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즐거움을 깨닫게 해준 뇌관 같은 여행서

 

우리의 삶은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것 같다. 그저 앞만 보고 달린다. 만일 혼자 속도를 늦추기라도 하면 전체의 흐름을 방해한다며 바로 뒷사람으로부터 응징을 당해야 한다. 꽉 막힌 길에서 기약 없이 기다리다가 문득 다 부질 없이 느껴져도, 낡은 차하나 버리고 가 버릴 수도 없다.

 

하지만, 예술은 길 밖으로 나가는 행위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주인공은 꽉 막힌 고속도로에 갇힌 택시에서 나와 하이힐을 벗고 지상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을 걸어 내려가 세상으로 나간다. 소설가 박민규는 간파한다. 프로가 아름답고, 이기는 것이 신성한 세상에서 영원한 꼴찌 삼미 슈퍼스타즈의 야구, 그것은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 것이었다.

 

미 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한 자전거 여행기

 

80일에 걸쳐 6천400킬로미터를 자전거로 횡단하는 일 역시, 사실은 길 밖으로 나가는 행위다.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조국을 알리려고 하는 것도, 불우이웃 돕기 기금을 모금하기 위해서도, 세계 평화를 위해서도 아닌, 어떤 사명감 따위도 없이 오로지 “재미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직장도 그만두고 가족과도 떨어진 채 발톱이 빠져가면서 페달을 밟아 산맥을 넘고 사막을 건너는 일은 우리가 어릴 적 어른들이 가르쳐 준 이 세상의 규칙에 반하는 불온한 짓이다.

 

홍은택의 <아메리카 자전거 여행>을 읽는 것은, 그래서 불온한 행위일지 모른다. 그가 버지니아주 요크타운에서 오리건주 플로렌스까지 미 대륙을 동에서 서로 횡단하면서 우연히 만났다가 헤어지는 자전거 여행자들은 “내 아이는 소중하니까”를 외치며 비싼 수입 분유를 먹여 키워주신 어머니, “남들과 같이 하면 남들보다 나아질 수 없다”면서 잠을 줄여 문제를 풀라고 하시던 선생님,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면서 손에 잡히는 인생의 목표를 제시해 주는 TV로부터 우리가 배운 삶의 방식을 기준으로 보면 귀중한 시간을 낭비하며 비생산적인 고생을 괜히 사서 하는 ‘또라이’들이다.

 

저자인 홍은택은 14년 간 밤낮 가리지 않고 일을 하고, 유학까지 와서 2년간 학업과 일을 병행한 끝에 만 41세에 학위를 받고 공식적으로 백수가 되고 나서 이 여행을 떠난다. 광대한 평원을 지나고, 하늘에 닿은 산맥을 넘으면서 조리도구도, 초를 켜는 랜턴도, 여벌의 사이클 의상도, 신발도 하나씩 하나씩 포기하고 밤이면 0.6평짜리 텐트를 친 다음 대지에 누워 자면서 그는 선언한다.

 

호모파베르가 아닌 호모루벤스이고 싶다

 

“나는 돈이나 권력, 지위보다도 재미있게 잘 노는 사람이 가장 부럽다. 근대화가 우리 머릿속에 새긴 집단적 무의식인지 또는 자본주의의 의식화인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끊임없이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노는 것은 항상 죄악시됐다. 놀면 어쩐지 맘 한구석이 불편하다. 노는 것은 일하는 또는 공부하는 중간의 일탈된, 주변적인 행동일 뿐이다. 우리는 개미와 거북이를 떠받들고 베짱이와 토끼를 멸시한다. 우리는 일하는, 만들어내는 사람으로서의 인간인 호모파베르다. 일을 통해서 자기를 실현한다고 배운다.

 

나는 호모루덴스이고 싶다. 놀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나는 놀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 놀면서 이 세상에 있다는 거,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놀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노는 데는 어떤 의무가 조건도 붙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자유롭다. 자유는 신의 특징이다. 신은 누구의 창조물도 아니고 다른 누구를 위해 일하지 않으며, 세계는 제우스의 장난이라는 니체의 말대로, 세상을 창조해야 하기 때문에 창조한 것도 아니다. 신은 스스로 연유하며 스스로 완결된다. 노동이 신성한 게 아니라, 놀이가 더 신의 속성을 닮았다. 놀이는 일상적이고 지루하고 관습적이고 당위적인 세계에서 벗어나, 즉흥적이고 자발적이며 사소하며 창의적인 세계로 가는 몸짓이다. 천진난만한 아이가 되는 것이다.”

 

이건 ‘공산당 선언’보다 더 도발적인 선언이다. 그렇지 않은가? 일과 놀이의 주종관계는 역전될 수도 있는 것이다. 놀이를 일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한 잠시의 휴식이나 재충전으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물론, 일과 놀이가 하나인 행복을 누리는 소수도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평범한 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 일 자체가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은 쉽지 않다. 일상이 생존을 위해 견뎌야 할 무엇이 아니라, 놀이와 놀이 사이의 가슴 설레는 준비기간이 되면 좋겠다.

 

세상살이는 멀미나는 고속도로를 주행하는 일

 

필자는 자동차로 5천 킬로미터를 달려 미국 서부를 종단한 적이 있다. 아름다운 요세미티를 지나 남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데스밸리에 접어든다. 온 천지가 소금밭이다가, 타오르는 사막이기도 한 이 세상의 끝 같은 그곳에서 마주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생뚱맞게도 오페라 하우스였다. 주변 40킬로미터 내에 사람 사는 곳 하나 없는 황량한 땅에 버려진 고스트 타운이 하나 있다. 30년 전 브로드웨이 댄서 마르타 베켓은 공연 여행 중에 이곳을 지나치게 됐다. 다 무너져가는 버려진 소극장 건물을 본 그녀는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이 고스트 타운을 집으로 삼아 살면서 관객이 오던 안 오던 저녁이면 극장 무대에 서서 공연을 했다. 텅 빈 극장이 외로웠던 그녀는 극장 벽과 천정에 중세풍의 관객들을 가득 그렸다. 필자는 이 극장 안에서 나를 쳐다보는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한 그림 속 관객들의 눈들을 바라보며, 그리고 사막을 배경으로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백발의 무용수의 사진을 보면서 비현실적인 느낌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무대에 서던 한 예술가는 왜 이 세상의 끝에 진짜 자신의 삶이 있다고 확신하게 된 것일까.

 

필자는 잠시 자문했다. ‘너의 사막은 어디 있느냐. 네가 아무리 아닌 척하고 남들이 가는 안전한 길을 따라 걸어가고 있어도 불현듯 저항할 수 없이 너를 소환하고야 마는 블랙홀과 같은 사막. 우리 모두 시한폭탄 같은 각자의 사막을 품고 이 멀미나는 고속도로를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은 그런 우리들에게 뇌관 같은 책이기에 위험하다. 하지만, 용기를 내어 이 책을 소개하는 것은 예술이 본질적으로 불온하고, 혁명적이고, 위험한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