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교육은 ‘생활의 발견’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 – 김찬호 한양대 교수

강연정리_조성희(웹진땡땡 편집부)

공동체와 청소년 대안교육의 현장을 두루 오가며 의미 있는 저작들을 선보여온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김찬호 교수가 12월 16일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문화교육의 방향 전환-과시에서 소통으로’ 라는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삶과 일상에 기반한 상상력을 복원하는 문화예술교육의 다채로운 사례들을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김찬호 교수

먼저 여러분이 어떤 미적인 체험을 갖고 계시는지 궁금하네요. 외부의 특별한 영역을 생각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어떤 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갈망을 갖게 했나를 생각해봅시다. 인간은 본능처럼 아름다움을 추구하지요.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시대에 따라 다르지만,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열망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것 같습니다.
제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 이야기입니다. 훈련소에 입소해 훈련을 받다가 3주 만에 교회를 갔습니다. 교회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듣고 꽃을 봤는데 새삼 감동스럽더군요. 또 면회 온 친구의 분홍색 와이셔츠를 보고 그 색채가 너무 아름답고 신기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 전에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경험하던 감각이 새롭게 일깨워지는 계기였어요.
영화 <쇼생크 탈출>을 보면서 누구나 인상 깊게 기억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간수실 문을 닫고 음악을 틀자 교도소에 있던 모두가 확성기를 바라보며 음악을 듣는 장면이죠. 그 장면에는 ‘우리 모두가 거기서 자유로움을 느꼈다. 몸은 갇혀있지만 우리는 새처럼 자유로워졌다’ 고 하는 나레이션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이 인간에게는 자연스럽고 본능 같은 것인데, 우리는 왜 새삼스럽게 문화예술교육을 할까요?

예술교육의 과잉과 부작용
한국은 사실 예술 교육을 많이 하는 곳입니다. 몇 가지 통계를 봐도 알 수 있는데, IMF 이전에 예술분야의 외국유학생이 세계 3위였다고 합니다. 동네마다 미술, 피아노 학원이 있고 거기에 쏟아져 들어가는 돈들도 대단하죠. 문화예술을 가르치는 데 들어가는 교육비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그에 대응하는 풍요로운 문화예술을 누리는가를 따지면 모순이 느껴집니다. 상식적으로 예술교육을 많이 받으면 문화생활을 많이 누려야 하는데, 한국에선 그 상관성이 나타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일례로 피아노를 배우는 아이들의 목표는 프로 혹은 스타 피아니스트가 되고자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그렇게 될 수는 없고 뛰어난 경우가 아니면 포기도 하죠. 그러면서 피아노에 대한 모든 관심을 잃어버리고 피아노 연주자를 보면 자기가 지워버린 꿈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고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예술교육은 궁극적으로 과잉이라고 할 수 있어요. 예를 들어 디자이너가 1년에 3만 명이나 배출이 되지만, 그들이 고용될 수 있는 시장은 비좁습니다. 예술 관련 학과들의 경우 대부분 비슷한 상황이죠. 그 동안은 그런 교육체제가 꾸준히 유지가 되어 왔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 구조가 유지될 수는 없겠죠. 예술가들도 먹고 사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잖아요. 제 수업을 들었던 무용학과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자신들의 미래를 굉장히 우울하게 생각하고 있더군요. 졸업 후의 진로가 굉장히 한정적이기 때문이죠. 저는 이제는 무용학과 등에서 전공자에게뿐만 아니라 일반인들과 눈을 맞추는 시도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무용학과 교수들이 일반 학생들에게 감상법 등을 가르치면서 저변을 확대해야 하고요. 사실 우리도 학교를 다니면서 그렇게 많은 교육을 받았지만 예술에 대한 리터러시나 경험이 없어 공연장이나 전람회장에서 위축되기도 하죠. 우리가 문화의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하지만 소위 말하는 고급문화의 현장에서 문화를 전혀 향유하지 못하고 있기도 합니다. 예술의 장벽을 걷어내는 것이 지금 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삶의 보람을 만들어갈 수 있는 촉매재
이제는 연주자에서 관객을 만들어내는 교육으로 가야 합니다. 자기 생활 속에서 예술을 즐기고 안목과 감성을 키울 수 있는 쪽으로 말입니다. 지금까지는 예술가를 키워내는 쪽이 비대해져 있고 그 영역이 과잉이죠. 나머지 영역은 방치되어 있는 형국입니다. 또한 문제는 두 그룹 사이의 공감대가 없다는 것인데요. 예컨대, 지역의 문화센터나 문화회관에서 공연을 한다고 하면 그것을 보기 위해 관객이 몇 명이나 올까요? 조수미나 백건우의 공연에는 사람들이 몰리는데 말입니다. 그런 점도 한번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할 문제겠죠.

