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상상할 여유를!

우리에게 상상할 여유를!

글_김상규(디자인미술관 큐레이터)

양재천 비가(悲歌)
몇 년 전 첫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를 맞추어 우리 식구는 남양주에서 강남구로 편입했다. 직장과 가깝다는 이유와 더불어 교육 문제에 당면하면서 전혀 상상치 못한 일을 한 것이다. 좁은 집이라도 강남구민으로 버티려면 주야로 일을 해야 했다. 양재천은 그 와중에 가끔씩 숨통을 틔우는 좋은 놀이터였다. 그러나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는 그것도 시들해졌다.
너구리가 양재천에 산다는 것을 밝혀내려는 이경규의 잠복근무가 몇 주 동안 이어지면서 결국 너구리의 근접촬영이 연출된 일, 그리고 타워팰리스가 들어선 일이다. 전자는 징검다리를 건너고 종이배를 띄우는 것으로 족한 곳을 무리하게 동물 서식지로 부풀리려 했던 미디어의 ‘오버’로 넘길 일이지만 후자는 심각한 면이 있었다. 한강변의 아파트 사열을 축소한 듯한 이미지이긴 했지만 양재천 주변에는 대체로 낡고 고만고만한 아파트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배트맨>의 ‘고담시’를 연상케 하는 무지막지한 덩치를 가진 놈이 불뚝 솟아버린 것이다. 이 또한 상상치 못한 일이었다. 설상가상으로 한 중년 여성이 양재천에서 조깅을 하다가 한 재력가와 결합하게 된 로맨스가 보도된 이후로는 랜드스케이프의 균형도 깨어지고 불순한 상상력이 동원되는 그 곳이 내겐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은 곳이 되었다.

양재천에서 바라본 타워팰리스

상상력은 무임승차권?
창의력과 상상력이란 말을 들으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것을 날로 먹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다들 만원버스에 매달려 출근하는데 이를 비웃던 한 남자가 때마침 내려온 전용 케이블카를 혼자서 우아하게 타는 광고가 있다. 이 남자에게서 떠올려지는 상대적 특권 같은 것, 또는 언젠가 타워팰리스에서 살 수 있을 것이라 꿈꾸는 아이들과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양재천을 달리는 어떤 이들의 신분상승 기대랄까 뭐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상상력이 갖는 의미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미 매체에서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 그 상상의 이미지는 잘 먹고 잘 사는 모습이었다는 말이다. 신생 대학들의 광고에서 ‘끼’와 ‘개성’이라는 이름 아래 천편일률적으로 트렌디한 모습을 부각시키고 전통 없음을 감추는 전략으로 상상력의 개념을 남발한다. 상상력이 진통제처럼 현실 지각력을 떨어뜨리거나 무임승차할 묘책처럼 인식되는 것은 정작 사람들이, 특히 아이들이 상상하기 전에 부적절한 정보에 많이 노출되고 새로운 것을 꿈꿀 여유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상상은 권력을 손쉽게 얻기보다는 기득권을 포기해야 하는 원인으로 더 많이 작용한다. 진중권의 상상력 프로젝트들에 소개된 이들도 관습의 벽에 부딪히면서 실험을 해왔다. 고독하게 죽어간 발명가들의 극단적인 예처럼 가학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큼 상상력은 저항을 불러올 수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18세기에 자크 드로가 만든 글 쓰는 자동인형.
스페인에서 전시했을 때 종교재판소가 이단으로 기소하여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현실을 넘어서
상상력은 현재 모습과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이므로 현실 극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역사적 아방가르드들의 꿈도 결국은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하여 더 나은 세계로 유토피아를 상정했던 것이다.
현실에 너무 짓눌려서 그 이상을 생각지 않으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상상을 마치 현실과 대립된 개념처럼 무시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사실 SF 영화의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한 상상도 현실성을 염두에 두고 있으면서 미래 예측의 성향을 보인다. 관객이 그 가능성에 공감할 수 없으면 외면당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게임처럼 현실의 극복이 아닌 도피로 와전되어 전혀 다른 세계를 구현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어떤 판타지를 동원하든 영상으로 표출되는 디지털의 이미지는 사물에 대한 정확한 지식 없이는 구현되기 힘들다.
영국의 건축가 그룹인 ‘아키그램(ARCHIGRAM)’은 1960년대에 건축이라는 주제로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한다. 식물처럼 계속 자라나는(확장할 수 있는) 건물이라든지 통신기술을 이용하여 어디든지 옮겨 다니는 집을 비롯해서 심지어는 도시 전체가 지구를 돌아다니는 아이디어를 내놓기도 했다. 물론 실현되기 어려운 아이디어였지만 스케치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도면까지 제시하면서 나름의 논리를 폈다. 이러한 접근은 달 착륙을 전후로 우주여행에 대한 열광과 팝 문화의 상상력도 작용했지만 당시의 영국 주택 정책이 낳은 열악하고 획일적인 주거 환경에 대한 비판이 깔려 있다.
이러한 비판적 상상력은 현실을 직시하는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서 생각을 나누는 과정도 필요하다. 거칠 것 없는 상상을 하는 자유와 그것을 표현할 능력도 있어야 하고 실제 세계 또는 동시대의 사람들과 갖는 관계성을 인식할 감각도 필요한 것이다.

