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용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현대미술 작품은 이해하기 어렵고, 감상하기 어렵다는 것이 대중의 상식이다. 도슨트를 통해 작품 생산의 배경이나 맥락,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메시지에 대한 설명을 듣지 않으면 대개는 수용자 자신이 가진 생각, 느낌, 혹은 이전에 현대미술 작품을 접했던 경험에 비추어 작품을 해석하거나 감상하게 된다. 물론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수용자의 해석, 감상 사이의 불일치가 현대 미술의 지평을 넓히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이때 전문가들 사이에서 작가의 권위와 작가적 신비주의, 작가의 폐쇄성, 예술과 사회의 관계 등이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는 작가-작품(혹은 작품 전시 공간)-수용자 사이의 소통에 무게를 둘 경우, 작가는 작품 생산 단계에서부터 가상의 수용자를 염두에 두기 시작한다. 특히, 작품의 유희적 성격에 집중할 경우, 작가의 상상력이 가장 중요한 작품 생산의 도구가 된다. 현대미술 작품이 너무 철학적이라거나,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 기반을 두어 해석하고 감상하기 어렵다거나 하는 문제는 여기에서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보다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관객의 내적 에너지를 특별한 방식으로 운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작가는 작품의 외피, 즉 표현 방식의 다양성에 신경을 집중하고 완성된 작품의 전시 방식까지도 고려하여 작업하게 된다. 이 경우 평면적인 작업보다는 보다 입체적인 작품들이 탄생된다.
한국 현대 미술의 현재를 가늠하기
<미술과 놀이-펀스터즈>전은 전시할 작품을 선정하는데 있어, 작가 정신, 신비주의, 작가적 세계를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입체성, 다양한 재료와 소재를 통한 상상력의 증대, 관객과의 소통을 중심에 두고 있다. 79%이상의 작품이 평면 작업 보다는 공간감각을 이용한 작품이거나, 평면작업이지만 다양한 소재를 사용, 입체감을 살린 작품들이 대다수다. 특히 근 10여년 이상 한국 현대 미술의 중요 화두였던 인터랙티브 뉴미디어의 사용이 눈에 띈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 미술학교를 졸업한 신예들임을 감안할 때, 소위 포스트모던 경향이라는 속칭이 붙여졌을 정도로 우리 미술계의 큰 변화가 예고되었던 90년대 이후 젊은 작가 세대들의 작품 생산 방식의 변화를 볼 수 있었으며, 향후 10-20년간 현대 미술 발전의 향방을 가늠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다.
송지인 작, ‘홍예칠색마’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경향은 “쉽다”는 것이다. <미술과 놀이-펀스터스>라는 전시명에서부터 드러나듯이, 미술로 노는 것이 이제 주류 미술계에서 가능하다. 이들은 “싸구려”라고 조롱당했거나 혹은 “키치”로서 주류문화에 대항했다거나 보다 포스트콜로니얼리즘적인 맥락에서 서구현대미술의 아류라고 힐난 받거나 했던 과거의 분위기와는 다르게, 주류 현대미술에 저항을 하는 것도 아니고 주류 미술계로부터 비난을 거세게 받는 것도 아닌, 80년대 영국 대중문화연구의 선두그룹이었던 “신그람시주의자(New-gramscian)”들이 용어화한 “저항과 순응사이에서 협상한 결과물”이다. 그리고 이들이 문화의 판도와 문화생산방식의 변화를 주도하게 되었다는 담론이 마치 예언처럼 적중하듯, 새로운 형태의 문화 생산 메커니즘이 한국 현대 미술 지형을 바꿔놓고 있다.
놀이+현대미술: 현대미술을 대중에게 친숙한 방식으로 전달
<미술과 놀이-펀스터즈>전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과 고양어울림 미술관에서 개최, 지원되는 전시회다. 상업적인 측면에서 보았을 때에도 큰 성공을 거둔 전시회다. 2003년 재개관한 한가람미술관이 첫 기획전으로 <미술과 놀이>전을 개최한 후, “그동안 미술로 포함시키기를 주저했던 만화나 에니메이션, 각종 재료를 활용한 모자이크 퍼즐놀이, 그림자놀이, 가면놀이, 가상공간체험 등” “놀이와 즐거움을 통한 현대인의 감성적 측면에 관심을 기울”(http://www.sac.or.kr/lab2003/art_playing/info.html)이는 한편, 아이들을 위한 “여름방학특집”으로 기획되기까지 총 4회에 걸쳐 개최되고 “에듀테인먼트(Edutainment)”라는 문화이벤트계의 새로운 조어에 조응하여 모범사례로 꼽힐 만큼 성장하였다. 최근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화두가 전면에 대두되고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발레, 뮤지컬, 클래식, 연극계의 중요한 인적 자원이 학교, 지역 문화공간을 거점으로 널리 보급되고 있는 시점에서, 현대 미술계의 젊은 작가들의 작업 방식과 새로운 사조를 전면에 부각시키면서 상상럭과 재미에 문화이벤트적인 면모까지 가미시킨 <미술과 놀이-펀스터즈>전은 문화사회적으로, 예술사적으로, 경제적으로 봤을 때 참으로 ”재미있는“ 프로젝트가 아닐 수 없다.
