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누가 저렇게 날아다니는 거지?”

신정수|웹진콘텐츠팀|yamchegong@naver.com

“대체 누가 저렇게 날아다니는 거지?“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중 22쪽, 마르크 샤갈 지음)

몇 년 전, 시험을 보는 날 아침이었다. 책을 급히 읽으며 교문을 지나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몇가지 핵심 단어들을 머리 속에 우겨넣고 있는데, 앞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대화가 집중을 방해한다. 정치 이론에 대한 그들의 토론이 아침부터 시작되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한나 아렌트’라는 이름이. 그들의 대화는 도서관을 성당을 지나고, 도서관 앞을 지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나는 여전히 책에 머리를 박고 앞사람의 발뒤꿈치를 곁눈으로 쫒으며 길을 잃지 않고 걷고 있었다. 그러다 도서관 앞을 지날 때 누군가 내 어깨를 툭 치며 ‘여어!’하고 인사하는 바람에 고개를 들게 되었는데, 그 때 나는 깨달았다. 나를 방해하던 대화가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그 대화를 다시 되새겨 본다면 이런 식이다.

“아까 그 떡볶이 집 별로야. 오늘의 선택은 실패야.”
“……”
“그러게, 단무지 맛이 허연 것이 분명 씻은 단무지야.”
“……”
“그래? 아까 주인한테 말하지. 에이, 그럼 우리 꽁짜로 먹었잖아!”
“……”

앞서가던 서류가방을 든 안경 쓴 남자는 계속 말하고 있었지만 그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은 거기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그 순간에도 ‘누군가’와 대화하고 있었다. 가끔 무의식의 행동이나 대화가 실제 세계에서 펼쳐지는 순간을 마주친다. 어린아이들이 혼자 소꿉놀이나 인형놀이를 하는 모습에서도 만날 수 있다. 외화 ‘앨리 맥빌’도 이런 사람이 겪는 에피소드이다. 앨리가 ‘내 인생의 주제가’를 찾던 에피소드가 기억난다. 앨리가 횡단보도에 서서 혼자 자기 주제가를 머리 속으로 흥얼거리며 발가락을 끄덕끄덕 했더니, 곁에 서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같은 리듬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앨리의 주제가가 소리 없이 그 거리에 울려 퍼졌고, 사람들은 소리 없는 음악에 춤을 추면서 횡단보도를 건넜다.

서울 시립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샤갈, 색체의 마술사’전을 다녀왔다. 샤갈 전시회에는 유독 연인과 아이들을 데려온 부모들이 많다. 몇몇 아이들은 덥다고 짜증을 냈고, 어떤 아이는 어떻게 평생 이렇게 많은 그림을 그렸는지 신기하다고 말했다. 대부분의 부모들은 아이들의 그림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도록 질문을 계속한다. “이 그림 속에 소는 어디에 숨어있을까?”와 같은 흥미를 끌어내는 일반적인 질문에서 시작해서, “이 그림의 제목은 뭘까?”로 이어진다. 부모들도 흥미가 떨어지기 시작했거나, 질문의 소스가 떨어진 것이다.

앨리 맥빌의 주제가가 그랬듯이, 부모들은 아쉽게도 샤갈의 꿈이 말없이 전이될 틈을 주지 않는다. 전시장에서 샤갈의 꿈속을 거니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전시장 한가운데에 서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가, ‘가족’이라는 작품의 어둠 속에서 빨갛게 빛나는 파란 새의 눈과 마주쳤다. 집나간 날개 달린 ‘파란추시계’를 기다리며 현관에 서 있는 아주머니가 나를 쳐다봤다. 엄마 손을 잡고 전시를 구경하던 남자아이가 날아가는 바람난 추시계를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나한테 뭐라 한다. 모세가 십계명을 새긴 돌을 치켜세우니 사람들이 알록달록 물들었다. 바다 속의 세이렌은 뱃머리의 아테네를 보고 파랗게 질렸다.

전시장을 나오려다가, 다시 1관으로 들어가 가로, 세로 15cm 정도의 황금액자 속 샤갈의 자화상에 눈동자를 맞췄다. 샤갈의 두 눈동자와 유리에 비친 내 눈동자가 딱 맞도록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어느 날 한 친구가 내 방에 와서 벽에 걸린 그림들을 보고 소리쳤다.
“와, 너 정말 예술가구나?”
“예술가? 그게 뭔데? 누가 예술가야? 나도…나도 그게 될 수 있어?”
(샤갈, 꿈꾸는 마을의 화가 중 52쪽, 마르크 샤갈 지음)

신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