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 사회를 준비하는 교육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하는 청소년 타문화 체험 프로그램>

이란주|아시아인권문화연대

(아르떼 주) 이번 사례발굴은 <외국인 노동자와 함께 하는 청소년 타문화체험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이주 노동자들이 학교나 복지관을 찾아가서 자국의 문화에 대해 설명하는 탐방 프로그램으로 현재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시행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한국사회에서 제 3세계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과 왜곡된 시선을 그들 자신의 언어로 풀어나감으로써 문화는 ‘평가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임을 알려나가기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의 필자인 이란주 선생님은 외국인 인권 보호를 위해 활동하고 계시며, 작년에는 [말해요, 찬드라]라는 책을 통해 한국사회에 존재하는 외국인 노동자의 문제를 드러내고 한국사회의 성찰이 필요하다는 점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 역시도 한국의 학생들과 이주노동자들의 만남을 통해 상호 이해의 과정을 확장하기 위한 실천적 과제를 교육을 통해 풀어나가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외국인노동자’라는 이름에는 아주 많은 이미지가 들어있다. 검은 얼굴, 두터운 입술, 곱슬머리, 촌스러운 옷차림, 어눌한 한국어, 겁먹은 듯한 커다란 눈망울, 두꺼운 파카, 큰 가방, 욕설, 구타, 눈물, 가난, 고향, 검은 손과 흰 손바닥, 기름때, 작업복, 범죄…

이런 이미지를 굳이 ‘긍정’이나 ‘부정’으로 나누어야 한다면 아무래도 ‘부정’쪽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이주노동자를 직접 접하고 이야기를 나누기 어려운 일반인들은 주로 언론매체를 통해 가공된 이미지를 받아들인다. 실제가 어떠한가를 고민할 필요도 별로 없다. 주된 관심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래도 좋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서는 ‘아시아 아시아’나 ‘블랑카’를 통해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이미지 또한 그리 건강한 것은 되지 못하고 있다. 방송은 이주노동자를 동정이나 연민의 대상인 듯 그려내고 있어, 그 방송을 접하는 이들은 이주노동자를 내 곁에 살고 있는 이웃이거나 혹은 서로 존중해야 할 ‘또 다른 문화인’임을 느끼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이주노동자들이 겪는 고충을 들어보면 그 고충이 대부분 한국인과 이주노동자 사이의 갈등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갈등을 차근히 살펴보면 뿌리에 도사리고 있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무시와 천대를 만나게 된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던 인종 혹은 민족차별의식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차별의식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를 밝히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다만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리 과거를 거슬러 따져보아도 지금처럼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 땅에서 함께 했던 적이 없던 터라, 지금 한국인들은 상당히 낯선 상황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늘 단일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여겨왔고, 항시 오랑캐를 경계하며 살아 온데다, 근․현대 들어서는 위로는 북한을 두고 있고 양옆과 아래는 바다로 막혔으므로 ‘이웃나라’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다. 급작스런 개방과 전쟁을 경험하며 다가온 ‘서양’은 우리 이웃이라기보다는 은근히 두렵기도 하고, 마음은 가까이하고 싶지만 현실은 멀기만 한 ‘동경의 대상’일 뿐이었다. 우리는 전혀 ‘이웃’을 느끼지 못하고 살다가 갑자기 진정 ‘이웃’이라 할 만한 이들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우리 이웃을 대하는데 너무도 서투르다.

‘이주노동자‘라는 이름을 가진 우리 ‘이웃’은 경제적 능력과는 무관하게 아름다운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급하고 빡빡한 우리와는 달리 해방된 정신과 여유를 가진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잣대에는 단지 ‘경제력’만 표시되어 있으므로, 우리는 이웃을 그것으로만 재고 판단한다. 그런 폭력에 가까운 잣대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무시와 차별’이라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

이제 새로운 만남이 필요하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 동정이나 차별이 아닌 동반자적 의식이 필요하다. 애초에는 청소년과 이주노동자의 만남을 통해 이주노동자 출신국의 문화를 나누며, 이주노동자가 처한 상황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도록 하여 차별의식을 낮추는데 목적을 두고 프로그램을 고민했다. 그런데 진행하다보니 초등학생에게도 그 눈높이에 맞는 즐거움을 선물하는 것이 필요했다. 초등학생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부득이 ‘이주노동자’를 강조하던 부분을 접어야 했다. 이주노동자의 상황이라는 것이 너무도 열악하거나 왜곡되어 있어 아이들에게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는데, 자칫하다가는 우리 사회를 제대로 보는 시각을 기르기보다는 무조건 ‘불쌍한 외국인노동자’로 여기게 될 것이 우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다문화사회를 살아가야할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여러 가지 문화를 접하게 하고 다양한 인종과 국적, 언어를 느끼게 하여 문화의 차이를 알고 제대로 이해하도록 이끌어 내는 것 또한 소중한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소중한 체험이 될 것이다.

이주노동자들이 아이들을 직접 만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극복해야 한다. 밤샘 일을 마치고 졸음을 쫓아가며 준비한 수업을 못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회사 측이 생산에 차질이 생길까봐 외출이나 휴가를 허락하는데 무척 인색하기 때문이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이주노동자는 아이들을 만나게 된다. 아이들은 먼저 만나게 될 선생님의 나라를 지도에서 찾아본다. 거리를 계산해 보고 얼마나 먼 나라인지, 혹은 가까운 나라인지를 따져본다. 거리가 아무리 멀어봤자 지도상에서는 한 뼘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 한 뼘을 건너오는데 수 천 만원의 돈이 오가야 하고 또 길게는 몇 년 씩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다만 아이들이 만약 그 나라를 방문한다면 몇 시간 비행기를 타야하는지, 그 나라의 날씨는 어떻고 그래서 옷차림은 어떤지를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아이들은 옷을 만져보거나 입어보고 먹거리를 살펴보거나 혹은 직접 맛을 보며 그 나라와 그 나라 사람들의 삶을 조금씩 느껴보게 된다. 가끔은 입에 맞지 않는 음식에 얼굴을 찌푸리거나 코를 싸쥐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무척 수줍어하고, 그 다음엔 막힘없이 한국어를 꺼내놓는 외국인을 신기해한다. 그 다음엔 다가서고 말을 붙여본다. 여기까지는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는 과감해 진다. 매달리고 밀치고 끌어안는다. 아이들은 이것저것 많은 것을 듣고 보지만 정작 그런 것들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직접 만난다는 것이다. 그 ‘사람’같이 이야기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사이에 아이들은 자연스레 ‘다른 문화’를 만나게 된다. 문화적 이해와 존중은 차별이나 편견을 지우는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지우개가 될 것이다.

이란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