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이선옥(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사회교육지원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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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 루아(Gabrielle Roy)
<내 생애의 아이들>(현대문학,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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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교롭게도 스승의 날이 막 저무는 새벽,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을 옆에 두고 기억을 더듬으며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 약 20년 전에 멋진 역사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대담한 희망을 품었던 듯하고, 그로부터 10년 후 좌절로 점철된 교생실습을 경험한 후 대략 교사의 길을 포기하였다. 먼 길을 돌고 돌아 다시 10년 후, “문화예술교육”이라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면서 그토록 피하고자 했던 “교육”을 다시 만나고 있어 이 정도쯤 되면 필시 업보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던 차에, 아주 우연히 이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캐나다의 광대한 미개척지를 배경으로 하는 <내 생애의 아이들>은 사범대를 갓 졸업한 18세 풋내기 여교사가 다양한 이주민들의 자녀로 구성된 초등학교 아이들과 만나며 자연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감동적인 성장 이야기이다. 성장소설의 대부분이 그렇듯, 이 소설에서 주인공들은 만남과 헤어짐, 자유와 규범, 자연과 사회화 등을 넘나들며 잔잔한 일상의 감동과 더불어 때로는 심장이 저릴 정도의 상처도 입는다. 그 모든 과정은 결국 학생과 교사 모두에게 단단하게 자란 성장의 열매를 선사해 주는 비옥한 거름이 된다.
미지와의 조우
낯선 세상에 첫발을 내딛을 때, 그리고 나와는 다른 타인과 소통할 때 느끼는 떨림과 두려움은 막 부모 품을 떠나 낯선 훈육의 공간으로 떠밀려 들어가는 초등학교 아이들이나 그들을 처음 만나는 교사에게나 크게 다르진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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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층 모범생의 평균적 삶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사범대생인 나에게, 어느 날 서울 변두리에 위치한 한 남자상고에 교생 실습을 나가라는 통보가 떨어졌다! 수업진행이 거의 불가능한 난리법석 교실 분위기, 가정불화와 약물, 폭력 등의 문제를 안고 있던 많은 아이들, 학생-교사 사이에 일상화된 폭력, 이미 사회 낙오자로서의 자조감, 패배감, 무기력함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아이들의 심각한 심리적 상태… 예비교사를 자임하며 터무니없는 자신감만 키워갔던 그 당시 나에게 상상 초월의 이런 현실 상황들에 대처할 문제해결능력은 물론 거의 없었다. 좀더 솔직히 얘기하자면, 내가 놀아 왔고 귀동냥 해왔던 ‘물’과는 다른 환경에서 성장해온 타인의 감수성과 환경을 애정에 기반해서 세심하게 읽을, 머리가 아닌 마음의 준비가 아주 서툴렀다는 의미이다.
“이른 아침 교실에 서서 내 어린 학생들이 세상의 새벽인 양 신선한 들판 위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바라볼 때면, 학교라는 함정 속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로 달려가서 영원히 그들의 편이 되어야 옳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었다.”
신뢰, 교감으로 전하기
한편으로는 따뜻한 사랑과 보호의 울타리, 다른 한편으로는 규율과 규범, 강제의 공간인 학교의 이중적 교육 안에서, 갈등을 간직한 채 아이들을 바라보는 교사의 따뜻한 시선이 가슴을 친다. 거부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사춘기의 성장 과정을 온몸 떨리는 사랑의 기쁨과 고통 속에서 경험한 메데릭은 어느 날 그의 마음을 열어 준 교사와 함께, 상처받는 마음 한켠 편하게 뉘일 수 있는 대자연으로 가서 찬물 속의 송어를 온 감각으로 느낀다. 찬물 속에서 힘차게 역류하며 움직이는 송어. 이 세상에서 가장 경계심 많은 물고기가 기꺼이 손 안으로 들어와 쓰다듬어도 가만히 있는 것을 느끼며 맛보는 기쁨의 전율은, 자신을 믿어주는 존재에 대한 황홀한 고마움이기도 하다.
예술의 진정성
모든 것이 어색한 첫 만남처럼, 서투르기만 한 주인공 여교사가 항상 한결같은 애정으로 아이들에게서 최선의 가능성만을 탐색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 되기를 두려워하는 고독한 성장기 아이들처럼, 풋내기 교사 역시 이십년 삼십년 뒤 일에 찌들어 닳아진 모습으로 늘 똑같은 자리에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곤 낙담하기도 한다. 그런 그를 다시 가볍게 일으켜주는 키워드로 ‘예술’, ‘공감’ 이라는 단어를 이 책에서 길어 올리고 싶다.
