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민운기(스페이스 빔 디렉터, 미술가)
결론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소수자’는 문화예술교육의 수혜를 받을 대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지향해야 할 궁극적 지점이라고. 그리고 ‘소수자’는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알게 모르게 그렇게 되거나 누군가를 그렇게 만들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나아가 ‘소수자’라는 명칭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당사자들이 아니라 ‘다수자’라고. 따라서 ‘소수자’ 관련 문화예술교육은 ‘다수자’들을 상대로 해야 하는 것이라고.
‘소수자’와 ‘소외자’
현재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문화예술교육이 기존의 예술교육과 차별화를 내세우는 점 중의 하나는 교육대상 개개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미 만들어진 예술적 성과물을 다수에게 일률적으로 적용하고 따라오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독자적 특성과 가치, 역능 등을 재발견하고 그것들이 상호 존중되면서 지속 가능한 공동체 사회를 만들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데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개개인에 대한 파악이 보다 신중하고 정교해야 제대로 된 접근이 가능하고 원하는 성과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소수자’에 대한 접근은 우리의 문화예술교육의 현재를 진단하고 향후의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일 수 있다. 위에서 결론을 먼저 내린 이유도 그 만큼 ‘소수자’에 대한 개념 파악과 이에 대한 합의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필자 나름의 진단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소수자’와 ‘소외자’를 구분하지 못하다보니, ‘소외자’를 ‘소수자’로 규정지으며 ‘소외자’ 안에 있는 ‘다수자’의 논리를 보지 못하고 ‘소외자 교육’을 하며 ‘소수자 교육’을 독점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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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예술치유 시범사업 중 결혼여성이민자 대상 미술치유 프로그램 중에서 |
내 안의 ‘다수성’
말이 나온 김에 정리를 하고 넘어가자면 ‘소수자’라는 것은 ‘다수자’와는 다른 이념이나 가치 혹은 신체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고, ‘소외자’는 ‘다수자’가 지닌 그것들로 인해 피해를 보거나 불합리한 대접을 받는 사람 내지는 제(諸) 존재를 지칭한다고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사실은 ‘소수자’는 ‘소외자’가 될 수 있지만 ‘소외자’가 꼭 ‘소수자’는 아니라는 점이다. 즉 ‘소외자’의 경우에도 ‘다수자’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소수자’의 경우에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소수자’가 되어 ‘소외’를 당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자발적 소수자’를 자처하며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 ‘다수자를 소외시켰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표현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소수자’이든 ‘소외자’이든 모두가 ‘다수자’의 논리로 인해 생겨났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의 지향은 모두가 ‘소수자’가 되면서 ‘다수자’의 논리에 대항해야 한다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소외자’가 발생하지 않게끔 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소수자’와 ‘다수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즉 한 개인 안에 두 가지의 성향, 이른 바 ‘소수성’과 ‘다수성’이 일정 비율로 다르게 나타나면서 개인 간의 차이가 다양한 스펙트럼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결국 문화예술교육의 주된 대상은 ‘소수자’도 아니고 ‘다수자’도 아닌, ‘다수성’에 길들여진 모든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방법은 개인 안에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는 ‘다수성’을 발견하고 넘어서도록 하는 것이다. 동시에 그 개인만이 지닌 남다른 특성을 더 이상 ‘소수성’이란 이름으로 구분 짓지 말고 그 자체로 이해하고 존중해주는 가운데 제 존재와의 원활한 소통과 교감을 이룰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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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하는 밀머리 미술학교의 <따뜻한 왼손> |
다수성의 실체
이쯤에서 ‘다수성’의 실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다수성’은 한 마디로 세상의 한 ‘부분’에 불과한 특정의 존재가 권력을 획득하여 자신의 주관적 관점을 객관화의 탈을 쓰고 나머지 다수에게 강요하는 데 문제가 있다. 이를테면 서구사회에 있어서 ‘인간’ 중심의 사고는 ‘자연’을 분석과 개발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나머지 황폐화시켰으며, ‘이성’ 중심의 사고는 개인이 지닌 ‘감성’을 저급한 것으로 취급했고, ‘나’ 중심의 사고는 ‘타자’를 계몽과 설득의 대상으로만 다가서게 했다. 또한 ‘서구’ 중심의 세계는 ‘제3세계’를 미개한 사회로 보았고, ‘남성’ 중심의 세계는 ‘여성’을 성적 대상화 내지는 수동적 존재로 격하시켰으며, ‘백인’ 중심의 세계는 ‘유색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여겼다. 그 외에도 ‘이성애자’들은 ‘동성애자’를 ‘비장애인’들은 ‘장애인’을 왜곡된 눈길로 바라보고 있으며, ‘오른손잡이’는 ‘왼손잡이’의 불편함을 잘 모른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이와 같이 특정 시대, 특정 부류에 의해 만들어졌거나 만들어지고 있는 제 관념과 사고가 뒤섞인 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다수성’을 생각처럼 쉽사리 발견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이는 알게 모르게 다양한 방법과 장치, 루트를 통해 우리들 삶의 미세한 지점에까지 침투해오며 ‘소수자’로서의 우리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길들이며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교육이 그렇고, 우리가 사는 공간(의 구획과 배치, 모양)이 그렇고, 우리가 접하는 각종의 (대중)매체가 그렇고, 거기에서 드러나는 이미지가 그렇고, 사운드가 그렇다. 그러다 보니 ‘다수성’은 오히려 나의 욕망이 되어 내가 나를 소외시키고, 주변의 모든 존재를 ‘다수자’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며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게 된다. 그렇다면 이를 어떻게 발견하고 넘어설 수 있을까?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은 ‘나’를 의심하는 데서 가능하다고 본다. 즉 나의 감각을 나의 욕망을 나의 사고와 관념을 나의 행위와 일상을 의심하는 데서 ‘진정한 나’ ‘새로운 나’를 발견할 수 있으며, 그것이 가능할 때 나를 둘러싼, 혹은 나와 관계하는 요소들과 존재를 가감 없이 제대로 이해하고 바라보며 교감할 수 있게 된다. 즉 자연, 감성, 타자, 제3세계, 여성, 유색인종, 동성애자, 왼손잡이, 장애인 등등을 ‘그 자체’로 만나는 것이다. ‘소수성’은 바로 이러한 노력 속에서 재발견되거나 새롭게 태어난다.
