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사 애니메이션 20주년 기념전

픽사 애니메이션 20주년 기념전

 
   

존 라세터의(그 유명한!!) 단편애니메이션 <룩소 주니어(Luxo Jr.)>를 처음 보았을 때 놀라운 기술력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작가의 관찰력에 탄성이 나왔다. 평범하게 주변에서 목격하게 되는 아이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그렇게 공감되는 스토리가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3D애니메이션의 질감을 트집 잡으려고 노려볼 수 없었다.

1989년 즈음에 <룩소 주니어>를 수업시간에 초등학생들에게 보여주었던 기억이 난다. 순간 모두가 스크린에 집중하다 주니어가 공을 따라 뛰어가는 장면에서 모두가 “까르르” 하며 웃었다. 다른 피드백은 없었다. 그냥 웃겼다. 뭔가 더 설명해 주려고 준비했던 강의 내용이 무색해졌고, 함께 영화를 본 것만으로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되었다. 존 라세터는 단지 매체실험 때문에 컴퓨터 모니터에 드로잉을 옮겼을까?

“펜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게 연필이 아니듯이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것도 컴퓨터가 아니다. 컴퓨터 애니메이터는 아티스트다.”
이것이 존 라세터가 전하는 말이다. 지난 20년 동안 픽사의 아티스트들이 어떤 말을 들어왔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테크놀로지의 놀라운 진화와 컴퓨터애니메이션은 절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이 전시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것은 테크놀로지와의 멋진 융화를 해낸 것이 아닐 터. 픽사 애니메이션 기념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탄탄한 스토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과, 캐릭터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아티스트의 진정성을 엿볼 수 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웰컴존을 통과하게 되는데, 다분히 설명적이어서 실망스럽다. 이런 느낌을 주는 것은 이후에 만나게 될 놀라운 광경과 체험이 있어서 끝나고 느끼게 되는 실망이다. 웰컴존을 지나 바로 캐릭터전시를 만날 수 있다. 이미 스크린을 통해 익숙하게 만났던 캐릭터들의 낯선 모습을 만날 수 있는 전시다. 픽사의 단편 애니메이션이나<토이스토리>, <몬스터주식회사>, <벅스라이프>에서 <월-E>까지 한 점의 전시도 놓치고 지나칠 수 없을 만큼의 시각적 호강이 시작된다.

밥 폴리의 펜슬아트는 이번 전시의 상징처럼 전면에 드러났지만, 정작 그 작품 앞에서면 <토이 스토리>의 우디와 버즈가 반가워서 한참을 서있게 될 것이다. <몬스터 주식회사>의 설리번과 마이크의 캐릭터를 마커로 그린 피트 닥터의 낙서에서는 반복과 일상 속의 창의력(creative routine)이 어떻게 구현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 작품의 애니메이션에서 작화를 위한 상상력이 끊임없이 샘솟는 것이 가능하려면, 그 캐릭터의 세계가 작가의 일상 속에 자연스레 용해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낙서의 즐거움으로 경쾌하게 보여준다.

 
 

애니메이션에서 캐릭터가 생명력이 확보된다는 것은 아티스트가 그 캐릭터를 이해하는 것보다는 그 캐릭터에 자체여야 한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 있다. <인크레더블>에서 조연 격으로 나오는 에드나가 바로 그 인물이다.

<인크레더블>에 등장하는 에드나 모드는 수퍼영웅들의 수트를 디자인하는 의상디자이너다. 영웅들은 재난에서 사람들을 구해주거나 평화를 위해 싸우며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그 영웅들의 뒤에서 묵묵히(?) 영웅들의 능력에 적합한 수트를 개발하고 있는 디자이너가 에드나 모드.

따지고 보면 픽사의 아티스트는 에드나와 닮아 있다. 애니메이션 한편이 완성되기까지 작업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캐릭터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지만, 결국 캐릭터의 뒤편에서 묵묵히 즐거워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테디 뉴튼의 꼴라쥬나 토니 퍼실의 스케치에서 도도함과 예술가 기질을 확인하는 건 이번 전시에서 아티스트에게 감정이입 해 보는 놀라운 경험이 된다.

 
 

잠시도 쉴 틈 없이 전시장을 다닌다고 하여도 족히 3시간은 걸린다. 욱신거리고 아파오는 종아리에서 신호가 올 때면 픽사의 단편영화와
<조트롭(Zoetrope)>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앞서 소개했던 <룩소주니어>를 비롯하여 <앙드레와 윌리B의 모험>, <레드의 꿈>, <닉낵>, <틴토이>를 연속하여 관람할 수 있도록 상영관이 마련되어 있다. <조트롭>의 부스로 들어가면 망막잔상의 원리를 오브제와 제한된 플래시로 재현한 장난감놀이(?)를 만날 수 있다. 지브리 스투디오에 토토로 조트롭을 본 사람들은 조금 실망할 수 있겠으나, 픽사의 캐릭터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는 것만으로도 멋있는 작업이다.

캐릭터의 디테일을 스케치하며 연구한 흔적이나 놀랍도록 진지한 해부학적 이해, 그 자체로 독립적 예술임을 입증하는 각종 조각상을 지나면 스토리와 월드&컬러스크립트에서 전시의 최고조에 이른다. 캐릭터가 살아 움직이는 과정에서 비주얼은 결국 스토리텔링을 구현하기 위한 방법일 것이다. 공간과 상황에 대한 상상력, 스토리 전개에서 특징적인 움직임의 묘사방식, 총체적 이미지를 미려하게 표현한 회화작품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아트스케이프에서 10여 분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아트스케이프는 20주년 기념전을 위해서 제작한 특별한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캔버스에서 모니터로 아티스트가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자전적 고백이 담겨있기에 감동적이다.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안 좋아하고를 떠나서, 훌륭한 작품으로 세계를 깜짝 놀래키고 말고를 떠나서(어떤 상을 받고 흥행에 성공하고 말고를 떠나서) 최소한 이번 전시회는 애니메이션 아티스트의 진심이 담겨있어서 알차다. 볼 것이 많다기보다는 충분한 시각적 선물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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