공헌섹션 [더나은미래] 고대권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