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문화사회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을 말하다, 강대근 유네스코 국제이해교육원장

강연 정리_조성희(땡땡 편집부)

11월 11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지난 30여 년간 한국 유네스코에서 청소년 운동과 국제이해교육을 펼쳐온 강대근 유네스코 아시아태평양 국제이해교육원장이 ‘다문화 사회에서의 문화예술교육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이날 강연은 문화예술교육을 실천하는 이들이 갖춰야 할 인식과 태도에 대해서도 진지한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저는 유네스코에서 일한 30여 년 동안 청소년들과 동고동락을 해왔습니다. 한국에서의 청소년의 삶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는가가 저의 오랜 화두였습니다. 요즘은 아이들이 즐기고 있는 정보사회의 여러 가지 이기(利器)들을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며 생각이 어떻게 되는가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문화예술교육의 대상이 주로 청소년과 학교일 텐데

요, 오늘은 좀 더 근원적인 생각들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제안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겠습니다.

만남, 기쁨과 두려움
먼저 여러분과 만나 무엇을 이야기할까를 생각하다 ‘기쁨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떠올려 봤습니다. 만남에는 기쁨이 있고 두려움도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다른 문화를 만나거나 다른 생각을 가진 이를 만나는 것, 이 근원적인 관계 속에서 느끼는 것이 바로 두려움과 기쁨입니다. 또, 이 두 가지는 우리 일상 속에서 함께 하는 것이죠.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기쁨과 두려움의 내용은 우리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는 한 빠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떨 때 두려움을 느끼십니까? 어떨 때 기쁨을 느끼셨나요? 우리는 모두 기쁨을 위해 산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저는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저는 문화예술이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되었다고 봅니다. 그리고 다른 것에 대한 관심, 다름의 문화는 사실 두려움의 근원이 될 수도 있죠. 호기심에서 더 나아가면 두려움이 됩니다. 처음 가는 여행지, 처음 사람을 만났을 때 등과 같이 거기에는 두려움이 근원적으로 존재합니다. 그 만남의 결과가 나에게 어떤 기쁨을 가져다주는가? 라고 했을 때의 그 기쁨의 원인은 소통입니다. 내가 만나는 대상과 나의 소통이라고 보는 것이죠. 그 소통으로부터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하고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다
여러분은 문화예술교육 활동가, 매개자들입니다. 한국의 문화예술교육을 활성화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일을 하는 사람들이죠. 그렇다면 문화예술교육이란 무엇입니까? 과연 여러분은 문화예술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이 활성화시키려는 그런 교육을 받아본 적이 있습니까? 이때까지 학교를 다니는 동안 어떤 교육을 받아왔습니까? 어떤 문화예술교육을 받아왔습니까? 그것에 대한 자신의 체험이 없다면 어떻게 타인에게 그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이 받은 문화예술교육의 기쁨과 두려움의 경험이 없이 타인과의 만남에서 어떤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이야기의 주제로 잡은 다문화(multi-cultural society)라는 말은 사실 좀 애매합니다. 결국 문화가 여러 가지이며 서로 다르다는 이야기인데요. 여기 한 장의 종이를 여러분께 나눠드릴 테니, 이것을 가지고 다문화 이해 및 세계 문화 체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게임을 한번 해보기로 하지요. 이는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현상, 행동, 말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을 하게 되는 내 속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일단 나눠드린 종이를 4등분 해보세요.

여기 모인 분 가운데 한분을 제외하고 모두 십자형으로 4등분을 하셨고, 나머지 한분은 가로로 4등분을 하셨네요. 한국인을 모아놓고 4등분을 해서 접으라고 하면 똑같은 현상이 벌어집니다. 95%이상이 십자모양으로 4등분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왜 이렇게 접을까요? 이유가 있을까요? 이유가 없이 습관적으로 접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습관화하는 어떤 훈련들이 내게 있었다는 거죠. 내가 왜 이렇게 접게 되었는가? 추적을 해봐야하고 다른 방식으로 접은 이들과도 만나야 합니다.
현재는 종이 4등분의 정답이란 십자모양의 접기입니다. 가로로 4등분을 접은 것은 정답으로 쳐주지 않습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고 문화예술교육을 하는 이들에게 정답이란 과연 있는 것인가? 라고 묻고 싶습니다. 만약 정답이 있다고 생각을 한다면 문화예술교육은 안될 것입니다. 우리 삶에는 수많은 선택이 있는데 정답이란 있을 수 없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정답을 찾아 달려갑니다. 또, 우리의 아이들을 정답 찾기로 몰아넣기도 합니다.