아키그램의 <워킹 시티(Walking City)>의 개념을 보여주는 이미지 작업. 1964년 피터 쿡(Peter Cook)작.

자발적인 실험 또는 강요
그러나 정작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상상할 여유’이다. 물론 상상력이라는 것이 시간을 정해서 훈련받는 특정한 기술은 아니다. 그것은 능력이기 이전에 접근방법이고 태도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 다른 면을 돌아보고 생각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러자면 생각할 시간이 있어야 하는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늘 급하게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럴 겨를이 없다.
아키그램을 비롯하여 멤피스(Memphis) 그룹과 같은 실험적 집단이 활동하게 된 시기는 경제적 상황이 그리 좋지 못하고 일거리도 별로 없을 때였다. 누가 의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계획하여 만들어내는 프로젝트를 생각하게 되었으니 한량들이 모여서 작당한 결과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렇지만 작당했던 그 실험들은 그 후 이들의 활동에 있어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을 뿐 아니라 미술과 디자인, 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다. 한국의 디자인계를 보더라도 올림픽과 엑스포 등의 디자인특수가 끝난 1990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자발적인 사회 참여와 문화 활동이 한층 활발해졌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에 언급한 예들은 먼 길을 돌아 고민의 과정을 거친 몇 가지 특수한 경우이다. 국가와 기업이 나서서 창의력을 강조하고 교육에 많은 재원을 투자하며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따른 사회적 조건의 변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오늘의 상황에서는 상상력을 자극할 요소가 훨씬 많을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상상할 자유가 억압되거나 기회를 놓칠 수도 있다. 예컨대 몇 장의 일러스트레이션과 글로서 접하던 내용이 실제보다 더 실감나는 시각 매체들을 통해서 일시에 뿌려지고 있는데, 이는 문화 콘텐츠 생산자와 산업의 성과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이다.
창의적이어야 함을 새로운 덕목으로 내거는 사회적 분위기에 따라 결과를 너무 의식한 나머지 생산의 측면에 치중하게 된 것 같다. 상상력의 문제를 대안으로 내세우더라도 이런 분위기에서는 사람들에게 상상을 ‘강요하게’ 될 우려가 있다. 창의력 문제와 마찬가지로 국가경쟁력이나 개인의 안정된 미래를 담보로 강요된 상상력이라면 본질을 잃게 된다. 창의력이 산업화된 이 시점에서 대치동에 상상력을 키워주는 학원이 생기리라는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버크민스터 퓰러가 제안한 주택의 욕실 부분.
위생과 공기조절 시스템을 갖춘 전천후 주택을 계획했다.

상상해 봐
폴 비릴리오(Paul Virilio)에 따르면, 상상력의 세계는 ‘어린아이의 세계로 회귀하려는 성숙한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초록빛 낙원’이라지만 무거운 책가방을 메고 빡빡한 시간표대로 움직이는 학생들을 보면 어불성설이다. 상상력이 중요하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고 그 사례도 수없이 많다. 그러나 막연히 상상해보라고 할 수 있을까? 사회 전체 아니 최소한 가정이나 교육기관 같은 작은 집단에서라도 상상할 자유와 여유가 허락되지 않고서 개인에게만 권유할 수 있을까?
2005년 11월까지 한국의 언론과 대중은 생명윤리와 인권에 대한 문제를 뒤로한 채 생명에 대한 무한한 상상을 너무도 성급하게 했다. 그것은 황우석이라는 한 개인에게 의존하고 재촉한 광기어린 집단행동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서로 다른 이득을 염두에 둔 집단들이 연구의 성과에 집착한 욕망이 빚어낸 결과를 참담하게 지켜보고 있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창의적이어야 하거나 상상력을 갖추는 것이 아니다. 개인이 더 잘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도 아니다. 21세기의 패러다임까지 가지 않더라도, 또 깜짝 놀랄만한 일을 터뜨리지 않더라도 당대의 기술적 조건에 함몰되지 않고 자율적인 판단과 사고를 할 수 있는 개인, 그리고 정형화된 틀을 넘어서는 그 개인들의 생각이 통용되고 그들을 인내심을 갖고서 지켜봐주는 공동체에 대한 희망으로서 상상력이 언급되어야 할 것 같다. 어쩌면 어떤 개념이 도출되어도 결국 그것이 목적론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는 지금의 상황 자체가 상상력의 필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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