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근|유네스코문화원장
아르떼 주 : 지난 10월 26일, ‘문화로 세상을 여는 청소년들의 삶과 진로’에 대해서 고민하는 청소년 문화포럼 <가로>의 발족식이 있었습니다. <가로>의 발족식에는 강대근 유네스코 문화원장님의 애정어린 발족인사가 있었습니다.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라는 이 글은 아이들의 ‘봄’을 바라며 소원처럼 적어내려간 글입니다. 아이들이 다양한 문화를 누리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의 ‘가로’, 무한경쟁의 사회에서 주변을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의미하는 ‘가로’ 등, 강대근 원장님의 글은 문화예술교육이 청소년이 모두 ‘시가 되는 새벽’을 어떻게 만들까를 고민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청소년 문화포럼 <가로>의 발족인사를 강대근 원장님의 허락을 받아 아르떼 웹진 땡땡에 게재합니다. |
2004년 10월 26일, 예전처럼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살아 있어서 그 살아 있음을 서로 확인하고 아이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하여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기로 마음을 모으는 것은 가을 단풍만큼 찬란하고 가을 하늘만큼 높고 푸르른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산으로 가지 않고 여기에 모였습니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우리는 청소년 문화포럼 <가로>를 출범하려 합니다.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함께 모여서 서로 소통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하여 왔습니다. 그래서오늘은 참 기쁜 날입니다. 나아가 아이들의 삶을 이야기 하고 그들과 함께 사는 법을 논의하는 일은 우리가 살고 있는 오늘과 그들이 살아갈 미래를 아름답게 가꾸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며 실천을 위한 약속이 될 것입니다.
인사를 대신하여 저의 욕심을 말씀드려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첫째로 세로에 대한 가로입니다.가로는 세로에 대한 가로입니다. 세로가 수직이라면 가로는 수평입니다. 인류는 하늘높이 오르려는 수직 상승의 꿈을 발전시켜 왔습니다. 인류가 기록해 온 근대사는 ‘폭력의 세기’로 명명되고 신자유주의과 시장은 확장과 독점의 이데올로기를 감춘 채 무한경쟁의 일상 속에서 ‘줄서기’를 강요합니다. 어느덧 근대가 불러 낸 ‘타인’은 경쟁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우리는 자기방어와 변호를 위하여 자기의 성을 높이 쌓고 이웃은 단절의 늪에서 분열되고 허우적거립니다.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요?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은 수직구조의 붕괴를 예기하며 수평 구조의 가능성을 열고 있습니다. 소위 정보화에 의한 네트워크의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수직구조의 사회가 아니라 수평구조의 사회가 열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9. 11 사태를 통하여 수직으로 하늘을 찌르던 뉴욕의 고층건물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의 주위를 돌아보아야 할 시간입니다. 지금까지의 사회가 세로의 사회였다면 앞으로 우리는 가로의 사회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로가 역사적 시간의 궤적이라면 가로는 오히려 공간을 위한 조건입니다. 우리의 삶의 공간은 이 세로와 가로의 만남 없이는 확보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문화적 삶의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아야 합니다. 좌우를 가로지르기도 하고 벌판을 가로지르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도 필요할 것이고 참을성도 필요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다양성에 대한 포용력 있는 관용의 정신이 요구될 것입니다.
둘째로 가로(街路)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다.
길은 그리움입니다.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그 길을 따라서 우리가 함께 염원하는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길이 만들어진지 오래되어서 우리에게 익숙한 길보다는 새로운 길을 찾고 만들 것입니다. 누군가 길 때문에 숲은 그 신비를 간직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숲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미래의 숲을 가꾸고 길을 잃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벌판을 가로지르는 길도 가고자 합니다. 논을 지나 강을 건너서 결국 바다에 이를 때 까지 비 오는 날에도 바람 부는 날에도 함께 손잡고 갈 것입니다. 동서를 가로지르고 남북을 가로지르고 상하를 가로지르고 좌우를 가로지르며 아이들과 함께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 길이 모두가 함께 가는 길이기를 기대합니다. 가로수도 심고 꽃도 심어야 겠지요. 소낙비라도 내리면 바람 끝으로 흙먼지 냄새가 나고 햇빛 쏟아지는 날이면 프라다나스 그늘이 싱그러운 그런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욕심을 부리자면 질주하는 자동차들의 속도를 거뜬히 극복하는 느리면서도 빠른 그런 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세로가 앞을 본다면 가로는 옆을 봅니다. 세로 줄을 세우면 앞이 있고 뒤가 있습니다. 가로 줄을 세우면 오른 쪽과 왼쪽이 있습니다. 상하(上下) 없이 중(中)이 없듯이 좌우(左右) 없이 균형(均衡)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의 아이들이 이 변화는 세계 속에서 전후좌우를 잘 살펴서 씨줄과 날줄을 잘 꼬아서 아름다운 삶을 위한 날개옷을 만들게 할 수 있는지 우리 모두의 걱정입니다.
또 혹시나 옆만 보다가 앞을 보지 못할 가봐 걱정입니다. 혹시나 길 가로 밀려나 소외받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이렇게 길을 나섭니다. 오늘 함께 해주신 모든 분의 기대를 등에 업고 앞을 보지 못하여 넘어지거나 곁으로 밀려나 주저앉는 일이 없도록 인디언 소크족의 격언을 상기하며 배낭을 잘 챙겨서 길을 나섭니다. 여럿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내 앞에 걷지 말라, 내가 따르지 않을 수 있으니.
내 뒤를 걷지 말라, 내가 인도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나와 함께 걸으라. 우리는 하나니“.
아이들의 ‘봄’을 위하여
인사가 길어졌습니다. 인사를 끝내며 이 찬란한 가을에 봄타령을 하려 합니다. 철이 좀 덜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 위한 마음이 시인의 마음과 통한다면 이 가을에 시 한 편을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한 시인의 ‘봄’이라는 시입니다.
저기 저 담벽, 저기 저 라일락, 저기 저 별, 그리고 저기 저 우리 집 개의 똥 하나, 그래 모두 이리와 내 언어 속에 서라. 담벽은 내 언어의 담벽이 되고, 라일락은 내 언어의 꽃이 되고, 별은 반짝이고, 개똥은 내 언어의 뜰에서 굴러라. 내가 내 언어에게 자유를 주었으니 너희들도 자유롭게 서고, 반짝이고, 굴러라, 그래 봄이다.
봄은 자유다. 자 봐라, 꽃피고 싶은 놈 꽃피고, 잎 달고 싶은 놈 잎 달고, 반짝이고, 아지랑이이고 싶은 놈은, 아지랑이가 되었다. 봄이 자유가 아니라면 꽃피는 지옥이라고 하자. 그래 봄은 지옥이다. 이름이 지옥이라고 해서 필 꽃이 안 피고, 반짝일게 안 반짝이던가. 내 말이 옳으면 자,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
( 오규원,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문학과 지성사, 2003)
|
우리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모두 시로 쓸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보채는 아이, 우는 아이, 성내는 아이, 주먹 쥐는 아이, 지나가는 아이들……….
그들이 모두 시가 되는 새벽을 어찌 만들까요?
<가로>가 아이들에게 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로>가 아이들에게 여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로>가 아이들에게 가을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로>가 아이들에게 겨울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로>가 아이들에게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가로>가 아이들에게 언어였으면 좋겠습니다.
<가로>가 아이들의 자유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가로>가 아이들에게
“자유다 마음대로 뛰어라”하고 말했으면 좋겠습니다.
다시 한번 오늘 함께 해주신 모든 분들께
마음 깊은 감사를 드리고 끊임없는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