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영화 품평을 나눠도 질리지 않을 영화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술을 부르는 영화’다. 그게 내 영화 감식법이다. 영화는 술을 당겨야 한다. 네덜란드 여류 감독 마린 고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은<안토니아스 라인>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영화 품평을 나눠도 질리지 않을 그런 영화로 성숙한 페미니즘 영화다.
얼마 전, 아내와 술을 마셨다. 오랜만에 가진 둘만의 자리였다. 어떤 부부보다 술 금실 하나는 빠지지 않는 우리들의 술자리는 자정을 넘고 술집 영업시간을 넘어 계속되고 있었다. 서로가 상대방의 인생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얘기하던 즈음이었나? 소주 한 잔 들이켠 아내가 말했다. “선배, 난 선배를 똑 닮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어.”
순간 박장대소가 터져 나오고 말았다. “야, 그 말, 내가 올해 들었던 말 중에 가장 웃긴 말이다.” 배를 쥐고 뒤로 자빠지는 나를 보며 아내는 뾰로통 ‘뚜껑’이 열리고 말았다. “그 말이 그렇게 웃겨? 선배에 대한 내 마음을 그렇게 밖에 못 받아들여!” 아뿔싸! 오해였다. 나를 향한 아내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해명이 필요했다. 주섬주섬 웃음을 주워 담으며 오해를 풀기 시작했다.
수컷들의 정치와 권력놀이에 염증 느끼다
몇 년 전 친구와의 술자리. 당시 뉴스는 호주제 폐지 문제로 떠들썩했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은 이 나라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그 때 친구의 뚜껑이 열렸다. 평소 다분히 마초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의 입에선 뜻밖의 얘기가 터져 나왔다. “내 평생소원이 호주제 폐지야. 하루 빨리 없어져야지. 난 모계사회에서 살고 싶어. 언제까지 남자들이 이 무거운 삶의 고통을 지고 살아야 해. 빨리 여자들 품으로 돌아가야 해.” 친구의 말은 단호했다. 그 동기와 이유가 뭐든 간에, 그는 쿨하게 말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은 너무 후졌어. 그 알량한 권력 여자들한테 넘겨주고 편하게 살자.” 브라보! 전적으로 공감했다. 마초들이 지배하는 세상은 너무 후졌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난 뼈 속 깊이 페미니스트였다. 그렇다고 거창하게 ‘이 세상 절반의 해방’을 외치고 싶진 않다. 인간 해방의 시작은 여성 해방으로부터 시작돼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싫은 건, 얼빠진 수컷들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수컷들의 정치와 권력놀이가 싫은 거다. 정치게임에 익숙하지 않은, 패거리 문화에서 서바이벌 하는데 길들여지지 않은 여자들의 공동체가 수컷들의 그것보다 좋은 거다. 남성 중심의 가부장 사회에서 남자들은 2세를 통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 한다. 자신의 씨를 통해 번식하고 싶어 한다. 그게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라고 하지만, 난 그걸 거부하고 싶었다. 그다지 우수하지도 않은 내 종자에 집착하는 것이 그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러니 아내가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술을 부르는 성숙한 페미니즘 영화
1996년 겨울, 시사회에서 영화를 봤다. 극장을 나서자 눈이 내리고 있었다. 술이 마시고 싶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술을 부르는 영화’다. 그게 내 영화 감식법이다. 영화는 술을 당겨야 한다. 그날 본 <안토니아스 라인>은 술잔을 기울이며 밤새도록 영화 품평을 나눠도 질리지 않을 그런 영화였다. 네덜란드 여류 감독 마린 고리스의 <안토니아스 라인>은 성숙한 페미니즘 영화다.영화는 4대에 걸친 모계 가족의 가족사를 보여주지만 굳이 페미니즘을 애써 내세우지 않는다. 여성들의 배타적인 연대를 외치지도 않는다. 전투적인 여성주의와도 거리가 멀다. 남성 중심의 사회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치환된 또 다른 가족 권력을 얘기하지도 않는다.
2차 대전이 저물어 갈 무렵, 안토니아는 딸과 함께 어머니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다. 안토니아의 귀향은 하나의 대안과도 같다. 수컷들의 놀이인 전쟁이 가져온 폐허, 그 폐허 위에서 안토니아는 새로운 공동체를 일군다. 그녀의 딸이 딸을 낳고 그 딸이 또 딸을 낳는 동안, 안토니아의 공동체에서 우리는 대안적인 미래를 본다. 영화에서 딸들의 아버지는 철저하게 배제된다. 안토니아의 딸, 손녀, 증손녀의 아버지와 남편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기독교의 도그마와 가부장적 질서의 상징인 신부는 교회의 교리에 얽매이지 않는다. 교회를 뛰쳐나온 그는 안토니아의 공동체에 편입되고, 한 여자의 남자가 된다. 아들들을 거느린 농부 바스는 안토니아에게 청혼했다가 거절당하자 안토니아의 공동체와 연대한다. 이들에게 가족과 부부라는 기성사회의 공동체는 중요하지 않다. 동서고금의 철학에 통달한 염세주의자 ‘굽은 손가락’은 안토니아의 손녀를 가르친다. 마을의 바보 루니도, 오빠에게 성적으로 착취 당한 정신박약아 디디도, 미혼모 레타도, 안토니아의 식탁에서 모두 한 가족이 된다.
영화가 제시하는 공동체 인상적
<안토니아스 라인>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영화가 제시하는 공동체다. 마린 고리스 감독은 단 한 군데도, 페미니즘이란 인장을 영화에 남기지 않는다.안토니아의 대안 공동체에서 남녀의 구분은 따로 없다. 여성과 남성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 철부지 남자들의 한계를 가볍게 조롱하고 희화화 할 뿐, 영화는 남성을 포용한다. 안토니아의 공동체에는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 다양하고 이질적인 가치와 규범들이 공존한다. 함께 노동하고 생산하며 나눠 갖는다. 나와 너를 구분 짓지 않는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공생한다.
요즘 내게 중요한 건, 현재보단 미래다. 나는, 나와 아내는, 혹 미래의 우리 가족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그다지 잘나지도 않은 나를 닮은 자식을 낳고, 아내와 함께 가족을 꾸리고, ‘알콩달콩’ 행복하게 사는 게 나의 꿈은 아니다. 기왕이면 아내가 깃발을 든 공동체, 우리 사회의 대안적인 가치들이 공존하는 공동체, 안토니아의 그것과 같은 열린 공동체에서 살고 싶다. <안토니아스 라인>은 내게 작은 행복을 준 영화다. 하지만 그건 꼭 영화만은 아닐 것이다. 가까운 미래, 안토니아의 공동체가 내 현실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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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을 읽으니 저도 한번 안토니아스 라인 보고싶네요.
영화평 잘 봤습니다. 저도 영화가 한 번 보고 싶어지네요. ‘내가 좋아하는 영화는 술을 부르는 영화다’ 라는 말이 너무나도 공감이 됩니다. 그런데 맨 첫줄에 ‘< 안토니아스 라인>은’이 두번 들어가 있네요^^ 고쳐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혹시 이 글을 제 블로그에 퍼가도 되겠는지요? 출처는 꼭 밝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