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

글_이경진(서천문화원 사무국장)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월든(Walden)> (이레, 2004)>
이상한 사람이 쓴 이상한 책
‘이 글을 쓸 무렵 나는 매사추세츠 주의 콩코드 마을 근처에 있는 월든 호숫가의 숲 속에 집 한 채를 손수 지어 홀로 살고 있었다.’

19세기에 써진 생태주의의 경전이라 불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의 <월든(Walden)>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로우가 1845년 7월부터 1847년 9월까지 월든 호숫가 근처에서 홀로 지냈던 삶을 기록한 이 책은 당대보다도 20세기 후반에 더욱 주목을 받았다. 20세기 자본주의적 인간의 한없는 욕망이 빚어낸 생태계 파괴와 인간성 상실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과 성찰이 이미 19세기 중반 미국의 한 인간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놀라운 이유 때문이다. 19세기 중반 미국이 어떤 시대인가. 프랑스, 에스파냐, 멕시코 등에서 헐값으로 땅을 사거나 무력으로 강탈하여 영토를 넓혀가던 시대, 산업혁명으로 상공업이 발달한 북부지역의 자본가세력과 광범위한 목화재배를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고 있던 남부지역의 지주세력이 흑인노예의 노동력 확보를 위해 첨예하게 대립하며 남북전쟁의 싹을 틔우던 시대, 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일확천금의 꿈을 안고 인디언을 학살하며 서쪽으로 돌진하던 개척의 시대였다. 그런 시대에 800여 달러에 달하는 일반주택을 소유하기 위해 10~15년 동안 꼬박 노동의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세태를 비판하며 28달러를 들여 오두막집을 짓고 순수한 자기 노동력으로 생산한 작물과 원시적인 물물교환에만 의지하여 살았으니 당시의 사람들에게 소로우의 월든 호숫가 생활이 어떻게 비췄을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참 이상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얼마나 독특한 사람인지는 살아온 이력만 봐도 금세 알 수 있다. 소로우는 콩코드에서 출생하여 하버드대학을 졸업하고 잠시 교사생활을 했지만 곧 때려치우고 친형 존과 함께 진보적인 학교, 이른바 대안학교를 세워 운영했다(그는 사실 교육운동가였던 셈이다). 이 학교가 지역사회에서 나름대로 성공하여 큰 반향도 일으켰지만 형의 건강악화로 문을 닫게 된다. 28세 되던 1845년에 월든 호숫가에 통나무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1846년에는 노예제도와 멕시코전쟁에 반대하여 인두세(人頭稅, 지금으로 따지면 주민세 정도일 게다) 납부를 거부하여 수감되기도 한다. 아마 최초의 납세거부 투쟁으로 기록될 이 경험은 후에 <시민의 불복종>이라는 책으로 완성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비폭력 저항운동을 했던 인도의 간디도 이 책에서 한수 배웠다고 한다. 이후 이곳저곳 강연과 기고를 하면서 생활하던 소로우는 혹한의 겨울 숲에 들어가 나무 그루터기들의 나이테를 세다가 독감에 걸린다. 이 독감은 기관지염으로 악화되고 결국 폐결핵으로 번져 고향인 콩코드에서 사망하게 된다. 임종을 지켜본 사람에 의하면 “그처럼 행복한 죽음을 본 적이 없다”라고 한다. 그의 나이 향년 45세였다. 참으로 괴짜다운 삶에 괴짜다운 죽음이었다.

