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만 무대 위 조명 아래 조그마한 남자아이 하나가 몸을 웅크리고 있다.아이는 가끔씩 고개를 살짝 비틀거나, 엉덩이를 조금씩 들었다 내렸다 한다.

작고 느린 아이의 몸짓은 달팽이를 닮았다.

조명이 하나 둘 더 켜지며 엄마, 아빠, 형, 누나도 보이기 시작한다.

다섯 명의 한 가족이 무대 위에 함께 서 있다.

그들은 한 여름 장맛비의 추억을 그리며 흠뻑 젖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7월 4주_그리다_이미지

오래전 스물 몇 살 늦은 나이에 사춘기가 찾아 온 적이 있다.삶의 방향성이 불확실해지고, 막연한 불안감에 하염없이 길을 걸어간 적이 많았다.

어느 날, 푹푹 찌는 한여름 하늘에서 소나기가 쏟아졌다.

비에 젖어가는 지친 발걸음을 따라 마음도 흠뻑 젖어 갔다.

우산 없이 걷는 빗속에서 새로운 감각이 열리며, 모든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자유했다.

내게 일상과 예술의 경계는 단지 빗속에서 ‘우산을 쓰느냐, 안 쓰느냐’의 차이 정도인 것 같다.때론 과감하게 비를 맞으며 느긋하고 당당하게 걸을 수 있다면, 그 순간 우리는 예술가다.

예술은 대수롭지 않은 일상에 딴죽을 거는 행위일 수 있다.

익숙한 일상에서 낯선 감각을 발견하고 도전해 보는 것, 그리고 그 감각 끝에 오는 자유를 만끽하는 것.

그런 게 예술이 아닐까.

오늘 무대 위 저 가족은 그 빗속에서 자유했다.

꿈다락 토요문화학교 주말문화여행은

예술가와 함께 여행을 준비하고 떠나는 과정을 통해 또래·가족 간 소통하고 성장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마련되어있다.그 중 ‘무브무브 드로잉 댄스(Move! Move! Drawing dance)’

미디어 아티스트와 무용가가 함께하는 다원예술체험 여행으로 아동·청소년을 포함한 가족이 일상 속 같은 주제, 같은 느낌을 몸과 회화작품으로 표현하는 내용으로 4주간 진행된다. 첫 시간에는 가족들이 일상 속 움직임을 관찰하고 서로에게 선보이고, 스토리보드에 기록했고, 우리가 방문한 두 번째 시간에는 극장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실제 움직임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경험했다. 소극장 무대 위에서 웅장한 배경음악과 조명을 받으며 각자의 일상과 기억 속에서 포착한 움직임을 느리고 빠르게, 아주 크고 작게 표현해 보고, 가족들 각자의 움직임이 모여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다. 일상이 특별함으로 변하는 이 순간을 경험한 어머니 참여자는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에 처음 참여했다. 아이들과 함께 무대 위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신기하고 즐겁다.”고 말한다. 움직임이 끝난 뒤 가족들은 이를 통해 느낀 다양한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다. 일기를 쓰듯 매번 같은 캔버스 위에 그날의 새로운 느낌을 덧입히며 자신의 감정을 다시 한 번 마주하는 것이다. 프로그램을 맡은 김용현 미디어 아티스트는 “예술은 일상으로부터 시작된다. 낯선 공간, 낯선 움직임의 불편함과 어색함을 몸으로 느껴보면서 감정적 충돌을 경험해 보길 바랐다.”며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프로그램에 녹이고자 했다고 덧붙인다. 가족들이 프로그램을 통해 경험한 것처럼, 예술가 역시 일상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움직임과 드로잉 등 다양한 시도를 함께 한다. 자신의 숨겨진 모습과 감성을 자연스럽고 다양하게 표현하고 느껴봄으로써 참여 가족들은 나와 나를 둘러싼 환경을 조금 더 특별하게 바라보는 예술적 체험을 하게 된다.


조숙경
조숙경
글쓰기와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며, 따뜻한 마음과 생각이 담긴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 한다.
<오뚝이는 내 친구> <돌아와 악어새> <북극곰이 곰곰이> <한나도 우리 가족이에요> <야옹이 어디간다> <그날 무슨 일이 있던 걸까> <배탈 난 호주머니> <쑥쑥요가> 등의 그림책을 출간했다.
sasa5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