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과 EBS는 창의문화예술교육 콘텐츠 공동 개발을 위해 2017년 2월 MOU를 체결하였다. 양 기관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문화예술교육의 가치와 창의적 교육 콘텐츠를 전달하는 영상물을 제작‧방영하여, 누구든지 쉽게 예술교육을 접하고 누릴 수 있는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기여하고자, 일반시민이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공감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는 <창의예술 프로젝트-아이오프너> 콘텐츠를 공동 제작하게 되었다. 이번 아르떼365에서는 <아이오프너> 제작PD가 창의 문화예술교육을 방송 프로그램으로 풀어낸 시도와 <아이오프너>를 통해 일반 시청자들에게 던지고자 했던 문화예술교육적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들어보고자 한다.
올해 초 EBS에서 방송되어 좋은 반응을 얻은 <창의예술 프로젝트-아이오프너>(4부작). 국내외 아티스트들의 재기발랄한 창의력의 순간을 담은 프로그램으로, 타이틀은 ‘눈을 확 뜨게 만드는 것’을 의미하는 영단어 ‘eye-opener’에서 따왔다. 13명의 출연자들에게 익숙한 일상의 사물이 미션으로 주어지고, 이들은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이 사물을 자유롭게 재해석해 자신만의 창작물을 만들어 보여준다. 제시된 사물은 ‘라디오’, ‘사과’, ‘달걀’, ‘거울’ 4가지.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예술가들이 주어진 사물을 가지고 어떻게 아이디어 구상을 하고, 어떤 제작 과정을 거쳐, 어떤 형태의 최종 결과물을 완성하는지 이 모든 과정을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프로그램의 포맷은 심플해 보이지만, 제작 과정은 결코 심플하지 않았다. ‘창의력’이나 ‘문화예술’이라는 키워드가 주는 딱딱하고 어렵고 추상적인 이미지 때문에, 어떻게 하면 시청자들에게 쉽고 친근하게 다가갈 것인가가 첫 번째 과제였다. 기본적으로 ‘쿨 미디어’인 TV의 속성을 고려해 최대한 직관적이고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으로 접근하고자 했다. 문화예술 프로그램이 그동안 방송 쪽에서 인기를 끌지 못했던 이유는, 현장의 생동감과 재미를 고스란히 담아낼 수 없다는 한계 때문이다. 가령, 공연 현장의 생생한 감동과 짜릿한 쾌감을 어떻게 TV로 재현할 수 있겠는가. 어쩔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TV 콘텐츠를 통해 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영감을 얻고, 나아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창작을 해보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 이 지점이 바로 <아이오프너>를 통해 성취할 수 있는 중요한 교육적 효과다. 이사도라 던컨(Isadora Duncan)은 ‘무용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몸을 움직이고 싶게 만드는 것이다’라고 했다. 무미건조한 일상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자신만의 예술적이고 창의적인 삶의 방식을 찾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예술교육의 첫걸음이자 핵심 포인트가 아닐까. 그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를 것이다.
제작 과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건 ‘예측불가능성’이었다. 기획 단계에서 출연자들에게 미션을 주고 어떤 창작물을 만들고 싶은지 물었을 때, 단번에 답을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저마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필요로 했고, 최종 결과물이 무엇이 될 지는 제작진은 물론 아티스트 자신도 모르는 상태로 진행이 되었다. 1차로 스케치 작업이나 콘티를 받은 후에도 안심할 수가 없었다. 이후 과정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처럼 끊임없이 바뀌고 진화했다. 16년 째 방송 일을 하면서 이렇게 예측 불가능한 상태로 제작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어쩌면 ‘창의예술 프로젝트’라는 타이틀에 걸맞은 작업 방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출연자들은 까다로웠다. 아티스트들은 일반 출연자들에 비해 훨씬 예민하고 섬세하고 변덕스럽고 즉흥적이며 완고했다. 그리고 몹시 바빴다. <아이오프너>는 ‘방송 프로그램’과 ‘개인의 창작물’의 경계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출가로서의 권한뿐 아니라 예술가들의 작품 세계에 대한 존중이 전제되어야 했다. 그러나 일반 시청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추상적이거나 난해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은 경계해야 했다. 결과적으로는 출연자들과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을 진행하면서 그들의 자유로운 생각과 아이디어를 충분히 고려하고 최대한 반영한 것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제작 과정에서 또 하나의 어려움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시각화’하는 작업이었다. 특히 아이디어를 떠올리거나 발전시키는 과정은 긴 시간을 두고 아티스트의 머릿속에서만 진행되는 작업이기 때문에 촬영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성우 내레이션 더빙이라는 일반적 방식 대신, 아티스트의 인터뷰를 ‘보이스 오버(voice over)’로 편집하는 방식을 택했다. 아티스트의 목소리로 자신의 창작물을 직접 설명하게 함으로써 그 의미와 진정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또한 구구절절한 설명은 최대한 배제하고 비주얼만으로 직관적인 이해가 가능할 수 있게 촬영과 편집을 세팅했다.
