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1일은 UN이 정한 ‘세계 문화다양성의 날’이었다. 2002년 57차 UN 총회에서 세계 각국의 다양한 문화적 가치를 높여 전 세계 인류가 직면한 문화의 획일화, 상업화, 종속화에 대응하고 아울러 다원적 가치를 상호 존중함으로 민족 간 갈등과 대립을 극복하기 위해 제정했다. 2004년 유네스코 사무총장 마쓰우라 고이치로는 문화다양성의 날 기념 메시지에서 “기본적인 인권인 문화다양성을 증진하는 것은 편견과 문화 근본주의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2001년에 제정된 유네스코 세계 문화다양성 선언 중 “누구도 국제법으로 보장하는 인권을 침해하거나 그 영역을 제한할 수 없다”라는 구절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문화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자문화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제공하고 다른 문화를 비하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다양성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인권’의 문제라는 것이다.
문화적 자부심과 비판적 시각
단일민족국가라고 굳게 믿어왔던 한국에서도 어느덧 다양한 인종과 민족,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게 되면서 그야말로 문화다양성을 이곳저곳에서 발견하게 된다. 적지 않은 수의 사람들이 이런 상황을 케이 컬쳐(K-culture)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여긴다. 한국 드라마가 방영되고 사랑받았던 여러 아시아 국가를 방문해보면 그 주장을 부정하기 어렵다. 언제부터인가 유튜브에서는 한국계 이민자들, 한국 출신 오디션 참가자들이 전 세계에서 활약하며 찬사를 듣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는 많은 콘텐츠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수가 적지 않은 걸 보면 이런 류의 콘텐츠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런 분위기의 온라인 환경에서 성장한 어린이, 청소년들은 ‘우리’ 나라, ‘우리’ 문화, ‘우리’ 민족에 대한 자부심으로 어깨가 으쓱한 상태가 될 수밖에 없다. 최근의 이러한 흐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최신 디자인으로 한층 예뻐진 한복이 여성 청소년과 청년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데, 이것은 나에게 꽤 놀라운 현상이다. 내가 어렸을 때 한복은 명절에나 입는 옷이었고, 패션에 관심 있는 젊은이들은 주목하지 않았다. 그런데 2020년 한 모바일 게임에 한복이 등장하면서 처음에는 한국 전통의상으로 홍보되었다가 중국 이용자들의 항의로 중국 전통의상으로 변경되면서 한국과 중국 이용자들 사이에 갈등이 벌어졌다. 게임사의 태도에 한국 이용자들은 항의했고, 게임사는 결국 한국 서비스를 종료했다. 게임 이용자 연령이 주로 청소년과 청년인 것을 생각하면 이들이 얼마나 한국 문화에 대해 자부심을 느끼고 그것을 지켜내기 위해 온라인 세상에서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었다.
자신이 속한 국가라는 커다란 공동체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자부심을 느끼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을 방문했거나, 한국에서 살아가는 외국인과 이주민에게 한국문화를 강요하는 것에는 우려의 마음이 들기도 한다. 한국계 독일인으로 채식을 하는 나의 사촌 여동생은 한국 지사에 근무하며 회식 자리에서 개고기를 먹도록 강권하는 상사를 만났고 묵묵히 먹었다. 어느 공장에서 일하는 회교도인 노동자는 고용주의 강요에 삼겹살을 억지로 먹고 배탈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문화를 인정하지 않고 자기 문화를 강요하는 ‘어른’들 속에서 성장한 어린이 청소년은 과연 문화다양성을 익힐 수 있을까. 청소년들이 다양성, 문화다양성에 대한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는 삶에 다양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스스로 선택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한 가지 옵션만 정해놓고 강요한 어른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계시민을 키워내기 위해서는 상대가 경험하고 있는 문화의 다름을 알려고 노력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공감하고 배려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문화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민의 감각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공감하는 사회
어린이와 청소년이 달라지려면 이들을 만나는 어른들과 사회부터 달라져야 한다. 스스로 선택지를 찾고 선택하는 것이 불가능한 환경을 만들어놓고 문화다양성을 가르친다는 것은 마치 옆으로 걷는 엄마 게가 아기 게에게 ‘너희는 똑바로 걸어야지’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내가 한류 열풍에 도취한 것은 아닌지, 마쓰우라 고이치로의 메시지처럼 자신의 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려 노력하고 다른 문화를 비하하지 않고 존중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문화다양성의 날이라고 ‘이탈리아 베네치아 가면 만들기’ 수업을 하는 대신에 말이다.