소로우의 경제학과 생활철학

그런데 이 괴짜 아저씨는 자기를 괴짜라고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메인 주와 텍사스 주를 잇는 전신주가 가설된다고 하니까 이 두 곳은 서로 통신할 만큼 중요한 일이 없을지도 모른다고 하질 않나, 대서양에 해저전신을 깔아서 유럽과 미국이 연결된다고 하니까 해저전신을 통해 들어오는 첫 소식은 영국 공주가 백일해를 앓고 있다는 소식 정도일 거라고 비웃어버린다. 그러면서 전신주를 까는 중요한 목적이 “빠른 속도로 이야기하자는 것”이지 “조리 있게 이야기하자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자본에 의한 속도의 정치경제학이 사실은 올바른 소통과 진보적인 삶을 위한 것이 아님을 간파하고 일침을 가한 것이다. 월든 호숫가에서의 일상생활을 시시콜콜하게 적은 이 책이 고전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렇듯 일상을 통한 삶과 사회에 대한 통찰이 곳곳에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유행하는 문화적 추세인 웰빙주의도 사실 이 아저씨에게서 빚진 바가 많다. 웰빙, 잘 산다는 게 친환경적인 주거환경에서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식품을 적당히 섭취하고 정신적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며 사는 것 아닌가. 소로우가 월든 호숫가에서 보여줬던 생활은 소식(小食)주의, 생태주의, 자족주의, 느림의 정치경제학에 근거한 웰빙이었다. 물론 이 추세도 교묘하게 자본이 선점하여 좀 더 비싼 제품을 팔아먹기 위한 상업전략으로 변질되었지만 그 기본 정신이 자연과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에 대한 성찰임은 틀림없다. 그런 의미에서 18장에 이르는 본문 중 첫 장이 ‘숲 생활의 경제학’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그의 생활이 ‘비경제적’이라고 느낄지 모르나 사실 그는 철저하게 ‘경제적’으로 살았다. 집을 짓는 경비에서부터 텃밭을 가꾸는 경비까지 소소한 수입과 지출을 명시하며 분석하고 있다. 단지 그는 ‘비자본주의적’으로 살았을 뿐이다.
인간관계를 포함한 전체적 사회관계는 기본적으로 경제관계의 자장 안에서 존재한다. 자유로운 소통을 전제로 한 바람직한 인간관계도 적절한 경제관계의 틀 속에서 맺어지지 않으면 관념으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소로우는 자본주의 경제방식을 통한 인간관계는 자본주의적 인간관계의 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소로우는 먼저 경제방식부터 탈자본화함으로써 삶의 방식을 바꿨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둘러싼 모든 것들, 예컨대 책, 숲, 소리, 호수, 마을, 농장, 동물들, 사람들을 관찰하고 성찰함으로써 자신의 사상을 완성했다. 나는 이러한 작업에 대한 보고서이자 콩코드 지역에 대해 글로 풀어놓은 ‘문화지도’가 <월든>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예술교육의 생생한 지침서

이제 교육 얘기를 해야겠다. 난 글 쓰는 사람으로서 항상 ‘문학예술’과 ‘문화’를 생각하긴 했으나 ‘문화교육’과 ‘예술교육’을 깊이 고민해본 적은 거의 없었다. 그러다가 김인규 선생님의 ‘안면도 프로젝트’를 접하고 우리 교육이 나아갈 어느 한 방향이 이 프로젝트 속에 녹아있음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때마침 문화관광부에서 공모한 ‘학교 문화예술교육 시범사업’에 이 프로젝트로 도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업을 준비하는 과정은 내 머리 속에서 ‘문화’와 ‘예술’과 ‘교육’이란 개념이 복잡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결합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문화예술교육이란 개념을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긴 힘들지만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예술교육에서 강조되는 심미적 교육과 문화교육에서 강조되는 의사소통, 사회적 정체성과 가치, 이에 동반된 성찰 등 여러 주제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교육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궁극적으로 문화적 해득력(cultural literacy)과 연관되어 있다. 문화적 해득력이라는 게 결국 다양한 사회관계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인 셈이므로 학교 교과과정으로 보면 사회, 국어, 역사, 미술, 음악 등 교과 통합적 교육을 통해야만 큰 효과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안면도 프로젝트는 그래서 통합교과교육에 대한 실험의 의미가 많았다. 아이들이 프로젝트를 통해 자기 자신과 가족과 이웃, 지역사회를 이해하고 의미화하는 작업인데, 묘하게도 많은 내용이 소로우가 한 생활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의 자연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탐사하였다. 도요새, 산비둘기, 되강오리, 개미, 들꿩, 개똥지바귀, 수달 등 월든 호숫가에 있는 생물은 모두 그의 시선에 들어왔다. 그는 자연에 대해서 많이 알고자 하기보다는 깊이 느끼고자 했다. 단순히 지식을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경험을 통해서 체득케 하는 것이 문화예술교육이라고 한다면 <월든>의 모든 장(章)은 문화예술교육 주제와 프로그램으로 환치시킬 수 있다. 물론 소로우는 다양한 인문사회과학적 지식을 가미하여 자연과 사회를 재해석하였고 아이들은 단순히 보고 느낀 것을 적어놓은 수준이지만, 자연의 관찰자라는 점에서는 동일할 뿐 아니라 아이들의 경우 순수한 감정이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맛이 있다. ‘숲의 소리들’이란 장에서 보여준 들꿩의 날개짓 소리, 기차의 바퀴소리, 마을의 종소리 등이 주는 환기력은 음악교과와 결합하여 지역의 소리를 경험하는 프로그램으로 담을 수 있고, ‘이웃의 동물들’이나 ‘겨울의 동물들’과 같은 장은 생물교과와 결합하여 지역의 동물과 식물을 관찰하는 프로그램으로 변형할 수 있다.

