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풍요로 가는 길 – 홍세화가 말하는 문화예술교육


 

벌써 십일 년 전이다. 프랑스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쓴 책 한권이 한국에서 출간되었다. 그리고 곧 그 망명객의 삶이 한국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빠리에서의 망명생활은 미디어가 환호할 법한 소재였지만, 다른 누구보다 그 주인공 자신이 바로 그 경박한 환호에 대한 경계를 표했다. 최후의 망명객이라는 수식어에 대해 정색을 하며 정정했던 것도 그였다. 다른 도시도 아니고 하필 빠리에서 망명생활을 한 그에게 얼마나 많은 상징자본이 주어졌는지를 적확하게 지적했던 것도 그 자신이었다. 망명이 될 줄 모르고 떠났던 이 땅을 이십 년 만에야 밟을 수 있었던 그는, 2002년 영구 귀국했다. 지금 한겨레신문 시민편집인으로 있는 홍세화 선생님을 한겨레신문사 시민편집인실에서 만났다.

문화예술교육과 그는 무슨 관계인가. 인터뷰를 섭외하기 위해 전화로 통화했을 때 그 자신도 마찬가지의 반응이었지만, 처음 이 인터뷰를 요청받았을 때 나 역시 문화예술교육과 그의 관련성이 조금은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 의문은 이내 쉽게 답을 찾았다.

이를테면 그는, 빠리에서 썼던 첫 책을 통해 똘레랑스라는 화두를 한국사회에 던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생소하게 여겨졌던 그 단어가 이제 사람들에게는 아주 익숙한 것이 되었다. 그가 이야기한 똘레랑스는 사회가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를 넘어서는 그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변화는 제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사람들의 심성, 혹은 공감각적인 ‘감수성’ 같은 것들이 변화하는 것이야말로 더욱 중요하고 근원적이며 가장 어렵고 느린 과제가 될 것이다. 그는 오래도록 바로 그 문제에 대해 말해왔다. 그리고 여기서 그의 일관된 작업은 문화예술교육의 방향이나 철학과 근원적으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사회 구성원들이 존재의 풍요로움을 스스로 느끼는 것, 문화예술적 감수성과 사회문화적 소양을 통해서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느끼고, 그것에 바탕해서 자기 삶에 대한 ‘긍지’를 느끼게 하는 것, 제가 생각하는 문화예술교육의 중요성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달리 말하자면, 존재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것이죠.
요즘 한국사회를 바라보면 당혹스러움을 느끼곤 합니다. 비유적으로 얘기를 해보죠.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얘기를 하잖아요. 사회적 동물이라고 할 때의 그 ‘사회’는, 포괄적인 의미죠. 사람은 정치적 동물이기도 하고 문화적 인간이기도 하고, 결국 공민으로서의, 자아실현의 본원적 욕구를 가지고 있는, 사회 안에서 자기를 실현하고자 하는, 그런 의미로서의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주 당연한 얘기죠.
그런데 지금 현재,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 명제가 적절하지 않다고 느껴질 만큼, 사람들이 경제동물화 되고 있다는 겁니다. 사회적 동물이 아니라 경제적 동물이 되었다고 할까요. 이런 면에서 과연, 문화예술적 감수성 같은 것들이 얼마나 중요성을 획득하고 있는지, 얼마나 중요하게 인식되고 있는지, 그런 의문이 들곤 합니다. 그런 면에서 거꾸로, 역설적으로 그 중요성을 얘기해볼 수 있겠죠. 지금 현재의 이런 사회적 가치관에서 봤을 때, 존재의 풍요로움이랄까, 이런 것들을 새롭게 확인하고 재확인하고, 그런 것들이 요구되지 않나 하는 생각입니다.”

존재의 풍요로움과 자기 삶에 대한 긍지

존재의 풍요로움. 그는 문화예술교육이 가지는 의미를 망설임 없이 한 마디로 압축했다. 사회의 구성원들이 존재의 풍요로움을 스스로 느끼게 하는 것, 그리하여 자기 삶에 대한 긍지를 가지게 하는 것,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역할을 문화예술교육이 짊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문화예술교육이 교육의 가장 근원적인 역할을 자신의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으로 들린다. 그렇다면 그가 바라보는 한국의 교육은 어떠할까.

“제가 생각하기에 제일 심각한 문제는, 우리 교육이 사회구성원들에게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안목을 갖게 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것이 가장 심각한 거라고 저는 봅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가 아니다, 이게 참 허깨비 같은 상황인 건데, 왜냐하면 의식세계를 자기가 주체적으로 형성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게 아주 심각한 거죠. 아이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가진 만큼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것인데,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눈을 뜨질 못하는 겁니다. 암기위주의 교육에, 입시, 주입식, 이런 것에 매몰되어있다 보니까, 독서나 토론, 문화예술적 감수성, 이런 것들이 배제되어 있는, 아니면 주변화 되어있는 환경 속에서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겁니다.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가 되지 못하고, 그야말로 이 사회에서 밀려들어오는,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에 대해 여과할 수 있는 장치를, 사회구성원 각자가 교육과정을 통해서 획득하지 못한다는 거죠. 그러다보니 사회를 지배하는 가치관, 주로 물신주의적 가치관인데, 이런 것이 완전히 사회를 점령해버리는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자기 자신이 삶의 주체, 자기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는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오늘 날 교육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사회구성원을 목적으로 바라보고, 교육과정을 통해서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가 될 수 있는 ‘안목’을 갖추게 해준다는 것, 너무나 당연한 얘긴데, 그것이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이죠.”

