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의 비르투오소, 여전히 꿈을 꾸다
종이에 그려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며 연습을 하던 5살 꼬마가 있었다. 피아노를 시작하면서부터 편곡을 즐기던 꼬마는 만 7세에 이화경향콩쿠르에서 대상을 거머쥐었고, 5·16 민족상 수상으로 국립교향악단과의 협연 무대를 가지기도 했다. 1980년 세계적인 권위를 자랑하는 ‘부조니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우승함으로써 세계적인 피아니스트 반열에 올랐다. 종이 피아노를 두드리다가 전세계를 아우르는 피아니스트의 거장으로 성장한 그 아이의 이름은 바로 서혜경이다.
건반 위로 물결치듯 움직이는 손가락이 마법처럼 아름다운 선율을 선사한다. 상냥하고 장난꾸러기 같던 얼굴에 피아노와 음악에 대한 진중함과 열정이 내려앉는다. 온몸에 바늘땀을 뜨듯 반음씩 오르며 감성을 자극하는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이 서혜경 교수의 연구실로 울려 퍼진다. 기쁨과 감동으로 가슴이 벅차오르고 절로 박수가 터져 나온다. 이것이 서혜경 교수가 말하는 음악의 힘이다.
“음악은 하늘이 제게 주신 언어예요. 만국 공용어, 아무 말이나 움직임도 없이 1~2시간 동안 음악 속에 있는 것만으로도 눈물과 감동, 흥분, 열정 등을 느끼게 하는 너무 아름다운 언어죠. 이를 위해서는 고통스러움이 따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이고 감사하게 살고 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온 삶의 아름다움, 밤과 꿈
지난 2006년, 피아노와 음악밖에 모르던 그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시련이 찾아들었다. 음악가로서의 최고 절정기로 내달리던 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엄습한 것이다. 하지만 피아노의 비르투오소(Virtuoso, 이탈리아어로 연주 실력이 매우 뛰어난 대가) 서혜경 교수는 죽음의 문턱을 넘다들던 고통과 새로 얻은 삶의 기쁨마저도 음악으로 승화했다. “죽음의 문턱을 드나들며 느낀 감정과 아이를 두고 떠나는 안타까움, 살아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 피아노를 다시 만난 즐거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이에 서혜경 교수가 가지고 돌아온 것이 ‘밤과 꿈(Night and Dream)’이다. 암투병으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감정을 야상곡으로, 죽음 앞에서 아이를 생각하는 엄마의 마음을 자장가로 표현했다.놀라운 힘과 테크닉, 감성을 두루 갖춘 열정적인 피아니스트였던 서혜경 교수는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 돌아온, 삶의 소중함마저 음악으로 승화시킨 집념의 아티스트로 또 한 켜의 더께가 앉았다. 판매금 전액이 유방암 환자와 예방을 위한 한국유방건강재단으로 기부되는 이 앨범에 대해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이렇게 아름다운 야상곡은 들은 적이 없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려움은 어떻게 받아 들이냐에 따라 그 무게의 경중이 달라진다. 얼마 전, 원활하지 못한 커뮤니케이션으로 공연 이틀 전에야 한곡을 더 준비해야하는 상황이 생겼다. 완벽하게 악보까지 외우고야 무대에 오르는 완벽주의자인 그에게는 극도의 압박감이 엄습하는 상황이었다. ‘예전이었다면’ 말이다.
“예전이었다면 정말 불같이 화를 냈을 거예요. 하지만 화를 내는 대신 연습실 피아노에 앞에 앉아 심호흡을 했어요. 나 자신에게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기분 좋게 하자고, 해낼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죠.”
이에 서 교수는 3개월 동안 손도 댄 적이 없던 곡을 6시간 만에 완성했고,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훌륭한 연주를 선사했다. 연주회 후 다섯 곡의 앙코르 곡까지 선사하며 연주를 즐기는 여유를 만끽했다. 이에 서혜경 교수는 “암은 나에게 내려진 축복이라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고 털어놓는다.역
경 속에서도 여전히 꿈을 꾸다
1975년, 베네수엘라의 작은 마을에서 ‘엘 시스테마(El Sistema)’라는 음악교육재단이 만들어졌다. 마약과 범죄에 무방비하게 노출된 빈민가 아이들에게 악기를 대여하고 무료 레슨을 해주며 재능 있는 음악가를 배출하는 단체다.
플라시도 도밍고의 뒤를 이은 LA 필하모닉의 28세 신임 지휘자 구스타보 두다멜(Gustavo Dudamel) 역시 엘 시스테마의 수혜자였다. 힘이 넘치는 지휘와 남다른 아이디어로 ‘두다마니아(Dudamania)’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 두다멜은 국가적이고 체계적인 음악교육의 중요성을 방증하는 산증인이다.
서 교수는 한국의 엘 시스테마를 꿈꾸며 지난 9월, 서혜경 예술복지재단을 출범했다. 유방암 예방 및 치료지원 홍보 활동과 더불어 아이들을 위한 한국형 엘 시스테마 운동을 시작한 것이다. 전체적인 음악적 소양보다는 음표 하나라도 틀리지 않는 것과 ‘체르니’ ‘바이엘’ 등의 번호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아이들에게 음악에 대한 흥미를 잃게 만드는 음악교육이다. 꿈을 가지고 즐겁게 자신의 재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음악교육이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꿈을 포기하지 않으면 길은 열리게 돼 있어요. 저 역시 여전히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아이들보다 레벨이 위여서 그렇지, 저에게도 역시 유태인들 사이에서 한국인이라고 소외되고 여자라고 무시당하는 불공평한 상황이 늘 존재하거든요.”
서혜경 교수는 이화경향콩쿠르에서 대상을 거머쥐기 전해,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경험이 있다. 그 이유가 음표 하나 잘못 연주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에 어머니와 불을 전부 끄고 암흑 속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며 연습했다. 마치 한석봉과 그의 어머니처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연습한 끝에 서 교수는 피아노 부문이 아닌 전체 대상을 거머쥐었다. 이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역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음악은 멀리 있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겁니다. 음악은 알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들어서 좋고, 기쁨과 감동을 느낄 수 있으면 되는 일상이죠. 체력이 국력이던 시절은 지났어요. 이제는 풍요로운 문화예술 콘텐츠, 문화예술의 생활화 등을 통해 선진국가의 반열에 우뚝 설 수 있는 시대죠. 한국이 클래식 음악을 통해 선진 국가 반열에 우뚝 서기를 바라고, 저는 이를 위한 음악 전도사가 될 겁니다. 그것이 하늘이 내린 저의 일이니까요.”
지난해, <베토벤 바이러스>에 카메오로 출연한 것 역시 같은 맥락이다. 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연주 전집을 준비하며 신고의 날들을 보내고 있는 서혜경 교수의 2010년은 이미 호놀룰루 심포니, 러시아 상떼 페테스부르크 심포니, 독일 라이프찌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중국 상하이 필 투어 등으로 꽉 채워져 있다. 음악인생의 절정기에서도 여전히 꿈을 꾸고 있는 그의 삶이 피아노 선율만큼이나 아름다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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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연주를 꼭 들어 보고 싶네요~
몇년전에 모백화점의 문화센터에서 연주회를 보았습니다.
언제나 늘 항상 같은모습 보기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