소통하고 경험하며 세상을 바라본다면

‘또 산비둘기들이 이쪽 숲에서 저쪽 숲으로 약간 떨리는 듯한 날갯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긴급히 전해야 할 통신문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그런가 하면 썩은 나무 그루터기 밑을 괭이로 파헤치던 중에 둔중한 몸집을 한 이국적인 점들이 박힌 도롱뇽이 나오기도 했다. 이집트와 나일 강 냄새가 물씬 나는 이놈은 실은 우리와 같은 시대의 생물이다.’ (소로우의 ‘월든’ 중에서)
‘길을 가다가 닭의장풀을 보았는데 이름과 다르게 얌전하게 생기고 어린 들꽃 같았다. 섬족도리풀도 있었는데 잎이 두껍고 유독성 식물이여서 약간 겁나기도 하였다. 눈개승마라고 하는 톱니처럼 생긴 들꽃이 있었다. 만져봤더니 그리 좋지는 않고 거칠었다. 이런 것과 여러 가지 꽃을 보고 찍고 채집을 하며 올라가니 계곡이 보였다.’ (서천청소년문화도시프로젝트 ‘들꽃탐사대’ 아이의 보고서 중)

<월든>을 문화예술교육의 주제와 프로그램으로 환치할 수 있는 것은 소로우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세계를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순수함이 세계를 변화시키진 않는다. 그것을 소로우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흑인노예를 탈출시키는 등의 사회적 행동과 정치적 사안에 대한 강연 및 집필활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것은, 자연과 소통함으로써 사회를 성찰했을 뿐이지 자연에 은거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문화예술교육을 하고자 하는 목적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아이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환경과 역사문화를 관찰하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자신과 자연 간에, 또는 자신과 이웃 간에 소통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아이들 나름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생길 것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사물과 사람의 이면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는 시인이다. 소로우는 시인이었고 내가 아는 한 아이들도 시인이다. ‘시인의 눈’을 가진 수많은 아이들은 수많은 소로우로 성장할 것이고 또한 수많은 것들을 변화시키리라 나는 믿는다.

시 한 줄을 장식하기 위하여
꿈을 꾼 게 아니다.
내가 월든 호수에 사는 것보다
신과 천국에 더 가까이 갈 수는 없다.
나는 나의 호수의 돌 깔린 기슭이며
그 위를 스쳐가는 산들바람이다.
내 손바닥에는
호수의 물과 모래가 담겨 있으며,
호수의 가장 깊은 곳은
내 생각 드높은 곳에 떠 있다.

이경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