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럽지만 이 지면을 빌어 고백한다. 광역문화재단 입사 8년 차 직원이지만 아직도 문화예술정책에서 자주 회자되는 언어들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지역성, 자생력, 선순환 구조’ 등의 언어는 내가 발 딛고 있는 땅과 삶에서 홀연히 떠 있는 것 같고, 내 직장이 뭐 하는 곳이냐고 묻는 친척들의 질문에 한 번도 속 시원한 설명을 하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부산문화재단 비전 2030’ 수립 집필을 담당하면서 가장 큰 고민이 어떻게든 붕 떠 있는 문화예술의 정책 언어들을 시민에게, 아니 적어도 내 동료들에게라도 선명하게 전달되도록 바꿀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삶과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문화예술
먼저 부산 시민의 일상 데이터를 모아봤다. 인구, 복지, 환경 자료를 집중적으로 찾았다. 도시는 단순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자 일정한 규범이 공유되는 문화 공동체이다. 어떤 규범이 통용되는지 살펴봤다. 데이터들은 말했다. 부산은 점점 외로운 도시가 되어가고 있다고. 일간지 보도에 의하면 부산 시민 4명 중 1명이 외로움을 느낀다고 했다. 자살률은 특·광역시 비교 1위이며, 빈집은 1만 4천여 호에 달했다. 1인 가구 수도 급격히 증가 추세고, 청년 고독사 비율도 노인 인구도 65세 이상 빈곤율도 전국에 대비하여 높은 편이다. 어느 도시보다 사회적 관계망 해체가 빠르고 진행되고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우리는 문화예술의 경제적, 교육적, 도시재생의 가치에 주목해왔다. 도시 문제보다 도시 미학에 집중하기도 했고, 통합문화이용권이나 문화나눔 사업 등 소외계층 시혜 사업 목적을 설명할 때 일부 사회적 가치를 언급해왔다. 그런데 문화예술의 가장 강력한 영향력은 시민의 건강과 행복을 증진하고, 공동체 결속력을 높여 ‘삶과 사회 변화를 이끈다’는 점이다. 여기서 삶과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가치가 바로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이다. 그래서 부산문화재단 비전 2030 미션으로 ‘시민과 함께, 예술인과 함께 문화예술로 사회적 가치 실천’을 잡았다.
비전 수립 간담회 때 만난 한 분이 “예술은 고립된 사람을 흔들어 깨우는 매력적인 힘이 있어요”라고 했다. 그 매력적인 힘에 주목해 보자. 부산 1인 가구 사회활동 참여율을 보면 문화 분야가 가장 높은 참여 유인 요인1)이었다. 일정 기간 이상 활동한 생활문화 동아리 참여자들은 지역 봉사에 기여하고 싶어 한다2). 미국 예술문화부는 「예술과 웰빙, 건강한 문화를 위하여(Art&Well-being toward a culture of health)」(2018)를 통해 예술이 건강을 얼마나 증진 시키는지 안내하고 있으며, 영국예술위원회에서는 ‘예술은 당신에게 좋습니다(Art’s good for you)’라는 주제로 다양한 캠페인3)을 전개 중이다.
그렇다면, 문화예술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문화재단의 주요 역할은 뭘까. 예술가, 예술교육자, 재단 직원, 과학자, 마을 활동가, 복지 전문가, 시민단체 활동가 등 다양한 집단과 간담회를 했다. 공청회 및 시민 설문 조사까지 포함해 총 3,687명의 이해 관계자가 참여했다. 창작 활동에 공정한 보상 체계를 마련하라는 예술가, 교부-정산의 판에 박힌 행정이 아니라 협력자로 나서라는 예술교육단체, 개인의 성장과 보람을 찾고 싶다는 재단 직원들의 문제제기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문화재단은 시민에게 예술의 선한 영향력을 선두에서 알리고, 예술과 타 집단을 끊임없이 매개하는 ‘가치 전파 집단’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실천과제로 재단의 사업 목표를 뚜렷하게 할 필요성을 느꼈다. 상당수 문화재단이 시행하는 지원 사업 공모나 행사 안내를 보면 거시적이고 비슷한 목표를 설정해놓고 있다. 생활문화로 사람과 문화를 융성하게 하겠다거나 예술진흥을 하겠다는 목표들 말이다. 어떻게 하면 예술 활동의 목표를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내며 가치 확산을 도모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에서 적용한 것이 바로 유엔(UN) 지속가능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이하 ‘SDGs’)이다.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지속가능한 발전
SDGs는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시행되는 유엔과 국제사회 17개 최대 공동 목표이다. 빈곤 퇴치(1), 건강과 웰빙(3), 양질의 교육(4), 성평등(5), 불평등 완화(10), 지속가능한 도시 공동체(11), 정의와 제도(16), 파트너쉽(17) 등의 목표를 담고 있으며 169개 세부 목표가 있다. 비록 문화만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항목은 없지만 예술교육, 문화다양성, 도시의 창조성과 혁신성 확보 등에서 문화적 측면을 뚜렷하게 언급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여전히 생소하고 특히 문화 분야에서 적용 사례는 미비하지만 해외 도시 문화 계획과 문화예술기관에서는 중요하게 논의 중이다.