여섯 개의 단편으로 구성된 <내 생애의 아이들>에서 ‘종달새’ 편에 등장하는 닐은 우크라이나 이민자 출신 어머니로부터 고향에서 꽃을 가득 피운 벚나무, 연인을 기다리며 춤을 추는 처녀들, 젊은 가슴들의 기다림, 두근거리는 장대한 모험담 등을 담은 노래를 배워 천부적인 소질과 재능으로 그것을 소화한다. 닐은 일상 속에서 낙담하는 선생님에게 다시 용기를 주고, 선생의 병든 노모에게 재활의 의지를, 나아가 양로원 노인들과 정신병원 환자들의 어두운 삶에 종달새처럼 아침빛을 비춘다. 많은 사람들의 삶의 고단함을 어루만지고 기쁨을 전하는 닐… 그를 있게 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여교사는 냄새나고 역겨운 도축장과 진흙늪을 건너간다. 우크라이나어만 가능한 닐의 어머니에게 감사의 마음을 언어로 전할 길이 없다. 낙담도 잠시, 닐과 그의 어머니는 밤공기를 가르며 실제로 겪는 삶과 꿈속의 삶의 노래를 함께 부르며 언어가 아닌 마음으로 화답한다. 삶 속의 예술은 가뿐하게 언어, 계층, 민족적 장벽을 넘어서 마음과 마음을 서로 만나게 하여 공명케 한다.
어려운 집안 살림살이 때문에 아버지 일을 돕고, 병든 임산부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을 보살펴야 하는 ‘집보는 아이’ 앙드레는 너무 일찍부터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짊어진 애어른이다. 집안 일로 학교마저 그만둔 앙드레를 만나기 위해 여교사는 스키를 타고 홀홀 단신 그의 쓸쓸하고 누추한 집을 찾아간다. 세찬 눈보라 탓에 돌아가지 못하고 그 밤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며 오래된 축음기에서 삐걱거리며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옛 노래를 듣기도 하고, 아이들 성화에 못 이겨 모든 것이 마법처럼 바뀌는 옛 이야기들을 풀어가는 밤의 정경 역시 예술의 아름다움과 울림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하다.
“가장 높은 예술의 단계가 교육이다”라는 슈타이너의 얘기를 굳이 빌리지 않더라도, 일상에서 만나는 예술에서의 교육적 가치, 교육에서의 예술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삶 속에서 무뎌지기 쉬운 감성을 일깨워 타인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무언가를 공감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다.
시공간을 넘어 전해오는 울림
생각해 보면 꽤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교생 실습을 나갔을 때 아이들과 교사들로부터 마치 전염병처럼 옮아버린 개인의 무기력함과 자괴감을 아직도 온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책상 옆에 걸어두어야 하는 쓰레기용 비닐봉지가 없다고 담임에게 이단 옆차기를 속수무책으로 당하던 아이들, 3월 한 달이 지나면 학급의 10%가 퇴학하고 1년이 지나면 25%가 또 교실을 떠나버리는 학교, 폭력과 폭주생활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 아이들, 아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조금의 애정도 찾을 수 없었던 교사들… 그 당시 선배나 동기들은 여학생이었던 나에게 어쩌면 그리 지독히도 운이 따르지 않았냐며 혀를 찼지만, 신체적?정신적 폭력이 담담한 풍경이 되었던 그 학교가 아주 재수없는(?) 특수 상황이었다고 넘겨버릴 수 있을까.
“나는 광대하고 텅 빈 들판에 그 조그만 실루엣들이 점처럼 찍혀지는 것을 볼 때면 이 세상에서 어린 시절이 얼마나 상처받기 쉽고 약한 것인가를,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우리의 어긋나버린 희망과 영원한 새 시작의 짐을 지워놓는 곳은 바로 저 연약한 어깨 위라는 것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 절감하는 것이었다.”
자전적 성격이 강한 <내 생애의 아이들>은 가브리엘 루아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교육-삶- 예술을 감각적 서정시처럼 그려낸 작품이다. 이 책에서 풋내기 여교사의 입을 빌려 읊조리는 고백처럼, 인간은 시스템과 사회 구조 앞에 한없이 나약한 존재이다. 그러나 그 연약한 존재들이 상처받기 쉬운 마음에 진심을 담아 세상을 향해 노래를 부르고, 그 공명의 힘으로 다시 쉽지 않은 삶에 생생한 호흡을 불어넣을 수 있다는 것 역시 어긋날 수 있는 가능성이라 하더라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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