‘다름’을 만난다는 것
그렇다면 우리가 다르다는 것, 다른 문화, 다른 나라와 만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는 무엇이 다르고 어떤 것이 다르냐 하는 우리의 감수성의 문제와 연결되는 것이겠죠. 조선 영․정조 시대의 실학자인 박제가의 <위인부령화(爲人賦嶺花)>라는 시조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붉다’는 한 글자만 가지고 毋將一紅子
눈앞의 온갖 꽃을 말하지 말라 泛稱滿眼花
꽃술에는 많고 적고 차이가 있거니 花鬚有多少
꼼꼼히 하나 하나 살펴봐야지 細心一看過

이 시는 정 민의 <한시미학산책>이라는 책에 소개된 한시인데요. 우리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해 혹은 사물에 대해서 열린 감수성을 갖고 봐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자 그럼, 게임을 한 가지 더 해보죠. 종이 위에 자기 이름을 쓰시고, 세상 보기를 해봅시다. 제가 1분을 드릴 테니, 이 공간 안에 있는 물건의 이름을 써보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옆에 계신 분과 본인이 쓴 것들을 비교해 보세요. 서로가 같이 본 것도 있을 것이고, 왜 같이 볼 수 있었는지도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본 것이 서로 다르기도 합니다. 시ㆍ공간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것을 본 것이고, 같은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지만 다른 것을 보고, 못 본 것도 있습니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보는가, 어떻게 내 눈에 보였는가 하는 것은 보이는 지점(view point)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에 따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세상을 보는 것은 결국 마음의 문제
그렇다면 여러분 앞에 사람이 나타나면 여러분은 어디를 보십니까? 가령 일본인을 만다면 어디를 보나요? 대부분 생김새부터 보신다고 하셨는데, 대개 우리는 모양을 보고 판단을 하려 합니다. 눈에 바로 보이는 것을 보고 판단을 한다는 얘기죠. 그러나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저는 근대 이후 인류가 즉물적인 것에 대해 훌륭한 업적을 만들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도 많죠. 듣는 능력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가령, 불교 경전인 금강경 첫 머리에 있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라는 말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뜻입니다. 성경과 비교를 해보죠. 성경에는 ‘신이 이렇게 말했다’ 고 적혀있습니다. 이러한 경전들이 생겼을 당시의 상황을 한번 떠올려 보세요. 당시에는 듣는 것 밖에 없었겠죠? 글로 써서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앉아서 말하면 듣는 것이 전부였을 겁니다. 그렇다면 문장이 짧고 쉬워야겠죠? 어렵고 긴 문장은 기억하기 어려울 테니까요. 그래서 초기 경전은 아주 짧고 아주 쉽습니다. 당시는 우리의 시청각 중에서 듣는 능력이 굉장히 발달해 있었어요. 지금에야 듣는 능력이 필요 없게 되었지만요. 왜냐하면 녹음기며 MP3와 같은 대신 들어주는 것들이 많으니까요. 또, 어디를 가게 되면 디지털 카메라로 무조건 찍어대는 일들도 흔하죠? 이 얘긴 그 곳에 가서 볼 것을 제대로 안 본다는 말과 같아요. 바로 눈앞에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만 계속 증대되고 있고요.

