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회를 현실적으로 지배하는 힘은 재벌, 보수정치권과 엘리트 관료집단, 보수언론, 사학재단, 검찰 등의 특권동맹으로 보인다. 그런데 오늘날 지배는 개발독재나 냉전문화 같은 반민주적인 강제력이 아니라 새로운 헤게모니에 기초해있다. 그것은 문화적이고 미적인 권력이다. 지배와 특권동맹은 ‘법치주의’나 교육·종교 등의 이데올로기와 인민의 욕망의 내용을 장악하고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 흥행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아파트 소유를 둘러싼 한국 중산층의 욕망의 메커니즘을 잘 보여줘서 호평을 받았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지배한다
자본주의 소비사회에서 인간은 경제적이면서 동시에 미적인 선택을 통해 주체화를 수행한다. 반복되는 주체화 수행에는 취미판단(Geschmacksurtei)의 계기들이 있으며, 신자유주의 사회의 미적 대상은 소비 또는 투자 상품으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미’는 소유의 대상이자 ‘능력’의 주요 범주가 된다. 그래서 능력주의가 미에 침투하고 아름다움이 우리를 지배하게 되는데, 거기에는 돈이 든다. 다시 말해 미는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와 일상을 장악하고 있다. ‘고급한’ 예술이 생산·소비되는 방식과 명품, ‘뷰티’ 산업이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을 장악한 방식을 보라. 미에 대한 돈의 실질적 포섭의 수준은 소비자본주의 시대가 시작되고 그래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비판이 유효하던 정도를 훨씬 넘는 것이다. ‘절대’ 단계에 이른 자본주의(absolute capitalism)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영토화·식민화하고 있다. 이 영토화·식민화는 묘사하기 어렵게 ‘내포적’이며 즉시성을 지닌다. 어떤 현상이나 예술도 뭔가 돈이 될 것 같으면, 즉각 상업화되고, 그래서 변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는 이런 ‘예술의 (자율성의) 딜레마’에 대해 극복은커녕 직시하는 것 자체를 무척 어렵게 만들고 있다. 그래서 미에 대한 추구가 초래하는 위험에 더욱 예민해야 한다.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말처럼 “비참한 현실이 오직 급진적이고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서만 변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미학에 대한 관심은 정당화를 요구한다.” 그러니 당연히 미를 향유할 수 있는 능력인 ‘정신의 부’와 많고도 높은 교양(지식)도, 사회적 노동이 축적된 결과이며 지불하여 사유물로 수취한 것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배가 순도 100%의 복종과 동의만이 아니라, 언제나 과잉과 결핍, 그리고 저항과 이탈의 가능성도 내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인간 절멸과 자연에 대한 파괴를 수반하는 ‘식인 자본주의’를 실재 내용으로 삼으며,(『좌파의 길-식인 자본주의에 반대한다』) 주체의 공포와 불안 위에서 존속한다. (역시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묘사된바 한국 중산층의 피비린내 나는 계급투쟁도 불안 때문에 빚어진 것이다.) 이에 대한 인륜적 거부감과 저항도 언제나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예술이 미의 작용을 통해서 현실에 대한 초극과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본연성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여전히 아래로부터의 문화적·감각적 저항과 ‘예술적 자율성’의 모순적 작용에 눈을 떼지 말아야 하며 대중을 위한 예술이 지닌 (잠재적) 가능성과 한계에도 천착해야 한다.
예술은 커먼즈다
커먼즈는 간단히 말해서, “공동체가 공동체의 규칙과 규범에 따라 운영하는 공유된 자원이다. 커먼즈는 물과 토지 같은 자연의 선물뿐만 아니라 문화적 인공물과 지식 생산물 같은 공유 자산과 창조적 작품도 포함된다.”(서울시공익활동지원센터) 예컨대 오늘날 ‘지식 커먼즈’의 문제의식은, 책과 논문 생산과 유통의 구체적 경로를 재공공화하고 저작권의 주체인 연구자들이 지적 생산물의 공유적 사용을 통해 업자들로부터의 자유를 얻으려는 활동으로 현상한다.(지식공유연대)
공동체의 안녕과 현실 초극을 위한 인간의 열망을 담은 데서 출발한 예술은 근원적으로 ‘커먼즈’를 내장하고 있다. 오늘날의 예술도 파괴되어 가는 보편적 휴머니티와 자연을 위해, 사적 소유나 자본의 지배와 길항한다. 다시 말해 예술은 ‘아름다움’ 때문에 (돈으로 구매되는) 가장 값진 것이면서 또 거기 저항할 수 있는 힘이다.
예술의 공유(커머닝)을 위해 우선 예술가가 자유로워야 하고 공공의 자원이 투여되어야 한다.(이런 점에서 블랙리스트 문제가 얼마나 해로운지 알 수 있다.) 우리 예술교육가들이 언제나 할 일은, 공공적이고 대중적인 예술 생산과 유통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주장하고, 수용자들이 처한 계층적 지위와 돈의 유무와 관계없이 예술적 안목과 능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술적 경험과 지식이 다양한 방식으로 공유되어야 한다. 더 많은 질 좋은 콘텐츠의 공유 채널과 더 많은 공적 교육과 공공의 문화시설과 박물관이 필요하다.
- 천정환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지성사와 문화사의 관점으로 한국 현대문화사, 문학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1970~1990년대의 문학사·지성사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근대의 책 읽기-독자의 탄생과 한국 근대문학』(2003) 『대중지성의 시대-새로운 지식문화사를 위하여』(2008) 『자살론』(2013) 『시대의 말 욕망의 문장 – 123편 잡지 창간사로 읽는 한국 현대 문화사』(2014) 등이 있고, 인문학협동조합, 지식공유연대, 민교협 등에서 고등교육과 학술제도 개혁을 위한 활동도 해왔다.
heutekom@daum.net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3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누리고 나눌 때
예술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의 의미
공감이 갑니다
예술적 경험을 통해서 더욱 아름답게 빛날 수 있는거 같아요~
예술인들이 더욱 아름다운 예술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다양한 지원도 꼭 있어야 될거 같네요~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누리고 나눌 때
예술적 경험을 공유한다는 것의 의미
기대만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