온라인에서 발견되는 사례를 주제로 삼아 문화다양성 수업을 하는 것도 좋다. 한 사례를 살펴보자. 2020년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 온라인상의 유명한 밈(meme)이자 서아프리카 가나의 장례 풍습인 ‘관짝춤(Coffin Dance)’을 패러디하면서 얼굴을 검게 칠한 것이 문제가 되었다. 논란이 본격화된 것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가나 출신의 방송인이 이 패러디를 비판하면서였다. 서구에서는 검게 칠한 얼굴을 의미하는 ‘블랙페이스’(Black Face)가 차별과 혐오의 상징이지만, 한국에는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지적하지 않았다면 논란의 주제가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한국의 유명한 코미디 프로에서 많은 희극인이 블랙페이스를 하고 나와 희화화했던 것을 돌이켜보라. 그만큼 한국 사회가 인종으로 인한 차별에 관해 고민한 역사가 짧고 무감하다는 의미이다.
최초의 비판 이후 온라인상에서 이 패러디가 인종차별이냐 아니냐를 두고 논쟁이 있었는데, 블랙페이스가 오랫동안 인종차별적인 행위였던 역사가 있고, 이에 관한 비판으로 서구에서는 금기가 되었으니 차별이다, 학생들이 의도한 것이 아니니 인종차별이 아니다, 보기에 따라 다르니 명확한 답이 없다 등 크게 세 가지 의견으로 나뉘었다고 한다. 그 나름대로 다양한 의견이 등장했던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할만하다. 아쉬운 것은 처음 비판을 제기한 방송인의 문제 제기 방식이 적절하지 않았다는 이유(패러디한 학생들의 학교와 이름이 노출된 것이 문제가 되었다)로 결국 사과하고 이후 방송 활동이 뜸해졌다는 것이다.
살아있는 건강한 토론이 이뤄져야
만약 이 토론이 수업에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이 온라인에서의 이 사건이 그야말로 살아있는 문화다양성 수업의 교재가 되지 않았을까? 텔레비전과 신문, 라디오가 매체의 전부였던 과거와 달리 요즘은 스마트폰이라는 미디어 기기만 있으면 세계 구석구석의 정보에 실시간으로 연결될 수 있다. ‘관짝춤’과 같은 살아있는 교재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온라인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고, 이런 주제가 수업에서 잘 다뤄지면 학습자와 교수자가 상호 성장하는 시간이 된다면 교수자가 의도하는 교육적 메시지 전달이 효과적으로 이뤄지기도 한다.
지금 어린이·청소년 세대는 문화다양성 존중을 위해 요구되는 가장 근본적인 태도인 인권 감수성도 이전 세대와 비교해 월등하게 예민하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내 인권’만 알고, ‘내 인권’만 존중한다는 점이 문제다. 교육 현장에서 이들이 배워야 하는 것은 바로 ‘다른 사람의 인권’과 이를 존중하는 태도이다. 특정 국가의 문화라는 이유로 채식인에게 고기를 강요할 때, 이슬람교도에게 삼겹살을 강요할 때, 사람들을 재미있게 하려고 얼굴에 검은 칠을 할 때, 누구의 인권이 지켜지지 않는지, 그리고 그들의 인권이 지켜지는 것이 왜 나의 인권을 지키는 것과 연결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교육 현장에 서는 교수자가, 그들 곁에 서 있는 어른인 내가 타인의 인권을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내가, 우리가, 사회가 달라지면 다음 세대는 저절로 달라질 것이다.
- 지현
- 페미니즘교육연구소 연지원 대표. 책 『소년문화탐방기』 『페미니즘으로 다시 쓰는 옛이야기』(공저)를 썼다. 페미니스트 가수로 노래하고, 어린이 청소년들과 만나 함께 배우는 즐거운 수업을 만들고 있다.
인스타그램 @ziihiion
브런치 brunch.co.kr/@ziihiion
유튜브 www.youtube.com/c/ziihiion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7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코너별 기사보기
비밀번호 확인
문화적 자부심을 넘어 세계시민으로서의 인권 감수성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다양성
정말 너무나도 공감이 가네요
“살아있는 교재를 얼마든지 발견할 수있다”란 문구를 보고 뇌파에 불이 들어왔어요.
한편,
퀘퀘묵은 교재의 재활치료는 가능할까 혹은
하나의 교안에 의지하던 습성을 바꿀수 있을까
그러나 언제나
중심가치의 헤게모니와 시장논리는
의지를 꺾는다. 다수의 편리성으로…
문화적 자부심을 넘어 세계시민으로서의 인권 감수성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다양성
기대만점이네요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는 말에 아주 공감하며, 타인의 문화와 역사, 상황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가야 할 때인거 같아요. 그리고 이해도를 높이는 것이 단순한 암기가 아니라 직접 만나고 교류하면서 더욱 높여나갈 수 있을거 같아요.
문화적 자부심을 넘어 세계시민으로서의 인권 감수성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다양성
잘 보고 갑니다
서로 다른 문화를 인정하고 문화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의식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고, 교육 현장에서도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는 교수자가 되어야 겠다.
다시 한 번 더 다짐해 봅니다.
문화적 자부심을 넘어 세계시민으로서의 인권 감수성으로
다음 세대를 위한 문화다양성
공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