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가 아닌 시민을 위한 교육 – 청소년문화예술교육에 관한 몇 가지 생각

서동진|문화평론가

요 몇 년 청소년 영화제에서 심사를 볼 일이 자주 있었다. 어제 마침 또 하나의 청소년 영화제가 있어 심사를 보게 되었다. 출품된 작품을 보면서 또 한번 심란해졌다. 한두 해 전부터 청소년 영화제에서 작품을 고를 때 견지하는 원칙이란 게 생겼다. 수시로 바뀌기도 하지만 나름대로 고수하는 게 있다면 “입시 영화는 안된다”는 것이다. 수시나 특차 전형을 위한 발판으로 영화를 찍고 출품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진짜 자기 영화를 찍은 친구들을 가려내기 위해 나름대로 굳힌 원칙이다. 그런 영화들이 보여주는 공통점이 있다면 “심사위원 선생님 앞”으로 보내는 편지라는 점이다. 나는 학교나 청소년수련관에 더 많은 영상 동아리가 만들어지고 동네마다 청소년들의 시네클럽이 생겨나길 바란다. 그렇지만 그곳에서 만들어지는 영화가 미지의 심사위원 선생님의 맘에 들기 위한 메시지여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다. 그 영화는 언제나 보이고 입씨름할 친구들과 함께해야 한다. 자기의 관객이 보이지 않고 그래서 말을 건네려는 욕망이 없는 영화는 결국 시시하고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물론 감동도 안준다. 그리고 그런 영화들을 보아야하는 어른 심사위원들도 역시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나는 이런 영화를 만드는 청소년들은 “모범생 영화 키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대개 왕따 당한 친구, 학교 폭력, 장애우나 성정체성이 모호한 친구들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언제나 그들과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친구들이 으레 그런 취급을 받을 때 그를 무력하게 지켜보아야 하는 자신의 무력감, 타인을 괴롭히는 친구들을 볼 때 느껴지는 교묘한 쾌감 따위의 복잡한 이야기는 보이지 않는다. 어차피 자기 이야기를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청소년들이 만든 다큐멘터리는, 솔직히 말하자면 언제나 최악이다. 청소년들이 만든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느끼게 되는 곤혹스러움과 실망을 위안하려 핑계를 둘러대지 않는 건 아니다. “방송 다큐가 애들을 버렸어, 쯔즛!”. 그렇지만 범람하는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영향을 탓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청소년 다큐멘터리는 거의 한결같이 보이스오버로 메워져 있다. 삶이 말하기도 전에 찍는 이가 말을 다 해버린다.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논술시험 정답 같은 이야기를 참고화면을 통해 보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삶보다 정답을 보고 만드는 다큐멘터리는 착한 청소년들이 꾸미는 연극에 불과하다.

청소년 영화제에 참견하면서 드는 생각은 또한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생각으로 번지지 않을 수 없다. 알다시피 청소년을 길러내고 교육하는 방식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지난 십 년 간 한국 사회를 졸졸 따라다녔다. 그런 관심과 더불어 “공부해!”라는 슬로건을 내던지고 “잘 놀아!”라는 슬로건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변화가 있었다. 그런데 획일적이고 표준화된 지식을 머리 속에 주입하는 학교 사회가 규탄을 받게 된 것이 꼭 자유를 꿈꾸고 개성을 실현하며 자기를 되찾으려는 욕망 때문만은 아니다. “매일 아침 일곱시 삼십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전국 구백만의 아이들의 머리 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고 덥석 모두를 먹어 삼킨/이 시꺼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십 년도 더 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은 <교실 이데아>란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학교 사회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고 우리는 학교라는 끔찍한 감옥과 공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상식처럼 받아들였다. 명령과 통제, 훈육과 규율의 대명사였던 학교 사회가 맥을 못추게 되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생각을 조금 달리한다. 그렇다고 청소년들을 억누르던 명령과 압력이 사라진 것은 절대 아니란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잘 놀아!”라는 슬로건은 부드럽고 달콤하다. 그렇지만 동기를 부여하고 스스로 주도하며 자기가 책임을 져야한다는 것은 자유이지만 사실 한꺼풀 벗겨놓고 보자면 그것은 전보다 더 스트레스를 주는 명령일 수 있다. 따라서 자유가 주어질 때 그것이 자유를 길들이는 명령과 어떻게 만나고 결합하는지 눈여겨보아야 한다. “잘 노는 청소년”이 칭찬 받고 추켜올려지게 된 데에는 그만한 사회적 변화가 배경에 깔려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지식정보사회에서 국가경쟁력은 지식강국, 두뇌강국이 되는 것에서 나온다는 말이 부상하고, 이는 다시 평생학습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교육정책과 청소년정책의 변화로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정부는 교육과정을 바꾸기 시작했고 서구 사회에서 이미 시작했듯이 역동적인 한국, 창조적인 한국을 만들기 위해 문화예술이 중요하다는 믿음이 퍼져나갔다. 이제 세상에서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지식과 정보, 감성과 라이프스타일이라는 말을 몇 년 사이 지긋지긋하도록 들어왔다. 웰빙신드롬을 통해 여실히 체험했듯, 이제 물건을 팔아도 우리는 감성을 팔아야 하는 사회에 접어들었다. 그래서 우리는 감성적인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감성 경영, 감성 조직, 감성 교육, 감성 개인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요란한 충고에 주눅들지 않을 수 없다.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이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갈래이다.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은 이성과 지식이 전부인 줄 알던 시대의 편협한 교육에서 벗어나려는 괜찮고 멋있는 기획이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자율성과 가치를 실현하고 다양하고 자유로운 삶의 기회를 북돋울 수 있는 교육이 되지 못한 채 더 많은 청소년들을 우울증에 빠뜨릴 수도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잘 노는 것, 감성이 풍부해지는 것, 문화에 대한 안목이 느는 것은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또한 몇 명만 스타가 되고 나머지는 모두 패배자가 되는 대중문화의 시스템에서 벗어나 문화예술교육이 어떻게 잘 버티고 싸울 것인지 궁리하지 못한다면 기죽고 절망한 아이들만 만들어낼지 모른다. 주눅 든 아이들에게 자기주도적이고 자율적인 아이가 되라고 윽박지르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힘들면 우거지상이라도 지을 수 있었던 옛날보다 거짓으로라도 씩씩한 척 신난 척 해야하는 지금이 더 힘들 수 있다. 자기가 찾는 삶의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폭넓은 문화적 경험과 교육을 쌓도록 지원해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매일 시험대에 올라 자신의 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지치고 말 것이다.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이 새로운 사회의 능력있는 시민을 길러내는 교육이 되고자 한다면 챙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런 조심과 지혜를 피해서는 안된다.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을 때에만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은 말그대로 삶의 질이 높아진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