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대체로 백가지 정도가 있어

신정수|웹진콘텐츠팀|yamchegong@naver.com

올 봄, 부천영화제 상영표에 형광펜으로 동그라미를 수백번 치고도 표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게 했던 영화들이 있다. 그 중에 가장 아쉬웠던 것은 일본의 ‘녹차의 맛’과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ジョゼと虎と魚たち)’이다. 멀티플렉스 극장이 동네의 작은 극장들을 대체한 이후 100만 명 이하의 사람들이 보고 싶어하는 영화들을 볼 기회가 사라진 것을 벽을 치며 아쉬워했다. 동네를 지저분하게 한다고 욕했던 동네 극장의 영화상영포스터도 못 보게 된지 오래이다. 뭐 동네의 중소극장에서 얼마나 ‘마니아적인(?)’ 영화를 볼 기회를 제공해주겠느냐마는 간혹 동시상영 패키지 사이에서 보물처럼 끼어있는 하나, 그리고 대학 후문에 있는 영화관에서 단관 개봉하는 영화 등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히 있었다. 그래도 최근에는 부산영화제까지 가지 않아도, 부천영화제에서 놓쳐서 하루 종일 울분을 토하지 않아도 될 만큼 서울에서는 작은 규모의 영화제들이 ‘다음에 잘해줄게’라는 약속을 지키 듯, 두세 번의 기회를 더 주곤하며, 드물게 멀티플렉스 극장의 몇 개 지점에서 개봉하는 일도 있다. 아직은 서울에서의 일인 것 같지만.

영화 이야기를 시작하다보니 서두가 길어졌다. 다시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ジョゼと虎と魚たち)’이야기로 돌아가겠다. 이 영화는 2004년 부천영화제에서 가장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은 영화라는 호평과 함께 서울 시내 4개 정도의 극장에서 개봉되었다. 비록 부천영화제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말끔히 편집된 프로그램 책(한 장의 스틸 컷과 두세 줄의 영화 개요로 소개를 다했다는 듯 입을 싹 씻고 있는 바로 그 책)만을 보고도 형광펜으로 백번도 넘게 줄을 쳐가며 ‘얌체의 초이스’라고 기대했던 나의 선견지명을 증명함이 아니겠냐고 자랑했다. 누군가 그랬다. ‘한바탕 연애를 하고 나온 기분’이라고. 인생을 걸만큼 무겁고 비장한 이유가 없어도 시작과 끝이 시간이 흐르는 것과 같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그런 연애 말이다. 이 영화의 주제가인 ‘하이웨이(highway)’는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대체로 백가지 정도가 있어’라는 가사로 시작한다.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The art of travel)’ 중에는 윌리엄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1770-1850,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의 안내에 따라 ‘도시의 “떠들썩한 세상”의 차량들 한가운데에서 마음이 헛헛해지거나 수심에 잠기게 될 때, 자연을 여행할 때 만났던 이미지들에 의지하며 “노여움과 천박한 욕망”의 힘들을 약간은 무디게 할 수 있는’(여행의 기술 중 시골과 도시에 대하여 중) ‘시간의 점’을 찾는 이야기가 있다. 그가 시인이 될 것을 예견했는지 이름도 word’s worth 혹은 words’ worth라니, 우연치고는 신기하다. 워즈워스에게 도시는 영혼이 견디기 힘든 곳이었다. 워즈워스의 눈에 도시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삶을 파괴하는 모습과 그 이면의 생명을 파괴하는 감정들, ‘자기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에 저녁식탁에서 남의 이야기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귀를 곤두세우며 세상에서의 자기 지위에 불안해하며 살아가야 하는 영향력을 가진 곳이다. 평생의 대부분의 영국 북서부의 레이크디스트릭트라는 곳에서 살며 느치(곡식 가루 속에 사는 길이 6-10mm의 작은 갑충) 처럼 비스듬히 어그적어그적 흉물스럽게 걸어다녔던 이 시인은 일상과 주변의 자연에 무관심해진 눈을 새롭게 뜨고, 매력을 재발견하는 시들을 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의 여주인공 조제가 ‘구름을 집에 가지고 가고 싶어’라고 말은 한다든가, 바다를 처음 보았을 때 으헉 숨이 막히며 감동하던 그녀의 모습에 느치처럼 산책하며 참새 알을 보고 ‘봐라, 파란 알 다섯 개가 저기 반짝이고 있다!’라는 시를 써댄 워즈워스의 모습이 겹쳐진다. 18-9세기 산업기의 영국에서 어른이 이런 시선을 가지고 이런 시들을 써댔다는 것이 쉽게 인정을 받았을 리 없다. 그가 자연에서 받은 인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억지스럽고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뻣뻣한 시대를 살았던 천천히 흐느적 걷는 시인은 다행스럽게 10년, 20년? 아니 죽기 전에 그의 시에 감동을 받고 인정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그가 자신의 시의 운명은 ‘괴로운 사람들에게 위로를 줄 것이고, 날빛에 햇빛을 더하듯이 행복한 사람들을 더 행복하게 할 것이고, 젊은 사람들과 나이를 막론하고 품위있는 사람들이 제대로 보고 생각하고 느끼도록, 그리하여 좀 더 적극적으로 또 안정되게 덕을 드러내도록 가르칠 것’(여행의 기술 p.188)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시들은 꾸준히 오랫동안 임무를 충실하게 지켰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에서 두 주인공의 매일의 산책과 여행, 그리고 워즈워스의 느치처럼 흐느적 걷는 산책은 자기의 감성을 마음껏 두드리는 시간이다. 감성은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무엇보다도 자발적인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자발적인 작용(?)은 노여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시간의 점, 기억의 한조각을 발견하도록 몸을 움직이라고 명한다. 쿠루리(Qruri)는 ‘하이웨이(highway)’에서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대체로 백가지 정도가 있어’라고 하지만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아무래도 시간의 점, 기억의 한 조각을 발견하는 데 있는 것 같다. ‘비 개인 5월 아침/ 혼란스런 꾀꼬리 소리/ 찬엄(燦嚴)한 햇살 퍼져 오릅내다’(김영랑, 5월 아침 중)라고 적었던 시인처럼.

신정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