요즘은 세계화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여기서 ‘세계’라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세계란 본래 나 밖은 모두 세계이고, 좀 더 들어가면 안과 밖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그리고 내 일상과 관계 지으면 내 안과 내 바깥의 문제가 되죠. 인간이 내 안과 바깥을 구분하기 시작하고 바깥을 찾아나가는 과정에서 근대엔 타인(他人)을 발견했습니다. 농경사회에서 이 발견한 타인은 이웃이었고, 도시가 만들어지고 근대화되면서 익명의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산업사회가 대두되면서 타인은 불안의 요인이 되는 존재이자 우리를 더욱 패쇄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화라는 것을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내용을 다시 끄집어내야 하고 저는 이를 문화예술교육이 담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다음의 문장을 한번 보십시오.

마음에 없으면 들어도 들리지 않고 보아도 보이지 않고 먹어도 맛을 모른다.
心不在焉 廳而不聞 視而不見 食而不如味

유교경전인 <대학>에 나오는 이 말은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것도 결국은 마음의 문제죠. 마음이 열리기 위해서는 흔히 많이 보고 많이 들어야 한다고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우리 안에 형성된 보고 듣는 것의 기능이 자꾸 없어집니다. 읽고 이해하는 세대에서 요즘은 보고 느끼는 세대가 되었죠.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어떻게 보고 느낄까를 생각해 봅시다. 문화예술을 보고 느끼는 것을 통해 문화적 감수성이 키워집니다. 문화예술교육은 근본적으로 세상을 인식하는 문화적 감수성을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멀리 바라보기
사람들은 흔히 오늘날의 문제로 ‘변화’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사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변해온 것이 인류의 역사지만, 오늘날 변화 그 자체가 문제가 된 것은 바로 변화의 속도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우리 일상에 끼치는 영향 때문이죠. 어떤 변화는 일부에만 해당되지만 모든 이들에게 영향을 주는 변화도 있고, 또는 너무 빠르게 일어나는 변화 때문에 그것을 내면화할 시간조차 없기도 합니다. 그래서 변화 자체가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변화라는 것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변화를 이겨내는 것은 그 변화를 인식하는 우리의 태도의 문제입니다. 저는 차라리 변화 속에서 그것을 즐기라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즐기기 위해서는 멀리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를테면, KTX를 타면 달리는 동안 차장 밖의 풍경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 버립니다. 저 멀리,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옮기면 그것들은 눈에 잘 들어옵니다. 저 멀리 보는 것,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것이 상상력입니다. 지금의 삶에서 어떻게 상상력을 키울 수 있을까요? 여기에 시 한 수를 소개하겠습니다.

달 뜨면 오신다더니 朗云月出來
달 떠도 그대 오지 않으니 月出朗不來
아마도 그대 있는 곳 想應君在處
산이 높아 달도 늦게 뜨는가 山高月上遲

시적 상상력이란 엄청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스트레스와 삶에 찌든 우리의 일상을 벗어나게 하는 일이 무엇으로 가능할까를 생각해봅시다. 저는 가끔 우리가 대단히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다면 어떨까를 생각해 봅니다. 사실 제가 청소년들의 비행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할 때도 상상력 이야기를 하는데요. 아이들의 상상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기 행동이 이루어낼 다음 결과에 대한 상상력을 조금만이라도 가진다면 그것을 통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 행동이 가져올 어떤 결과에 대해서도 상상력이 없기에 무턱대고 행동을 하는 것이죠. 그래서 상상력이 필요한 것이고, 문화예술교육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극대화시켜주고 열어주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비판과 상상을 일구는 문화예술교육
흔히 오늘날의 사회를 지식정보화 사회라고 합니다.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 있는 그것이 다 지식은 아닙니다. 정보가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선택하는 자의 의도, 조합하는 능력 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선택하고 조합하는 능력을 누가 가르칩니까? 교사일까요? 아닙니다. 아이들이 스스로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저는 앞으로의 학교와 교사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교사는 가르치는 역할로만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사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가 아이들 앞에 널려있습니다. 정보를 찾고, 그것을 새로운 모양으로 가공할 수 있는 능력 즉 창의력이 필요합니다. 교사와 학교는 아이들에게 창의력을 길러주는 역할을 더해야 하는 것이죠. 이러한 창의력은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상상력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기 위한 필수적인 능력이고 아이들에게 이를 어떻게 함양시킬 수 있는가가 문화예술교육의 화두가 되겠지요.

