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거짓, 정의와 부정의의 간극과 해법
워낙 오래된 ‘역사’인 만큼 기독교 얘기는 종종 사람들을 지루하고 지치게 만든다. 골고다의 언덕에서 있었던 기적을, 믿거나 믿지 않거나, 더 이상 논하고 싶지 않아 한다. 그것은 각자가 선택하는 신앙일 뿐 모두가 다 공유해야 하는 철학은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를 이성적으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특히나, 예수의 이야기 역시 강박의 변주곡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의심에 빠진다. 예수란,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집착과 그 광기에 빠져 허우적댔던 평범남에 불과했다는 것인데 그런 그를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신격화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는 과연 신의 아들인가 아니면 사람의 아들인가. 어느 쪽의 그가 사람과 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인가. 어느 쪽의 그를 믿어야 우리는 과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인가.
트란 안 홍의 신작 <나는 비와 함께 간다>의 근본적인 질문은 바로 그 점에 위치하는 척 한다. 트란 안 홍은 지금 한창 종교와 이성 사이에서 기 싸움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인간 예수의 집착, 그로 인한 결핍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 가, 그 해법을 찾으려 애쓴다.
절대자인 현실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
무거운 주제와 달리 영화는 미스터리 심리액션극의 관습적 표현을 주저 없이 사용하고 있어 언뜻 흔한 대중영화처럼 보인다. 일단 영화 속에는 세 인물과 한 여자가 얽히고설키는 관계를 형성한다. 전직 형사인 클라인(조시 하트넷)은 어느 날 한 아버지로부터 자신이 20년 가까이 버려둔 아들 시타오(기무라 다쿠야)를 찾아 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필리핀 민다나오섬에서 시작해 홍콩으로까지 수사범위를 확대한 클라인은 우연한 기회로 삼합회 내에서 가장 악랄한 것으로 소문이 자자한 마피아 두목 수동포(이병헌)와 조우하게 되고 그 역시 자신처럼 시타오를 뒤좇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동포는 실종된 자신의 여인 릴리(트란 누예 계)를 시타오가 데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타오는 필리핀에서 갱단에 의해 한번 죽었다가 부활했으며 홍콩으로 흘러 들어온 후 노숙자들을 상대로 기적의 치유 의식을 행하며 살고 있는 인물이다. 릴리의 마약중독도 결국 그가 치료한 셈이 된다.
재미있는 것은 시타오의 그 같은 행동이 정말 신의 대리인으로서인지, 아니면 종교적 광기에 쌓여 있는 그의 착각에서 이루어지는 것인지 꽤나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그건 그가 줄창 부르고 찾아 대는 ‘아버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형사 클라인이 만난 시타오의 생물학적 아버지와 시타오가 찾는 종교적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중층화하고 배합시킨다. 클라인이 만난 아버지는, 모습은 숨긴 채 목소리로만 등장한다. 그래서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게 마치 그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한다. 기독교의 아버지도 늘 그런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실의 아버지와 하늘의 ‘아버지’는 막강한 권력과 재력을 지닌 인물로 표현되는데 절대자라는 점에서 전혀 다르지 않게 느껴진다. 클라인 형사는 홍콩에서 만난 옛 동료경찰 조멩지(여문락)에게 농담처럼 그래서 자신은 지금,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클라인과 시타오가 처음으로 만나는 후반 장면에서 이 아버지의 의미는 또한번 노골적으로 중첩된다. 시타오는 죽음의 문턱에서 헐떡대며 클라인에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요?” 그러자 클라인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아버지가 보내서 왔소.” 이때 시타오가 되뇌이는 아버지는 과연 어떤 아버지를 얘기하는 것일까. 아버지인가 ‘아버지’인가.
현대 인간들의 강박과 집착, 노이로제에 몰두
하지만 종교적 논쟁을 머리 뒤 어디론가 던져 버리면 영화는 좀더 새로운 각도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영화는 철저하게 현대 인간들이 안고 살아가는 강박과 집착, 그 노이로제에 대한 얘기에 몰두하려 한한다. 최고의 마피아보스인 수동포가 일개 마약중독자인 릴리의 사랑에 집착하는 것, 시타오가 아버지 하나님을 통해 그런 그녀의 고통을 대신하려고 집착하는 것, 클라인 형사가 시타오를 찾는 과정에서 자꾸 과거의 고통스러운 기억에 집착하는 것, 심지어 조멩지조차 수동포의 체포에 안달을 하다못해 스토커에 가까운 집착을 보이는 것 등등 등장인물 모두 집착과 그에 따른 광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살아간다.
비교적 이 영화의 중심 화자인 클라인은 극 중반쯤 조멩지에게 자신들의 그런 문제에 대해 차분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왜 경찰을 그만뒀느냐는 조멩지의 질문에 클라인은 정신과치료를 받으라는 요구 때문이었다는 것, 자신은 그간 24명이나 죽인 연쇄살인범을 좇는 과정에서 큰 고통을 받았음을 토로한다. 그리고 클라인은 이렇게 말한다.
“점점 더 그의 생각을 알게 되고 점점 더 그처럼 돼가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어.” 괴물에 집착하게 되면서 그게 결국 자신 안의 괴물을 발견하게 했을 때, 인간의 내면은 쉽게 무너지기 마련이다. 클라인은 붕괴된 자신의 마음을 여전히 추스르지 못하며 살아간다.
<나는 비와 함께 간다>는 영화가 공개된 후 평단에서 고른 지지대신 호오가 확실하게
엇갈리는 반응을 얻고 있는 모양이지만 그건 철저하게 트란 안 홍이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일부러 영화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예수 얘기인지, 성경 얘기인지, 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인지,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객석에서의 불만을 의도적으로 터져 나오게 한다.
세상의 구원은 진실과 거짓, 정의와 부정의의 간극에서 만들어진다. 클라인 형사는 어느 날 자신이 좇던 연쇄살인마를 현대 화가로 부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폭발하게 된다.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 진실의 모호함은 모호한 진실을 모르고서는 깨닫지 못한다. 구원은 애당초 모호한 것이다. 어떤 구원을 선택할 것인 가는 우리 자신들에게 달려 있다. 트란 안 홍이 얘기하려는 것은 바로 그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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