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에서의 긴 밤’으로 한 층 낮아진 박물관 문턱
박물관에서 긴 밤 보내기
지난 방학의 끝자락, 베를린 소재의 200여개의 박물관 중 100여개의 크고 작은 박물관과 미술관들이 오후6시부터 새벽 2시까지 문을 활짝 열고 관람객들을 맞았다. 바로 「박물관에서의 긴 밤」이다. ‘Lange Nacht der Museen’을 직역하면 ‘박물관들의 긴 밤’이다. 필자가 굳이 ‘박물관에서의 긴 밤’이라고 번역한 이유는, 박물관들이 주최하는 프로젝트이지만 박물관 안에서 그것에 참여하는 주체는 관람객들이기 때문에 관람객의 입장에서 보면 「박물관에서의 긴 밤」이 맞는다는 생각에서다.
「박물관에서의 긴 밤」은 평소에 문을 닫았을 야간시간에 개관시간을 연장하는 것만이 아니다. 평소에는 관람객으로서 수동적으로 전시물을 감상했다면 이 ‘긴 밤’ 동안에는 준비된 많은 프로그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능동적 태도가 요구된다. 또한 직접 그리기 체험, 음악회나 무용, 낭독회 등 다양한 특별 프로그램들과 함께 축제 같은 분위기 속에 베를린 박물관의 다양함을 엿보고 경험하는 좋은 기회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1997년 처음 베를린에서 시작되어 이제 독일의 100여개의 도시와 세계 20여개 국가로 까지 수출된 「박물관에서의 긴 밤」은 벌써 25번째 생일을 맞았다. 행사 당일 날씨가 짓궂었지만 박물관 건물 처마 밑에서 잠시 비를 피할 때도, 셔틀버스를 기다리며 차가운 바람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사람들의 얼굴에는 항상 호기심과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날 늦은 시간까지 박물관을 찾은 관람객 약 3만 5천여 명 중에 상당수가 어린이였다. 학생들은 모든 박물관입장과 프로그램참여, 셔틀버스와 대중교통이용까지 8유로의 할인권으로, 12세 이하 어린이들에게는 그마저도 무료로 제공되었다. 이 행사의 주최자인 문화프로젝트 베를린(Kulturprojekt Berlin GmbH)과 박물관들은 행사가 시작되기도 전 이른 오후부터 다양한 어린이 프로그램들을 준비 제공했고 행사 당일 안내부스에서는 어린이들을 위한 프로그램들만 따로 모아 아이들과 함께 온 부모들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몇몇 박물관의 어린이를 위한 프로그램을 소개하고자 한다.
안네프랑크센터에서 현재의 ‘나’를 돌아보는 시간
안네 프랑크의 일기를 한번쯤 읽어 본 어린이들에게 특히 관심을 끈 안네프랑크센터(Anne Frank Zentrum)는 하케숴 마크트(Hackescher Markt) 근처 1920년 당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건물 2층에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장소였지만 어린이들이 한눈에 보기 쉽게 안네프랑크의 개인사와 독일정치상황을 비교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다른 한쪽 전시실에서는 당시 안네 프랑크 나이 또래의 어린이들이 주위환경, 자신과 타인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 나누고 있었다. 박물관이 단순히 과거를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현재를 비춰보고 미래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곳임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커뮤니케이션 박물관에서 “불가능이란 없어”
구 체신박물관이었던 이곳, 옛날 우체통부터 전화기 등 전통적 통신수단부터 현재의 첨단 커뮤니케이션 수단까지 전시하고 있다. 전시실에서부터 외부 마당까지 여러 공간에서 15개가 넘는 이벤트가 마련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가능한 살아 움직이는 교환의 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박물관의 주요 전시물만 뽑아 30분 안에 해설을 끝마치는 익스프레스 관람안내는 박물관 초보자나 어린이들에게 알맞은 기획이었다.