세상을 바라보는 눈, 스스로를 주인으로 만드는 삶

문화예술교육이 악기연주나 붓 터치의 기법을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방식과 타인과 소통하는 법을 익히는 과정이라면, 다문화적인 감수성과 문화다양성의 인식은 문화예술교육이 담당해야 할 역할의 본령인지도 모른다. 그의 표현처럼, 자신의 존재를 풍요롭게 느끼고 그 풍요 속에서 다른 존재들과 행복하게 만나 교류하는 일. 한국사회가 한국 바깥의 세계, 혹은 이주노동자나 결혼이주여성, 혼혈인들과 소통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그에게 물었다.

“이주노동자를 바라보는 내국인의 시각, 이것은 끊임없이 제기되어야 하는 문제고, 문화적 다양성에 대한 이해가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문제라고 보지요. 저는 이주노동자 자체를 마치 순전히 돈 벌기 위해서 온 사람으로 바라보는 것, 역시 그 시각 자체가 경제적 시각이라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전 이런 표현을 합니다만, 그들에게 ‘고향’이 있다는 것은 곧 그들에게 문화가 있다는 것이죠.
특히 이주노동자들을 보는 시각에 있어서 한국 사람들의 이중성에 대해서 꼭 얘기를 하고 싶은데요. 그야말로 제1세계나 백인들에 대해서는 껌뻑 죽는 반면, 가난한 나라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주 경멸적인, 이런 태도가 저는 완전히 정확하게 반사각이라고 생각합니다. 월드컵에 대한 열기도, 한편으로는 제1세계에 대한 콤플렉스의 반사라는 면도 있다고 보지요. 상업주의나 민족주의, 이런 문제들도 개입되어 있겠지만, 여기에 또 개입되어 있는 것이, 4강에 가야 한다, 알프스를 넘어서겠다, 프랑스도 별 거 아니다…, 이런 식으로 제1세계에 대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그런 것들이 결합되어 있다는 것이죠. 제1세계에 대해서는, 2002년 월드컵 때 호주, 캐나다, 미국사람들 위한 홈스테이, 거기에서는 보면, 거의 간까지 내준다 싶을 정도로 받는 것 없이 식사대접까지 했던 반면에,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는 그야말로 그렇게 냉대하는, 그 이중성. 그 각도가 정확하게 반사한다고 봅니다. 이건 그만큼 우리 자신의 긍지, 이런 부분조차 비어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거라고 저는 생각하죠.


우리 문화, 우리의 자존감이라고 할 때의, 있을 ‘존(存)’이요. 내가 있다고 하는 것, 이 자존감을 가지고 있다면 제3세계 이주노동자들에 대해서도 ‘내가 있다’는 것이 존중될 것이고, 제1세계에 대한 지나친 환대, 이런 것도 해소될 수 있는 거라고 보죠.”

인간성의 확장으로서의 문화예술적 감수성

자존감에 관한 그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문득 얼마 전 방한했던 얼 쇼리스의 ‘가난한 자들의 인문학’이 떠올랐다. 빈부나 지역, 처해있는 각자의 처지를 넘어서 인간은 모두 스스로의 자존감을 필요로 하는 존재다. 문화예술교육이나 인문학적 성찰의 궁극적인 기원과 지향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니, 그 역시 성공회대 주관으로 노숙인들과 함께 했던 강좌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가르치는 자리가 아니라 배우는 자리였고 공부하는 자리였다는 그의 기억에 대해 듣고 있으니, 허물어버려야 하는 더 많은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의 경계를 허물어버리지 않고 우리는 과연 얼마나 배우고 가르칠 수 있겠는가. 교육의 의미를 교실 안에 가두지 않기 위해 학교의 담장을 허물고, 교과의 담장을 허물어 서로 다른 교과의 배움이 풍부하게 만나게 하는 것. 문화예술교육은 이처럼 ‘교육’의 의미와 영역을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 점점 더 확장시키는 과정이어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적 감수성이라는 게 뭘까. 저는 결국 그것이 인간성의 확장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사회의 진보라는 개념과도 만나는 것인데요. 인간성의 확장이라고 할 때, 결국 그런 면, 인간성의 확장이라는 면에서의 그 공감대가 이루어진 뒤에, 그 토대 위에서 개성이라든지 이런 것이 같이 꽃필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죠.”

문화예술적 감수성을 인간성의 확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리하여, 자존감과 긍지 속에서 인간 존재가 모두 풍요로운 존재들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 그에게, 문화예술교육의 현장에 계신 독자들에게 전할 마지막 한 마디를 청했다.

“지금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속물적 가치관에 대해 늠름해야 된다는 거죠. 말하자면 존재가 완전히 소유로 포장되고, 끝없이 소유로 비교당하는 것에 대하여, 늠름해야 된다는 거죠. 그것이 인간 존재의 가치의 척도가 절대로 될 수가 없다, 그러한 믿음의 탄탄함, 늠름함이 있어야죠. 그게 아까 얘기한 자존감, 내가 ‘있다’는 것에 대한 토대가 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텔레비전이라든지 대중 미디어에서 쏟아내는 가치들, 예를 들면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말해줍니다,” 이런 따위가, 아주 정확하게 소유가 존재를 규정하는 거거든요. 여기에 늠름할 수 있는, 존재의 가치를 문화예술적 감수성과 사회문화적 소양과 인간됨과, 이런 것을 통해서 끊임없이 성숙시켜나가는 자세, 이런 것이 요구된다는 거죠. 그런 것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성숙을 끊임없는 모색하는 것, 그래서 가진 것으로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성숙을 끊임없는 긴장 속에서 생각하는, 이런 자세, 책이라든지 문화예술적 활동을 끝없이 벗하는, 그런 늠름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