세계지방정부연합(United Cities and Local Governments, 이하 ‘UCLG’)은4) 2004년 ‘문화 아젠다 21’ 도입과 함께 문화를 지속가능한 개발을 지탱하는 네 번째 축으로 명명했고, 유네스코는 문화다양성 협약과 함께 SDGs의 과제 이행을 강조하고 있으며, 미국의 비영리 기관 ‘아트(ART) 2030’5)은 세계적으로 역량 있는 예술가들이 SDGs와 관련된 흥미로운 예술 프로젝트를 추진하도록 매개하고 있다.
SDGs에 유념할 점은 슬로건인 ‘단 한 사람도 소외되지 않는 것(Leave no one behind)’의 이행이다. 외로움에는 문화적 요인이 분명히 작동한다. 차별하고 혐오하며 빈곤을 내면화하거나 자부심을 상실하게 하며, 집단 이기주의를 만드는 배제 문화가 있다. 정인 것처럼 포장된 오지랖은 창의적 이주민을 배척하고, 상대와 끊임없이 비교당하는 환경은 관계망과 나다움을 말려 죽인다. 혹시 그동안 추진된 수많은 문화 공동체가 또 다른 ‘끼리 문화’의 산실은 아닌지, 재단의 수많은 사업에서 다양한 시민이 참여하지 못하도록 의도적이지 않더라도 방관하지는 않았는지 고민해 봐야한다6). 이번 비전에서 문화다양성을 강조한 것도 바로 이 측면 때문이다. 누가 배제되고 있지 않은지 끊임없이 반문하는 태도가 바로 이 시대의 문화다양성이다.
비전 수립 시 만난 분들의 문화예술교육 비판은 뼈아팠다. 마을 활동가들은 예술가를 강사로만 이해했고 평생교육과 구분을 못 하겠다고 했다. 부산시 마을 단위 돌봄 체계인 ‘커뮤니티 케어’ 시스템에 예술교육은 없었다. 예술교육 성과는 수혜자 숫자 위주로 수렴되었고, 문화 접근성을 높인다고 설계된 온라인 신청 플랫폼은 정보력 있는 학부모여야 제 때 신청할 수 있다. 열성을 다해 마을 곳곳에 숨겨진 이웃과 예술을 소통하려는 예술교육자들은 소진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금의 문화재단 정책 네트워크 방식을 제고해 봐야 했다. 비전의 주요한 실천방법으로 집합적 네트워크와 협력한 커뮤니티 아트 확대 전략을 세웠다. 우리는 얼마나 타 분야 관계자들과 교류하고 있을까. 특정 재단 담당자나 예술가 개인의 노력에 기대지는 않았을까. 도쿄는 2015년 ‘도쿄 문화비전’을 발표하며 8대 전략 중 하나로 ‘교육·복지·지역 진흥 등 사회와 도시의 과제에 예술 문화의 힘을 활용’을 꼽으며 다양한 조직과 협력·연계 관계를 구축하겠다고 했다7).
‘부산문화재단 비전 2030’을 수립하기 위한 조사에서 한 시민이 이런 요청을 했다. “예술을 통해 시민의 삶을 변하게 하는 재단이 되어주세요”라고. 비전 수립을 함께 한 재단 동료들과는 ‘10년 후 인구도 줄고 세금도 줄 텐데 문화재단이 필요하다고 시민들이 지지해줄까’하는 섬뜩한 대화도 했다. 10년의 나이를 먹은 문화재단들이 많다. 미래 사회는 온갖 불확실한 것 투성이다. 문화재단이 불확실성에 대비해 준비해야 할 것은 예술의 선한 영향력이 확산돼 시민의 삶이 변할 수 있도록 관성을 깨고 태도를 바꾸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 부산문화재단은 지난 9월 재단 비전 2030를 통해 5가지 전략과제 20가지 추진과제 65가지 전략과제를 발표했다.
부산문화재단 비전 2030 [다운로드]
[참고자료·관련링크]
1) 부산지역 고독사 예방을 위한 다복동 연계 방안(2017, 부산복지개발원)
2) 2018년 생활문화동호회 활성화 지원사업 성과평가 연구 결과보고서(2018, 지역문화진흥원)
3) 영국예술위원회 트워터 ‘Art’s good for you’ 캠페인
4) 세계지방정부연합 ‘문화의 지속가능한 개발목표’(2018)
5) 아트 2030
6) 서울연구원 세계도시동향 제433호 : 파리에서는 매년 6월 장애·비장애인이 함께 하는 행사를 한 달 동안 개최하면서 편견과 차이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7) 서울연구원 세계도시동향 제357호
고윤정
고윤정
어쩌다 보니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어 왔다. 여성, 사회복지, 교육, 마을 공동체 관련 활동을 했고, 지금은 문화재단 근무 8년차다. 예술이 삶을 변화시킨 경험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 일 년에 몇 번씩 사표를 넣었다 빼고 있지만 문화재단이 도시를 얼마나 바꿀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다. 문화다양성, 문화도시, 문화공동체, 성평등, 포용예술에 관심이 많다.
happyhada@bscf.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