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위안과 즐거움이 되어주는 삶의 지침서

 

작가 피터 게더스의 고양이 노튼은 우연히 그에게 왔고 그의 고양이가 되었다. 오래도록 이 책을 좋아했다. <파리에 간 고양이>뿐만 아니라 그 뒤로 이어지는 <프로방스에 간 고양이>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고양이>의 ‘노튼 3부작’을 다 사랑한다. 삶에 조금 지쳐갈 무렵이라면 이 책은 기꺼이 나서서 소소한 위안과 즐거움이 되어줄 책이다.

고양이를 생각한다. 나의 고양이는 오늘, 어쩌면 늘 그곳에 세워진 붉은 차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을 것이다. 나의 고양이는 지금, 어쩌면 동네를 어슬렁거리고 있을 것이다. 나를 기다릴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와 마주치길 조금은 기대하고 있으면 좋겠다. 나는 고양이를 만나면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소시지를 꺼내고, 그게 없다면 얼른 달려가 참치 캔을 사오고, 음식을 바닥에 쏟는다. 어제는 너를 만나지 못해 미안해. 너는 어제 어디서 뭘 했니? 그러면 고양이는 잠시 나를 쳐다보고 대답한다. 내가 널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잖아.

 

고양이, 길들여지지 않는 영혼

 

아, 상처다. 알아. 너는 이 길의 주인이고 나는 그저 이 길을 지나갈 뿐이지. 우리가 고양이에게 갈구하는 것은 ‘나만큼’의 애정이 아니다. 우리는 언제든 그가 원하는 길을 기꺼이 내준다. 길을 가다가 한번 슬쩍 돌아봐주면, 그걸로 감사할 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고양이가 있고, 누군가에 의해 돌보아지는 고양이도 길을 떠도는 고양이도 있지만, 그들 모두 자유롭다. 집고양이가 길을 나서면 길고양이고 길고양이가 집에 들어서면 집고양이다. 머무는 곳에만 차이를 둘 뿐, 고양이는 고양이라는 자신을 잃지 않는다. 길들여지지 않는 영혼. 이 말이, 고양이가 인간에게 그만큼의 애정을 베풀지 않는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그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의미를 부여해줄 만큼의 아량을 갖고 있다.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그는 우리를 사랑해준다. 그렇다면 얼마만큼의 애정? 당신 생각보다는 깊은.

 

노튼을 생각한다. 작가 피터 게더스의 고양이 노튼은 우연히 그에게 왔고 그의 고양이가 되었다. 아니, 게더스 씨가 노튼의 인간이 되었다. 그전까지 그의 인생에서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략 이런 것들이었다. 절대로 공화당에는 투표하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슬픈 것이다. 물론 이 목록에는 ‘고양이는 싫은 존재’도 있었다. 하지만 노튼과 눈이 마주친 순간, 그리고 곧바로 서로에게서 서로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바로 그 순간, 작은 고양이는 어느덧 그의 삶 곳곳에 회색 털을 폴폴 날리면서 그의 인생관마저 바꿔놓는다. 그리고 시나리오 작가로서 대서양을 건너야 하는 때가 오자 뉴요커 게더스 씨는 결심한다. 같이 가는 거다, 파리에. 아니 어디든. 이것이 이 책의 제목이 <파리에 간 고양이>가 아니라 ‘어디에든 함께 한 고양이’가 되어도 좋은 이유다.

 

삶에 지쳐있을 때 위안을 주는 양식

 

오래도록 이 책을 좋아했다. <파리에 간 고양이>뿐만 아니라 그 뒤로 이어지는 <프로방스에 간 고양이>(결국 게더스 씨는 노튼을 위해 잠시 프로방스에서 ‘머무는 삶’을 보내기로 한다), <마지막 여행을 떠난 고양이>(제목에서 짐작했겠지만 이제 더 이상 노튼과는 여행을 떠날 수 없다)의 ‘노튼 3부작’을 다 사랑한다. 대단한 삶의 지혜나 교훈이, 삶을 뒤흔들 만한 감동이 이 책들에 담겨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 인생 교과서는 아니니까. 하지만 당신이 조금 지쳐 있다면, ‘인생에 유머 감각이 필요하지 않은 순간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길을 걸어가는 고양이와 잠시 눈이 마주치길 바라는 사람이라면, 그런 당신에게 기꺼이 나서서 소소한 위안과 즐거움이 되어줄 책이다.

내가 고양이를 만나는 시간은 대략 저녁 8시쯤이다. 참으로 애매한 시간대라, 내가 그 시간에 그곳에 있기란 그리 쉽지 않다. 차라리 우리의 시간이 12시였더라면. 왜 우리는 8시로 정해버렸을까? 물론 그가 나를 기다리지 않았다는 것쯤은 알지만, 8시에서 5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초조하다. 혹 10시쯤 내가 돌아가는 시간에 그와 운 좋게 마주친다면 나는 내 멋대로 그를 ‘노튼’이라 부르며(내일은 또 다른 이름이겠지만 오늘은 <파리에 간 고양이>를 다시 생각한 날이므로) 얼른 참치 캔을 사러 달려갈 것이다. 그럼 나의 고양이는, 세상 모두의 고양이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 나(참치?)를 기다렸다가 조용히 참치를 먹어치운 뒤 휙 돌아설 것이다. 스윽, 내 다리를 몸으로 한번 스치고 지나가며 ‘잘 먹었어’ 말하는 것을 잊지 않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