<창의예술 프로젝트-아이오프너>의 핵심 콘셉트는 ‘다르게 보기’ 혹은 ‘낯설게 보기’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의 평범한 사물이 보는 시각에 따라 얼마나 다양하고 자유롭게 변모할 수 있는지를 이 프로그램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 『생각의 탄생』에도 이런 내용이 나온다.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것이 무엇인가’가 아닌 ‘그것이 무엇이 될까’에 착안해야만 우리는 사물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이번 프로젝트에 기꺼이 참여해준 아티스트들은 총 13명. 한글을 사랑한 글꼴 디자이너 안상수, 2018 평창 동계올림픽 메달 디자이너 이석우, 건물에 이야기를 담는 건축 디자이너 오영욱, 그래픽 아티스트 박훈규, 뮤지션 나잠 수, 발레리노 출신 시각 예술가 바키, 정원 디자이너 오경아, 팝 아티스트 포리, 문자 그림 작가 박지후 등 국내 작가들은 물론, 독일 베를린 출신의 퍼포먼스ㆍ혼합매체 작가 마르쿠스 부커라이트(Markus Butkereit),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의 조각ㆍ비디오 작가 트레이시 스넬링(Tracey Snelling),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출신의 드로잉ㆍ설치 작가 루시아 쉬흐(Lucia Szych) 등 해외 작가들이 출연해 무한 상상력의 결과들을 보여줬다. 섭외 단계에서부터 의도적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작가들을 고르게 선정하고자 했지만, 실제로도 워낙 개성들이 다양해서 아이디어나 그것을 구현하는 작업 방식, 최종 결과물 등 그 어느 것도 예측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들로부터 공통으로 추출해낼 수 있는 어떤 요소들이 있었는데, 아마도 그 지점에 창작의 비밀이 숨어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첫째는 구상과정의 공통점이다. 아티스트들은 예외 없이 산책이나 여행 등을 즐겼는데, 좋아하는 장소 혹은 낯선 장소를 여유롭게 거닐며 일상의 풍경이나 사물을 관찰하고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고 했다. 가볍게 몸을 움직이면서 자유로운 의식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아마도 사고가 말랑말랑해지는 순간이 아닐까 싶다. 속초에 사는 정원 디자이너 오경아는 종종 동네 산책이나 지리산 등반을 즐긴다고 했다. 독일출신의 퍼포먼스 작가 마르쿠스가 좋아하는 산책 장소는 대형 굴착기가 여러 대 동원되어 ‘파괴’가 일어나고 있는 거대한 공사현장이다. 미국출신의 비디오 작가 트레이시 스넬링은 다양한 이민자들이 거주하는 슬럼가를 가장 좋아하는 산책 장소로 꼽았다. 뮤지션 나잠 수는 황학동 벼룩시장 같은 독특한 분위기의 거리를 어슬렁거리며 영감을 얻고, 실험예술가 송호준은 틈만 나면 낚시 여행을 다닌다.