문화와 예술을 경제와 관련 지어 생각해 봅시다. 지금까지 고도성장의 길을 걸어오던 우리 사회가 IMF 이후 저성장시대로 접어들게 되었죠. 경제는 꾸준하게 성장 중이지만 고용창출이 안되고 있는 상황이죠. 일자리가 없으니 토목 사업만 계속해서 벌이고 있습니다. 이는 다른 부가가치 생산 방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이 다음 세대까지 이어져서는 안 될 겁니다.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고 그것이 하나의 경제적인 가치로서 생산되고 소비되는 영역이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나 고용의 측면에서 볼 때 예술의 가치가 부각됩니다. 또, 생활의 면에서 보자면, 그 효과가 중요해집니다. 우리는 이제 점점 노동하지 않는 시간이 많아지고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었습니다. 연금이나 경제적인 것뿐 아니라 노후의 긴 시간을 어떻게 채울 것인가가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가야 하는가는 주 5일제가 정착되면서 오히려 더 가족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점에서도 시사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 동안 가족문화를 만들어 가는 것에 익숙치 않았고, 구성원 간에 공유된 문화가 없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나온 게 아닐까요? 핵심은 삶의 보람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일 텐데 이점에서 문화예술이 크게 기여를 할 수 있다는 것이죠.

대부분의 시간을 생산에 집중하고 완전고용이 거의 이루어졌던 시대, 먹고 살기 바빴던 때에는 문화가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변했지요. 경제는 어려워졌지만 문화의 시대는 도래했습니다. 대기업에 고용된 디자이너의 숫자들을 봐도 문화의 영역들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중요하다는 인식이 일반화되었고 그런 점에 많이 주목을 하고 있지요. 문화적인 생산 능력을 가진 사람을 많이 키워내야 합니다. 이는 고용 문제에도 실마리를 던져줄 수 있을 겁니다.
예전 세대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술의 영역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에 대한 수요가 있어야겠지요. 유명한 연주가나 아티스트는 아니어도, 각자 자기의 지역사회에서 직업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문화에 대한 향유능력을 갖고 있는 풍부한 관객층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들의 공연과 작품을 감상할 줄 알고 또한 그 예술가들이 가르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겠지요. 

예술과 대중 사이
우리 사회는 전문가와 일반인 사이의 언어의 벽이 너무 큽니다. 예술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그런 것 같습니다. 그 접점을 찾아야 해요. 인문사회학의 위기를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왜 대중과 소통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지 못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 책임은 인문사회학자들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예술가들도 왜 자신의 예술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냐는 것입니다. 그런 교육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죠. 교육과정 중에 그런 것이 없거든요.

대학에서조차 전인교육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위계와 서열에 후학들을 묶어놓는 모습을 많이 봐왔습니다. 또, ‘순수와 대중문화’ 라는 이분법으로 예술의 경계를 그어놓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술적 재능을 갖고 있는 전공학생들에게 그 능력을 어떤 식으로든 펼치게 해주어야 하고, 다른 활동과 연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그런 활동이며 기반이 약한 편이죠. 예술은 생활 곳곳에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것에서 가치를 살릴 수 있는데 이것을 순수라는 이름으로 무대나 갤러리라는 영역에 묶어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문화예술 인력들이 어떻게 하면 삶의 여러 현장에서 결합할 수 있을까를 고민해봐야 합니다. 예술은 창조와 상상력이잖아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기창조성을 개발하고 자기가 하는 일을 보다 매력적으로 디자인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문화예술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문화’교육이라고 말은 하지만 한국에서는 교육 자체가 반문화적입니다. 교사 문화가 경직되어 있고 교무실의 위계서열이 너무나 분명하다 보니 항상 눈치를 보거나, 스스로를 열지 못하는 교사들이 많아요. 교사 스스로가 즐길 수 있어야만 교실이 문화공간이 되는데 말이지요. 교사 안에서 기쁨이 우러나오지 않으면 아이들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학교가 어디보다도 표현이 억압된 곳이고, 교사가 누구보다도 경직되어 있어요. 항상 윗사람으로 있다 보니까 편안한 몸짓이 나올 수가 없지요.