우리가 학교 교육에서 배워온 것들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국민의 4대 의무, 조회시간마다 해온 줄서기, 40분 수업에 10분 휴식이라는 수업 일정, 일기쓰기 등과 같은 것들이 있지요. 이것들은 소위 근대의 권력 구조와 위계질서를 학습하고 체화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구조 속에 끝없이 훈련을 받고 길들여졌습니다. 이는 모든 나라의 공교육에서 실시되는 것들이죠. 근대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는데, 신이 죽고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국가입니다. 그런 역할을 현재도 하고 있죠. 그렇다면 학교가 과연 비판적 사고와 창조적 상상력을 키워줄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겠지요.
또, 우리는 학교에서 말하는 방법이며 질문하는 것에 대해 배우지 못했습니다. 소위 침묵의 문화가 널리 유포되고 우리는 거기에 길들여졌습니다. 소위 사회화, 문화화 한다는 것은 질문을 없애는 것을 뜻합니다. 익숙해지면 그것에 대한 질문이 없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타문화를 만나면 질문 없이는 이해가 불가능합니다. 질문을 한다는 것은 세계를 향해서 나를 열어 제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세계와 관계 맺기, 혹은 소통은 언어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19세기 독일의 언어학자인 훔볼트는 언어를 중간 세계, 즉 매개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언어를 통해 세상을 인식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 속에 획득되지 않은 언어 외의 다른 세계를 볼 수가 없다는 얘기도 됩니다. 그래서 다른 언어를 안다는 것은 다른 언어를 갖고 있는 이들과의 소통을 가능케 합니다. 그리고 언어를 통해 세계를 전혀 다르게 볼 수 있는 가능성도 열립니다.

문화예술교육으로의 일탈!
제가 근래 나왔던 책들 중에 주목을 했던 몇 권의 책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류시화 시인이 인디안 이야기를 묶어서 낸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프란츠 파농의 평전 <나는 내가 아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와 같은 책들인데요, 모두 나에 대한 질문, 나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죠. 그렇다면, 문화예술교육과 자기 정체성,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자기의 길을 어떻게 걸어가야 하는지를 생각해 봅시다.
문화예술교육이란 모두 미술가, 피아니스트를 만들자는 이야기는 아닐 것입니다.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기대하는 것은 그쪽 방면의 소질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거나 일반인들의 경우 평균적인 문화적인 삶의 질, 소양을 갖도록 하자는 것이겠지요. 저 역시 가끔 음악회, 전시회를 다니며 다양한 문화적인 경험을 해왔습니다. 저는 이것을 일상의 일탈이라고 보는데요. 일상을 벗어나는 기쁨이나 행복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아이들에게 일탈의 기쁨을 느껴보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일견 위험할 수도 있지만, 어떤 일탈적 생각이 없다면 새로운 문화도 생성되지 않습니다. 행동적 일탈이 아니라 기존의 어떤 것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 것이 문화예술교육을 통해 시도되고, 또 실험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께 소개하고 싶어 가져온 책들 중에 니체의 철학을 친절히 안내하는 고병권의 <니체, 1000개의 눈, 1000개의 길>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눈이 1000개면 길이 1000개라는 이야기입니다. 길은 수없이 많은데 우리 사회는 어떤 길로만 가라고 종용합니다. 오늘 제가 했던 이야기도 여기 모이신 분들께는 다 다르게 들렸을 겁니다.
마지막으로 여러분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있는 한 구절을 들려드리는 것으로 강연을 마치겠습니다.

“모든 좋은 것들은 웃는다. 어떤 사람이 정말로 자신의 길을 걷고 있는지는 그 걸음걸이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내가 걷는 것을 보라. 자신의 목표에 다가가는 자는 춤을 춘다.”

나는 왜 여기에 있는가? 나에게 주어진 일은 누구를 위해, 어떤 의미를 갖는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얼마나 즐기는가? 하는 것들을 가끔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문화예술교육자로서 일을 하는 보람이 있는 것이고, 여러분이 설정한 프로그램 속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