또한 이들은 작업 과정에서 다양한 변형을 시도했다. 가령 시각디자이너 안상수 교수는 최종 결과물이 컴퓨터 작업을 통한 타이포그래피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노트에 언어유희를 이용한 자유로운 연상들을 펼쳐보거나 큰 서예 붓을 들고 일필휘지하는 중간 과정들을 거치며 아이디어를 수렴해나갔다. 아르헨티나 출신의 조각가 루시아 쉬흐는 설치 미술작품을 제작하기에 앞서 자와 연필을 가지고 드로잉 작업을 진행했다. 그녀의 작업 속에서 2차원의 드로잉과 3차원 설치물은 사뭇 독특한 질감으로 만나게 된다. 그 외에도 건축가 오영욱, 산업 디자이너 이석우, 포토그래퍼 바키 등 많은 작가들이 실제 표현되는 물성과는 별도의 스케치 작업을 거치며 아이디어를 발전시켜나갔는데, 이렇게 ‘변형적 사고’를 거치는 것이 창의적 결과물의 중요한 과정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와 더불어 많은 아티스트들이 작업 중에 좋아하는 음악을 늘 틀어놓고 있었는데, 클래식, 재즈, 가요 등 선호 장르가 다양해 흥미로웠다. 이 음악들이 상호작용을 하며 작가들의 작품 세계에 무의식적으로 스며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본다.
인터뷰를 통해 드러난 창의력에 대한 생각들에서도 공통점이 있었다. 예술작품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위대한 작품들 위에서 자신만의 관심사를 가지고 쌓아올려야 한다는 것. 타고난 천재성이나 번뜩임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아주 고통스럽고 지난한 과정을 거쳐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를 집요하게 파고들고 꾸준히 노력해나갈 때 이루어진다는 것. 그리고 창의적 사고나 예술적 성취의 가능성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있다는 것. 아마도 이것이 가장 궁극적인 메시지가 될 것 같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우리의 교육이 좀 더 자유롭고 사려 깊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면.
이 프로그램이 즐거운 삶을 꿈꾸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의 가능성이 되어주길 바라고 있다. 우리의 눈을 확 뜨게 만들고(eye-opener) 우리의 닫혀있던 생각도 확 열리게(I-opener) 만들어줄 수 있다면, 그래서 잠자고 있던 우리의 창의력을 깨워줄 수 있다면. 일상에서 늘 보아왔던 익숙한 사물들의 무한 변신을 보고난 후 영감을 받은 당신에게, 식탁에 올라온 사과는 더 이상 매일 먹던 그 사과가 아닐 수 있다. 빨갛고 동그란 물체를 낯설고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며 “어쩌면 사과일지도 몰라!”라고 외치게 될지도 모른다.
- 이선희_EBS PD
- 지난 2002년 EBS에 입사해 <EBS 다큐프라임-남과 여>(3부작), <EBS 다큐프라임-링크>(3부작), <세상의 모든 법칙>, <문화예술 특집-나를 찾아줘>, <창의예술 프로젝트-아이오프너(eye-opener)> 등을 연출했다. 이 외에도 AIBD Awards 베스트 프로그램상 수상(2012), 프리쥬네스((Prix Jeunesse) 본선진출(2018)을 했다. 영국 옥스퍼드 브룩스대(Oxford Brookes Univ.) 영화학(Film Studies) 석사(2015)를 받은 뒤 영국 학술 저널 “New Review of Film and Television Studies”(Volume 14, 2016 – Issue 4)에 <Wes Anderson’s ambivalent film style: the relation between mise-en-scène and emotion> 게재·출판을 하기도 했다.
- sunny21c@e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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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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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지 않은 영상 안에 다양한 아티스트분들의 다양한 시각과 작품들을 볼 수 있어서 좋았어요. 절대 짧게 느껴지지 않았거든요.
일상 속에서 굳어진 제 생각을 툭툭 건드렸어요! 다른 사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_*
이선유님 일상에서 쉽게 지나치는 사물에 대한 예술가들의 상상과 생각을 공유하는 영상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도 아르떼와 EBS가 함께 새로운 문화예술교육 콘텐츠를 만들어 나갈 예정입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