예술은 멈춰 서서 다시 한번 보게 하는 것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해지려고 하지요. 그런데 행복은 결국 상상에서 온다고 봅니다. 상상력만 있으면 달빛이나 꽃 향기 같이 작은 것에서도 큰 기쁨을 느끼고 지친 심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인간이에요. 지금 말하는 상상력이라는 것은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걸 보면서도 그 안에서 다른 것을 캐내는 능력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닌 평범함,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지요. 지금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상상력이라는 큰 힘을 잊고 살아왔어요. 그걸 복원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생활의 발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 내가 살고 있구나, 하는. 평범한 삶인데, 거기서 놀라움을 발견하는 것이죠. 쉬운 일인 것 같지만 나름대로 수련이나 경험이 있어야 해요. 예술이 그런 경험을 만들어줄 수 있겠지요. 예술은 멈춰 서서 다시 한 번 보게 하는 것, 몰입하고, 새롭게 보게 하는 것이니까요.

한국 사람들은 자존심이 잘 상하는데, 그건 자존감이 약해서 그렇습니다. 자존감이 낮은 이유는 자기와의 대화가 없어서 그렇고. 특히 남자들이 그래요. 나이 들어서 직장 그만두면 초라해지지요. 돈이 있고 없고에 상관없이 생활 자체가 궁핍해집니다. 내면의 의미자원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거예요. 학생들을 봐도 그렇습니다. 끊임없이 문자메시지를 날리죠. 휴대폰 없으면 불안해하고. 이렇게 소통을 많이 하는 나라가 또 없습니다. 휴대폰 통화시간이 세계 최고라고 하니까요. 그런데도 끊임없이 외로워하잖아요. 접속을 해야만 존재하는 시대라고나 할까요. 왜 그렇게 소통에 대해 의존적인가를 생각해보면, 넉넉히 자기와 대화할 공간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아요. 오히려 그런 빈 소통이 아니라 자기 내면을 다지는 쪽으로 시간을 쏟으면 소통이 훨씬 즐거워질 텐데 말이지요. 이런 이야기는 학생들이 쓴 글에서 더 절실하게 나타나는데, 끊임없이 모임을 만들고 만나고 해도 비어있는 자기 모습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어요. 그 비어있는 자신을 다시 채우려면 시간을 들여야 되고 연마를 해야 되는데 해본 적이 없으니까 힘들지요. 그게 비극인 것 같아요. 엄청난 돈을 들여도 그걸 채워주지 못하니까요.

예술특목 중학교에 특강을 하러 갔다가 아이들이 굉장히 삭막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부모들은 이미 너무나 많은 돈을 투자했고, 아이들이 갈 길은 정해져 있으니까 거기에 모든 걸 걸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지요. 몇 천만 원짜리 악기를 사줬는데 제대로 안 하면 가만히 놔두겠어요? 특히 음악은 20대 이전에 두각을 나타내지 않으면 그 뒤로는 힘들다더군요. 그러니까 어린 나이부터 가파른 경쟁을 하는 거예요. 하지만 피아노 학원 선생님 하면서도 그걸 예술행위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대에 서지 못하는 대신 하는 돈벌이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지요.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소년은 아버지의 강요로 권투를 하는데, 아버지 몰래 발레를 배우기 시작하지요. 그런데 본격적으로 발레를 배우기로 하고 선생님과 아이가 처음 대화하는 장면이 인상적입니다. 그 발레 선생님이 ‘너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가져오라고 하거든요. 그 소년의 삶, 사연,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알아야 소년을 가르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게 참 부러웠어요. 만약에 한국에서, 피아노 학원에서 학생을 처음 만났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하고, 음악에 대한 느낌을 주고받고 할 수 있으면 얼마나 멋질까요. 가르치는 사람이나 부모, 학생 모두 예술에 대한 생각을 고쳐먹지 않으면 안됩니다.

