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 그것은 또 다른 나에게로의 여행이다.

우리의 라이프스타일은 일정한 틀이 잡혀 있어 좀처럼 벗어나기 어렵다. 예술가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그들도 일탈이 필요하고, 때로는 의도적인 일탈을 감행해 카타르시스를 얻어내기도 한다. 큰 자극은 큰 변화를 초래하기 마련이다. 그런 탓에 예술가의 일탈 행위에는 극단적인 것이 많다. 음부 노출 혹은 과시 행위, 자학, 할복 자살. 일반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일들을 벌이며 이들이 얻는 것은 ‘다른 것의 가치’이다. 자아가 확장된다는 말은 현재의 자아를 부정하고 새로운 자아로 나아간다는 것인데 그 각성의 과정은 항상 통과의례를 요구한다. 이것을 ‘에고트립(ego trip)’이라고 부른다.

 

예술가들의 에고트립은 상식의 논리로 보면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지만 자신에게는 합리적이다. 그것이 아니고는 나를 달리 표현해 낼 방법이 없다. 사회적 인습을 무릅쓰고라도 내면을 표출해 내야만 숨 쉴 수 있다. 바꾸지 않으면 살 수 없고, 부딪히지 않으면 나아갈 수 없다. 그 절박함과 절절한 고백이 에고트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에고트립을 통해 각성된 자아는 새로운 예술로 표현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일탈을 꿈꾸고, 그제야 비로소 그들은 행복하다.

 

에고트립은 청소년들의 문화예술교육현장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북을 두드리고, 연기를 하고, 그림을 그리고, 춤을 추며 자신의 내면을 표출하는 동안, 청소년들은 그들만의 에고트립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기성세대의 시각에서 보면 거칠고 반항적이며 어리석다. 하지만 신선하고 재미있다. 그들의 일탈이 존중받아 마땅한 이유는 그 나이야말로 자신의 자아를 확고히 다지고 발전시켜 나감에 있어 에고트립을 경험해야 하는 적절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표출의 수단으로 문화예술교육이 차용되는 것이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일반 성인도 마찬가지다. 구본형 작가가 ‘익숙한 것과의 결별’이란 책을 통해 ‘변하라, 나를 구원할 것은 나뿐이다!’ 라고 말한 것과 에고트립은 정확히 일치한다. 거창하게 말할 것 없이 어제와 다른 낯선 행동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부터 갖자. 그리고 언젠가 욕구가 커지면 나만의 에고트립을 떠나 보자. 당신의 자아는 그만큼 확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