황란 작, ‘부처’
예술과 놀이의 만남을 통한 새로운 전시기획 방법 모색
한편으로 보면 새로운 현대 미술의 경향을 전시하는 듯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시를 관객의 눈높이에 맞춤으로써 대성공을 거두고 있는 <미술과 놀이전>의 전시실 내부를 들여다 보자.
한가람 미술관의 대(大)전시 <인상파의 거장전>이 한창 열리고 있는 한켠, <2006 미술과 놀이-펀스터즈>가 열렸다. 3회째까지 사용했던 <한국현대미술전-미술과 놀이>라는 이름에서 한국현대미술전을 생략하고, 부제였던 “미술과 놀이”를 전면에 내세운 점이 변화라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관람료는 초창기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이 없다. (어른 5,000원/어린이 3,000원) <인상파 거장전>을 관람하려는 인파를 헤치고 표를 구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점이 미취학아동들의 또리또리한 눈동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구경하느라 땀에 젖어있는 모습, 그리고 예외 없이 아이들의 질문에 끊임없이 답하고 있는 부모들의 모습이다. 작품 사이를 이리저리 배회하며, 만져보고, 체험해보는 아이들의 모습은 <미술과 놀이전>이 주는 “신기하고 재밌는 경험”의 단면을 실감케 해준다.
미구엘슈발리에 작, ‘디지털파라다이스’
특히 공감각적으로 설계된 전시공간은 아이들에게 미술관에 대한 새로움 경험을 제공하게 해주는데, 만질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미술 작품이 아이들에게는 매우 새로운 경험으로 다가선다. 평면작품들만 전시되어 있는 시각 전용 미술관이 아이들에게 바라보고 경외할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한다면, 공감각적으로 설계된 <미술과 놀이>전의 작품들은 미술관이라는 조금은 권위적인 공간을 아이들의 놀이터, 즉 보고 만지고 직접 실험해볼 수 있는 장으로 뒤바꾸어 놓았다. 아이들은 작품마다 그것이 형상화하는 것이 무엇인지, 어떤 작동원리로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본인들이 움직이는 반경에서 작품이 어떤 방식으로 반응하는 건지 도대체 궁금해 한다. 한번 만져보고 들여다보고 작동시켜 보지 못해 안달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문화예술교육이란 어떤 장르에 대한 교육이기 이전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펼쳐두고 직접 체험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들을 충족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의 무한한 호기심을 발동시키고, 그런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사물을 새롭게 이해하는 방식을 배우고, 세계를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는 것이다.
아이들과 아이들을 동반한 부모들이 가장 신기해하고 좋아하던 작품은 한선현의 염소시리즈, 황란의 <부다>, ICU 디지털미디어랩, 미구엘 슈발리에의 등이었다. 한선현의 염소시리즈((2004)는 나무와 두께가 1~2cm쯤 되는 실을 이용, 제작한 염소모양의 설치물을 천장과 전시장 바닥 등에 설치하여, 마치 염소가 사람처럼 뛰어노는 자연 공간에 와있는 듯한 기분을 연출하였다. 황란의 <부다>(2005)는 수 만개의 핀과 단추, 팝콘을 재료로 한 작품으로, 생각에 잠긴 부처가 팝콘 눈이 내리는 풀밭 위에 팔을 베고 누워 있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특히 핀과 단추로 형상화된 부처는 손으로 치며, 소리가 나는 일종의 악기처럼 제작되어 시각적 체험을 원하는 관람객들에게 극도의 흥미와 재미를 선사하였다. (그러나 한참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재미있어하는 필자에게 어른은 치면 안 된다던 전시장 운영자의 말이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이 전시는 어린이만을 위한 것인가.)