특히 어린이의 관심을 끈 것은 일명 ‘그리는 로보트(Drawbot)’였다. 로보트가 주위 환경에 따라 반응하면서 움직이는 것이 그림으로 표현되는 것이었다. 그 외 음악 퍼포먼스, 아프로 브라질의 춤을 직접 춰보는 것이나 그림 그리기 체험을 할 수 있었다. 뒷마당에서는 거리의 예술인 그라피티월을 스프레이로 직접 해보거나 이를 디지털로 그려볼 수도 있다. 아이들이 자신이 원하는 모양대로 자른 두꺼운 종이와 PVC 재질로 미리 제작된 조끼 위에 각종 재료를 붙이거나 그려서 직접 입는 ‘과거 또는 미래의 인물로 변하기’라는 창작 프로그램이 있었다. 이날 저녁, 비가 내린 이 후 차가운 바람을 피하기도 안성맞춤이라 어린이들은 자신의 창작물들을 입고 다녔는데, 마치 「박물관에서의 긴 밤」의 마스코트들이 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모델 바우하우스의 ‘미래의 내 집 설계하기’
마틴 그로피우스 바우(Martin-Gropius-Bau) 1층의 모델 바우하우스(Modell Bauhaus). 바우하우스는 90년 전에 설립되었던 가장 중요한 현대 디자인 학교 중 하나이다. 당시 이 학교 선생님이었던 파울클레나 칸딘스키의 회화작품부터 수공예품, 가구, 건축에 이르기까지 바이마르(Weimar), 데싸우(Dessau), 베를린시 3곳의 바우하우스기관이 처음으로 추진하는 공동전시이다. 전시마지막 공간 ‘Do it yourself Bauhaus!’에서는 관람객자신이 직접 자신의 방이나 집을 설계해 볼 수 있도록 꾸며져 있었다. 어린 아이건 어른이건 모두 책상에 앉아 모눈종이에 열심히 설계도를 그린다. 그린 후에는 벽에 걸어두어 관람객의 설계도가 모델 바우하우스의 하나의 전시물이 되었다.
그 밖에도 어린이를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공하였다. 이 행사의 주제인 변화 속의 박물관 지형(Museumslandschaft im Wandel)을 재활용 재료를 이용하여 작품으로 표현하기, 장벽 만들기, 작은 그림들이 모인 아트월 만들기, 도자기 만들기, 히브리어로 티셔츠에 이름쓰기 등 창작활동은 물론, 동서독의 어린이놀이 체험하기, 플레이스테이션이나 닌텐도가 생기기전에 어린이들의 놀이인 자루경주나, 수저에 달걀을 올려놓고 달리기인 스푼레이스, 건초로 만든 공으로 놀기, 어린이를 위한 마술이나 어린이들이 같이 노래하고 연극하기 등 어린이들이 박물관과 친숙해질 수 있는 것이 많았다. 「박물관에서의 긴 밤」은 평소 박물관을 즐겨 찾는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전시나 그동안 가보지 않았던 박물관들을 돌아볼 기회를 제공하고 박물관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흥미로운 프로그램을 통해 박물관의 문턱을 낮춰주는 역할을 한다.
2년 전 여름에 있었던 베를린의 신국립미술관(Neue Nationalgalerie)의 뉴욕 모마(MOMA) 전시회가 생각난다. 그 전시회를 보기위해서는 표를 사느라 몇 시간을 줄을 서서 기다리고 또 입장순서를 기다리느라 몇 시간을 근처에서 소일해야 했다. 그 때 눈에 띤 것은 재래시장에서 마주칠법한 너무나도 평범한 차림의 50대 60대의 어른들이 함께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필자의 기억에 따르면 한국에서의 주 관람객은 젊은 연인들이나 학교에 숙제로 입장권을 제출해야 하는 학생들, 아이들의 손을 잡은 젊은 부모들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박물관에서의 긴 밤」처럼 관람객 눈높이에 맞춘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박물관의 문턱을 낮추고 더욱 친숙하게 일상으로 다가온 듯하다. 문화의 향유는 그렇게 교육되는 것이다. |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좋아요
0비밀번호 확인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