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희|품 청소년문화공동체
2004년 11월 21일 대학로.
한국노총의 집회로 2만 명 이상의 노동자들이 6차선 도로를 가득 메웠던 날
대학로 한 귀퉁이,
펄럭이는 대형 깃발과 엄청난 함성에도 아랑곳 없이
비장한 얼굴로 거사를 준비하는 아이들이 있었으니…
2004년 새로운 고민의 시작
올해로 9회 맞이하는 품의 청소년연극축제는 96년 1회 서울시청소년연극제를 시작으로 올해에 이르기까지 8년 간 많은 사업적 성과들을 남겼다. 경연대회 방식의 연극제에서 교류와 소통이 있는 ‘축제’로 성장했고, 과정이 있는 비경쟁 연극축제의 모델로 2002년도에는 메뉴얼집을 발간했으며, 2003년부터 시작된 청소년기획단의 활동으로 청소년의 주체적인 역할과 참여도 확대되어가고 있다. 지원 프로그램으로는 드물게 9년째 관의 지원을 받고 있는 걸 보면, 사업의 필요성과 성과에 대해서도 인정받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2004년 품은 새로운 고민을 시작하였다.
축제는 단지 아이들이 ‘연극을 잘 하게 하는 것’, 이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아이들의 연극이, 우리들의 축제가 문화예술적 가치를 넘어 어떤 운동적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연극축제가 9년이 되도록 연극하는 아이들은 여전히 관심 받지 못하고, 배고프다. ‘일상으로의 축제’라는 말이 무색하게, 축제가 끝나면 아이들은 각자의 일상으로 돌아가 여전히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였다.
2004년 품은, 축제의 감동이 아이들의 일상으로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근본적인 환경을 바꾸는 일을 하지 못했다는 반성과 함께, 문화예술을 통한 세상으로의 외침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였다. 아이들과 함께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실험해 보기로 한다.
목소리를 높여라!
올해 축제는 여느 해와는 조금 다르게 시작되었다. 참가동아리 모집 단계부터 ‘목소리를 높여라!’라는 타이틀을 내걸었다. 축제에 무언가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아보자는 의도에서였다. 참가 동아리들의 첫 모임이 있었던 6월, 올해의 무대였던 대학로의 한 극장에서 ‘대학로를 뒤집자!’를 외쳤던 우리들은, 어떤 목소리를 높이게 될지는 알지 못했으나 그렇게 세상으로의 외침을 위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세상으로의 외침을 위한 준비 – 아아, 지금은 목소리 테스트 중!
아이들에게 묻는다
‘우리 언제 우리가 하고 싶은 것들 맘껏 해본 적이 있었나?’ (당연히) ‘아니요!!’
‘우리 언제 우리가 하고 싶은 말들 온전히 소리내 본 적 있었나?’ (이것도 당연히) ‘아니요!!’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었나?’
(…) ‘네..?’
연극이 연극을 넘어 하나의 외침이 될 수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아이들 역시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좋은 연극을 만들기 위해서 연기와 발성 노하우에 대해서는 많은 지도편달을 받았는지 몰라도 ‘연극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본 경험은 많지 않다. 실제로 축제에 참가하는 동아리 중 창작을 하는 동아리는 해마다 두세 팀을 넘지 않는다. 창작 과정이 어렵기도 하지만, 경험해보지 못한 창작에 대한 막연한 부담과 ‘어떤 훌륭한 연기보다도 아이들의 솔직한 이야기가 주는 그 진솔한 감동’을 아직은 실감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품 연극축제의 주요 과정 중 하나인 워크샵. 올해의 워크샵은 아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내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진행되었다. 나의 이야기, 일상의 경험들을 소재로 한 창작연극 만들기와 창작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표현을 소리와 움직임이라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 경험해 볼 수 있도록 구성하였다.
처음엔 주춤했던 아이들이 조금씩 몸을 열기 시작한다. 재치 있는 말과 몸짓들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표현 활동 ‘소리와 움직임’을 통해 아이들은 자신의 신체, 주변의 다양한 사물과 소리들이 어떻게 연극에 활용될 수 있는가를 체험하였다. 나의 상상과 생각들을 연극으로 표현해 낼 수 있다는 것! 그 얼마나 즐거운 특권인가.