ICU 미디어랩, ‘FFFㅋㅋㅋ(Fear Fun Free)’
ICU 디지털미디어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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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는 일정 크기의 소리에 반응하는 조명기를 이용하여 만든 설치작품으로, 밀폐된 공간에 관람객들이 들어가 일정 크기 이상의 소리를 만들면 조명기에 불이 켜진다. 밀폐 공간 내에 수용시킨 관람객의 수가 너무 많아 여기저기 박수를 치고 있어서, 일거에 특정 부분의 조명이 켜져 즐거움을 만끽하는 최적의 결과는 얻지 못하겠지만, 아이들은 적어도 신기해하고 즐거워한다. 물론 하나, 둘, 셋 하며 박수를 지도하는 엄마들의 목소리도 들을 수 있다. 미구엘 슈발리에의 (2006)는 프로젝터, 센서 등을 이용하여 관람객들의 동작에 상호작용(interactive)하는 영상을 연출하였다. 풀과 꽃, 나무를 형상화한 영상은 관객들이 손을 번쩍 들어 움직이는 방향대로 움직이는데 마치 바람에 흩날리는 듯해 보인다. 열심히 흔들지만 기민하고 빠르게 직접 반응하는 것은 아니라서 인내심이 없는 관람객들은 사뭇 실망한다.
이외에도, 김태은의(2006)는 상자에 바람개비가 달려 있어, 입바람으로 바람개비를 돌리면 소리가 나는 장치다. 입바람이 약한 어린이, 노약자, 임산부, 흡연자에게는 반응하지 않는다. 특히 노약자와 임산부가 조심해야 할 작품으로 변재언의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경계>(2006) 시리즈물이 있는데, 홀로그램을 사용한 60X50cm 크기의 액자 4-5개로 구성된 작품으로 특정 시점에서 바라보면 괴상한 모습을 한 사내가 튀어나와 관람객을 놀라게 한다. 놀이동산에 온 기분을 만끽시켜 주는 또 다른 작품은 송지인의 작품으로, 인간과 동물을 합성하여 반인반수 조각상과 그림으로 구성된 전시공간을 연출하였다. 이외에도 게 껍질, 스티로폼 구, 비닐, 인형 등 다양한 오브제를 사용한 작품들이 많이 있어, 신선한 자극과 기발한 재치를 느낄 수 있다.
이번 <2006 미술과 놀이전>은 펀스터스(Funsters)라는 신조어를 부제로 사용하는 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즐기는 사람” 혹은 “즐기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 기획한 현대미술특별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참여 작가가 90년대 미술학교를 졸업하고, 2-5차례 (많게는 20회 정도) 개인전을 개최한 경험이 있는 젊은 작가들이므로, 한국 현대미술의 현재를 가늠할 수 있는 하나의 척도를 제공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운영의 측면에서 보았을 때, 관람객의 동선이나 관람 규모를 계산하지 않았거나 관리하지 못해, 최적의 관람 조건을 만들어 주지 못한 단점은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주류 미술관에서 새로운 경향을 대변하는 젊은 작가들을 위한 대규모 기획전이 열렸다는 것은 매우 귀중하고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현대미술의 유희적 성격, “재미”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놀이”라는 모티브로 작품 생산하고 있는 현대 미술계의 몇몇 중요한 발전 성과를 관람객에게 다양하게 전시하고 제시하기보다는, 자칫 대중의 취향을 엔터테인먼트 요소에 기반하여 재단하고, 결국 피상적인 관람 경험의 기회만을 제공하여 현대 미술에 대한 오해를 증폭시키지 않겠느냐는 몇몇 전문가의 지적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재미로 치자면, 타 장르, 타 공간에서 유사한 개념을 형상화하고 있는 더 재밌는 놀이거리들이 많이 있다. 놀이동산, 판타지 영화, 게임기 등에 익숙해진 관객들(특히 아이들)의 시선을 완전히 사로잡을 수 있을까. 판타지 소설, 동화책보다 더 상상력이 가득한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더욱이, 동전의 양면 같은 말이겠지만. 대부분 작품들이 제시하고 있는 ‘상상력에 기반한 놀이’가 흔히 놀이동산에 볼 수 있는 이미지들이어서, <미술과 놀이>전에서 제시된 작품들이 관람객이 구동할 수 있는 상상력을 제한하는 측면도 있어 보인다. <미술과 놀이>전이 놀이와 미술의 결합을 제시하는 기획전이라면, 보다 다양한 상상력을 전시할 수 있는, 다양한 미술 컨텐츠의 계발이 필요하다.
하여, 미술 컨텐츠의 계발이라는 측면에서 놀이와 미술을 결합해 작업하고 있는 젊은 현대 미술 작가들의 다양한 작품을 지속적으로 기획 발굴 전시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발전이란, 몇몇 개인의 천재적인 노력을 통해 성취되기도 하겠지만, 그 개인들을 지원하고 소개하는 기획자들의 손에 의해서 가속력이 붙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미술과 놀이전>을 보고나니, 이 전시가 일회성 전시가 아니라 “놀이”를 모티브로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젊은 작가들을 위한 플랫폼(platform)이 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바램을 가지게 되었다. 에듀테인먼트가 아닌 젊은 작가들을 육성, 발굴할 수 있는 무대가 되어, 더욱 흥미롭고, “재미”있고, 또 의미 있는 기획 전시로 발전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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