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문화교육] 별학교에서의 문화예술 교육 : 서사, 다양성, 미적 체험 그리고 평가

[사회문화교육] 별학교에서의 문화예술 교육 : 서사, 다양성, 미적 체험 그리고 평가

김현수|성장학교 별 교장 / 정신과 전문의, 교육활동가

1. 서사를 중심으로 하는 문화예술 교육

“별학교의 최근 마지막 프로젝트는 고구려 프로젝트였다. 아이들은 고구려지도를 그려보기도 하고 온달산성을 방문하기도 했으며 고구려 벽화를 감상하기도 하였다. 별 학교의 패션 동아리는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고구려의 의복을 만들어 보기도 했고 컴퓨터 동아리에서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고구려 영토를 포토샵으로 그려보는 프로젝트를 하기도 했다. 장수왕과 광개토대왕이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한 고구려 왕들의 생활에 관해서도 특강을 들었다.
지난 여름 별 학교의 또 다른 프로젝트는 2차 나눔학교였는데 나눔 활동 중에 타문화 나눔 시간이 있었다. 이주 노동자들의 애환과 이주 노동자들이 살아온 모국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시간이었다. 몽골 문화나눔팀이 방문을 하였고 몽골의 문화전통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고 몽골의 춤을 배웠고, 몽골의 의복을 입어보기도 했다. 몽골 사람들이 말을 잘 타기 때문에 말 타는 시범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말을 빌릴 만큼의 돈은 없었다. 말을 타고 몽골의 평원을 달리는 사진만 보았다.”

별 학교는 이런 식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학습이 문화예술 교육의 중심이 된다. 문화예술 교육을 진행하면서 가장 유념하는 것은 서사성(narratives)의 문제이다. 서사성은 통찰적 이해를 높힌다. 과거에 어떻게 살았고 과거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으며, 그것이 현재에 어떻게 거슬러 왔고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라는 시간의 구조안에 나(주체)는 그것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고 연결할 것인지, 그래서 내 이야기는 무엇인지를 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서사적 해석과 서사적 생산에 참여하게 된다. 청소년기의 자기 정체성 이슈라든가, 미래 개척적 태도에 관한 이슈들은 서사적 접근 방식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모두들 요즘 청소년은 꿈이 없다-근대기의 청소년들이 가졌던 출세와 야망, 모험과는 다른-고 한다고 치면, 그 꿈의 공백은 서사의 공백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하는 접근이 별학교의 중요한 교과과정 요소이다. 그런 점에서 가장 재미있는 서사적 문화예술 교육은 길거리 명사 특강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국가와 집단에 복무하는 거대 서사가 아니라 삶의 안목을 넓혀주는 미시 서사학이 곧 이웃들의 특강이다. 과목명이야 다양하게 편성되지만 동네 사람들을 불러들여 살아온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야말로 가장 문학적이면서도 예술적인 시간들이다. 나는 우리 동네 순경 아저씨나 팬시점 아저씨같은 천하의 숨은 이야기꾼들이 하는 교육-요즘 말로 하면 토크쇼-이 참 매력적이고 흡인력도 높고 교훈도 명백하다. 인간극장, 휴먼 다큐멘터리를 생라이브로 하는 시간인데 여기에다 해피 투게더나 야심만만 같은 토크쇼를 버무린 분위기이다. 이런 길거리 명사 특강이 지닌 또 다른 중요한 교육적 장점이 있다.