자유로움과 상상력이 함께 하도록
대안학교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사회에 있는 자원을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입니다. 대안학교는 제도권에서 벗어나있기 때문에 금기라든가 기득권 같은 것이 없습니다. 일반 학교의 경우 외부에서 들어가서 뭔가 하겠다고 하면 여기저기에서 반대하지만, 대안학교는 일단 자원이 부족하니까 그런 일이 없지요. 그리고 사실은, 갈수록 교사들이 학생들을 충족시킬 수 있는 것들이 줄어들어요. 사회에서 요구하는 것도 많아지고 있고, 아이들도 보고 듣는 게 많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성이 안 차는 시대가 되었지요. 학교 바깥에 있는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를 연구해야 합니다.
용산에 한 학급도 안 될 규모의 아주 작은 학교가 있는데 악기가 없어요. 그래서 오르간도 피아노도 없이 음악 수업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생각한 것이 아카펠라였습니다. 인터넷에서 찾은 아카펠라 동호회 여러 곳에 이메일을 보내서 자원봉사자를 찾았죠. 물론 그 봉사자는 아마추어지만 자기 재능을 이런 일에 쓸 수 있다는 것은 서로 좋은 일이잖아요. 반면 문화예술전문가들이 교육하는 예를 보면, 예술가로서의 재능과 교육자로서의 자세가 적절하게 배합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자기 작업에 몰입하는 분은 애를 잘 안 봐요. 그런데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예술교육은 폼나게 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가르치기 전에 먼저 아이들하고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밥도 사줘야 되고 문자메시지도 주고받아야 돼요. 그런데 그게 예술가 이미지랑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자기 세계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자기가 변하지 않고 아이들에게 일방적으로 즐기라고 하는 거지요. 말하자면 교육이라는 코드가 없습니다.

교육이라는 코드가 없다는 건 예술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교육열은 아주 높은데 교육적인 유전자가 없는 경우가 많이 보이거든요. 얼마 전에 지하철에서 박물관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가족을 봤어요. 아이는 박물관에서 본 걸 안내책자에서 다시 찾아보고 있는데, 부모는 아이한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군요. 소통의 코드가 너무 없으니까요. 새로 연 국립박물관에 갔더니 군인들 한 중대가 떼거지로 왔더군요. 발상은 좋은데 태도가 안 되어 있다고나 할까요.
부모들이 전시회에 아이를 데려가서 그림은 보지 않고 제목부터 읽게 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우리 교육이 배움 없이 평가만 의식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지지요. 사실 평가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아이가 이 그림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가는 평가하기 힘든 부분이잖아요. 대신 제목을 읽는 정확도나 속도는 평가하기 쉽지요. 아이가 글을 쓰면 부모는 대개 맞춤법부터 살펴봅니다. 뭘 썼는지, 무슨 얘기를 하고자 하는지는 느끼지 않아요. 친구랑 싸운 이야기를 썼다고 하면, 먼저 같이 느끼고, 부모의 경험도 이야기하고 해야 하는데. 답을 말해주는 게 아니라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것 자체가 중요하거든요. 아이의 글을 받아 들고 글씨 잘못 쓴 것부터 지적하면,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너 이에 고춧가루 꼈다’ 하는 거나 마찬가지지요.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이거 하나 변하는 게 참 힘들어요. 관계의 틀이 고착되어있다 보니까 열린 흐름으로 사람을 만나는 것 힘들고 다 사물화되어 있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 하시는 일은 자유로움과 상상력이 시너지효과를 일으키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물론 어쩔 수 없이 관리화되는 측면이 있지요. 하기 싫은 일을 해야만 하고. 그런데 ‘내가 하는 일 중에서 몇 퍼센트는 하기 싫지만 즐겁게 받아들이고, 20 퍼센트 정도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식으로 스스로 정하면 좋겠어요. 그럴 수 있으면 엄청난 생산성이 나올 거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