아이들이 만든 장면 속에는 학교 급식 이야기와 교복 이야기, 두발규정에 관한 이야기들이 등장했다. 엊그제 있었던 반친구와의 장난이 극중 에피소드가 되기도 하고, 배우가 되고 싶어했던 극중 인물의 죽음을 통해서 연극하는 아이들의 꿈과 현실을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결국 아이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그들의 일상의 이야기들이었다. 그것은 개인의 이야기이지만 많은 사람이 공감하는 하나의 감동이 되기도 하였다. 아이들의 작은 목소리와 몸짓들을 통해서 우리는 ‘연극을 통한 세상으로의 외침’의 가능성을 점점 확인해나갔다.
대학로 상륙작전의 탄생
동아리들의 연습이 한창이던 9월, 2004 축제의 컨셉 회의를 위해 기획단과 동아리 대표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 회의에 앞서 각 동아리들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중에 축제의 주제는 결정이 나고 있었다.
늘 배고프죠. 연습할 공간이 없어요. 야자 때문에 큰 소리로 연습을 할 수가 없어요. 저희는 이번에 학교 식당에서 공연해요. 후배들 부모님이 찾아와 탈퇴를 시키겠다고…
2004년 대학로 상륙작전은 축제에 참가하는 연극반 아이들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연극을 향한 열정, 연극반의 현실, 우리들의 꿈… 우리 모두는 연극하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보자고 뜻을 모았다.
아이들은 ‘청소년 연극 만세’를 외치며 거리로 나갔다. 연극만 하던 아이들이 머리엔 띠를 두르고, 양손에는 붉은 깃발을 들었다. 그 또한 즐거운 축제의 과정으로 세상을 향한 아이들의 외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청소년 연극의 열악한 현실과 핍박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청소년 연극에 대한 편견과 무관심으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경쟁적이고 획일적인 연극 경연대회로부터의 독립을 위하여!
명동과 대학로에서 네 차례의 거리홍보가 진행되었고, 온라인 상에서 상륙작전에 동참할 개인과 단체들의 뜻을 모았다. 그리고 11월 21일, 대학로에서 연극축제 역사상 최초의 거리개막축제가 열렸다. 참가동아리 200여명의 거리행진으로 시작된 개막축제는 청소년 연극현실에 대한 퍼포먼스 공연, 청소년 동아리들의 축하공연, 참가 동아리 대표자들의 성명 발표와 관련 교사 및 예술인들의 지지발언으로 채워졌다. 일반 청소년과 시민 600여명이 청소년 연극 지지를 위한 서명에 동참, 연극하는 아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대학로 상륙작전의 의미 – 작전은 성공했을까 .. ?
개막 축제 이후, 대학로 극장에서 13일 동안 참가동아리들의 공연이 펼쳐졌다. 아이들의 땀과 눈물로 만들어진 13편의 공연은 연일 객석을 꽉 메우며 성공리에 막을 내렸고, 폐막 축제를 마지막으로 축제는 끝이 났다.
상륙작전을 통해 아이들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아이들의 외침에 대한 세상의 대답이 몇몇 일간지 기사와 방송을 통해 돌아왔으나, ‘행복하게 연극하고 싶다’는 아이들의 소망이 이루어지진 못했다. 연습실도 안 생겼고, 반대하던 부모님이 하루 아침 돌변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작전은 성공했다. 상륙작전에 참가한 아이들은 연극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일상을 만들어 갈 수 있다는 희망을 얻었다. 당장은 아니지만, 그 작은 목소리들이 모여 세상을 흔들만한 커다란 외침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2004 대학로 상륙작전을 통해 품은 아이들의 문화예술활동이 무대 위의 감동을 넘어, 행복한 일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환경을 만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또한 세상 곳곳에서 또 다른 작전들이 계속해서 일어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축제는 끝났지만, 작전은 끝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외침이 현실이 될 때까지 연극을 통한 우리들의 작전은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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