2. 다양성과 다원성을 중심으로 하는 교육

길거리 명사들은 문화를 이야기하고 예술을 이야기한다. 그들의 삶이 한 편의 예술이니까 그 이야기가 곧 소설이고 이야기의 배경은 미술이고 그들의 억양이 음악이다. 보통 그들의 현재는 평범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다 특별한 에피소드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 에피소드는 보통 시적인 감흥을 전달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의 삶도, 내 삶도 그럴 것이다.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아저씨들이나 아줌마처럼 되어 있을 것이다. 그 몇몇 중에 제 2의 보아가 나오고 제 2의 조인성이 나올 수도 있고 또 다른 뛰어난 장인이 탄생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서 길거리 명사 특강은 스타 아닌 스타들의 문화예술 교육이고 우상이 없는 문화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고 직접적인 사람과의 교류에 기초한 ‘입김을 느끼는 교육’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내가 지니고 있는 지나친 우려를 말하고 싶다. 그것은 다름 아닌 문화예술 교육과 스타를 키워내는 연예교육과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것에 관해서이다. (이 이야기를 길게 하고 싶지만 간략히만 한다) 또한 새로운 문화예술 교육의 부흥이 문화예술 자체의 과잉이거나 문화예술의 획일화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 점에서 별학교에서 꿈꾸는 두 번째 문화예술 교육의 핵심은 다양성과 다원성이라 할 수 있겠다. 한국의 문화는 여전히 획일적이다. 흔히 공교육이든 대안교육이든 그 문화적 행사들의 발표회를 가서 만나는 씁쓸함은 문화적 다양성의 부재이다. 지금은 ‘영상’이 주도하는 분위기인데 한때는 ‘힙합’이 한때는 ‘댄스’가 유행이었다. 문화자본주의의 패턴에 따라 문화 교육의 주류가 뒤바뀐다.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문화예술 교육, 표현에서의 다양성, 기초 문화적 소양과 교양에 대한 교육적 투자들은 아직 우리에게는 걸맞지 않는 옷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동요와 가곡이 없어진 나라, 회화가 없어진 나라에서의 문화예술 교육 부흥이 어떤 모습을 안고 나타날까? 플라톤이 말했던 마이토스(mythos)의 문화가 온갖 판타지로만 가득 찬 나라에서 문화예술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것은 나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학교에서의 문화예술 교육이 연예산업과 연예 교육의 정거장만으로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교육자들의 새로운 신념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생각해본다. 어찌됐든 별학교에서는 한 가지 주제를 표현할 때 선택할 수 있는 표현방식과 도구는 최대한 아이들의 개성에 따라 접근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꽃에 관한 예술 수업은 꽃말사전을 만드는 언어적 접근부터 꽃비누를 만드는 실용적 접근, 꽃을 시와 노래로 표현하는 방법까지 모두 가능하도록 개방한다. 동시에 음악 수업을 하려고 할 때에도 음악을 그림으로 표현하거나 가사를 만들거나 몸으로 음악을 표현할 수 있도록 하기도 한다. (프로젝트 학습의 장점은 이런 점에서 문을 열어놓은 학습 운영이라는 것이기도 하다.) 선생님들은 때로 고전으로서의 톨스토이 문학학교를 개최했지만 아이들이 표현하는 톨스토이는 귀여니 스타일일 수도 있다.

3. 아름다움 체험 중심의 교육

문화예술 교육의 목표는 다양하게 표현될 수 있는데 별 학교에서의 목표는 1) 아름다움을 느끼고 2) 생산할 줄 알고 3) 즐길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동시에 4) 이 힘을 자기 인생에 활용할 줄 알게 하는 것이다. 더 쉬운 말로 하면 ‘참 좋다’라는 느낌과 그 ‘참 좋다’라는 느낌이 인생의 활력이나 밑둥지 기초가 되는 것이다. 며칠 전 한 교수님께서 예술을 음미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는데(조금 고상한(?) 것에만 초점을 두셨지만) 나름의 깊은 감흥이 있었다. 물론 아름다움의 정의가 무엇이냐는 상당히 복잡한 미학의 이론들을 동원해야 하겠지만 누구나의 보편적 공감대로 생각하기로 하자. 청소년기에 아름다움에 관해 갖게 된 호기심과 동경, 경외심을 키워주는 것 자체가 매우 영적인 활동이며 그 궁극에는 건강한 자기애로서의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추구가 있다. 파머라는 교육학자는 “세상 만물에 담겨있는 진리와 아름다움이 나에게, 내 안에서 실현되고 있는 원리”가 되도록 노력했거나 혹은 이를 발견을 때 교육은 정점에 달한다고 했다. 별학교에서 아름다움의 체험을 제공하는 방식은 더 많이 보고 더 다양하게 보고 더 많이 해보고 더 다양하게 해보고 하는 방식이 일차적 방식이다. 또한 다르게 보고 뒤집어 보고 느끼는 대로 보고 다르게 해보고 뒤집어 해보고 느끼는 대로 해보는 방식이다. 여기에는 기준이나 표준같은 것이 없다. 과학적 평가라는 마술에 주문이 걸려 똑같이 해야만 하는 잣대로 평가되는 것도 없다. 오직 그들의 주관적 경험에 대해 깊이 더 깊이 만나고자 해보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문화예술 교육도 아마 또 평가라는 요구에 의해 예산을 포함한 모든 사업들이 영향을 받을 것이다. 끝으로 이 평가에서의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보편타당한 기준을 만드는 작업에서 신중함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각 자가 느끼는 아름다움을 어떻게 재단할 것인가? 이 쉽지 않은 질문에 반응할 수 있는 우리의 문화적 여유와 보편적 인류 정신에 대한 태도를 우리가 어떻게 사회적으로 다시 합의할 것인지가 문제이다. 이미 서구의 대안학교들은 주로 포트폴리오 과정 수첩 만들기와 같은 방식의 평가를 대안적 평가로 여기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이 가장 옳은 방식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문화예술 교육이 평가의 함정에서 슬기롭게 빠져나와 그들이 느낀 아름다움의 체험을 깊이 존중해주는 방식의 지혜로운 길을 찾아야할 것이다.

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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