그러나 문제는 이 또한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대개 자신의 감각에 익숙하고 편안한 요소들만을 취하고자 하며, 자신의 감각기관을 통해 들어오는 온갖 정보와 질료들을 기존의 인식체계로 분류하고 재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방법이 없는 것일까?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단한 용기와 실험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신의 인식체계가 발동할 틈을 주지 않는 가운데 무언가 생소하고도 이질적인 국면에 자신을 던져놓음으로써 자신이 지닌 감각을 새롭게 발동시키며 기존의 인식체계를 뒤흔드는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일상적으로 마주하는 대상이나 표상에서 갖게 되는 ‘쾌ㆍ불쾌’의 감정이 뒤바뀜을 경험하고 거기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체험하는데, 칸트(I. Kant)는 이를 ‘숭고’라고 한다.
문화예술교육은 바로 그 대상들로 하여금 적절한 장치와 방법을 동원하여 이러한 체험이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자신과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됨으로써 ‘다수자’의 시각에서 벗어나게 되는 해방감과, 그러한 결과 드러나는 여러 주체들과의 존재론적 교감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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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예술치유 시범사업 중 탈성매매여성 대상 미술치유 프로그램 중에서 |
그래도 ‘소수자’ 또는 ‘소외자’ 교육이 필요하다면
‘소수자’ 관련 문화예술교육에 있어서 그 대상을 ‘다수자’, 보다 정확히 말하면 ‘특정 부분에 있어서 다수성의 소유자’에게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이 때문이다. 나 또한 스스로 내 안의 ‘다수성’과, 나를 그렇게 만든 혹은 만들고 있는 외부적 장치와 기제들을 찾아내고 극복하는 과정을 겪어 왔다. 그 과정에서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남자’가 아닌 ‘이성애자’ 등등이 아닌 그리고 최근에는 모든 것을 돈의 논리로 환산하는 ‘경제적 이성주의자’가 아닌, 하나의 생명체로서 자신의 존재를 새롭게 인식할 수 있었고 세상과 소통하려고 노력 중이다. 물론 아직 남은 것들이 더 많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소수자(‘자발적 소수자’를 제외한)’나 ‘소외자’ 관련 교육이 필요 없다는 쪽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바라는 바가 아니다. ‘소수자’의 경우 ‘다수자’의 논리를 막는 방패 역할을 하는 수준에서 여전히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이 꼭 ‘교육’의 형태여야 될지 그리고 과연 누구를 염두에 둔 것일지는 더 생각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소외자’의 경우에는 개개인에 따라 그 영역을 보다 정확히 할 필요가 있다. 잘못하면 ‘다수자’의 시각에서 엉뚱하게 접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경제적인 ‘소외’ 상황에 놓여있는 경우라도 정신적으로 충만한 분들이 있는가 하면 자본, 즉 ‘다수성’에 대한 욕망으로 정서적 고갈 상태를 보이는 분들이 있다. 신체적인 ‘소외’ 상황에 놓여있는 경우에도 낙천적인 사고의 소유자가 있는가 하면 비관적인 소유자가 있다. 그럴 경우 접근을 달리해야 하는데, 특정의 기준 하나를 내세워 자의적으로 단정 짓고 일방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위험하다. 이와 관련하여 한 지역 일간지에 실린 글을 소개한다.
“흔히 우리는 소외계층에 대해, 그들이 경제적으로 열악하여 문화적으로도 열악하리라는 가정 속에서 수동적이고 힘없는 존재로 인식하는 편견이 있다. 물론 소외의 여건은 경제적인 것만이 아니라, 지리적인 소외, 정신적 소외, 신체적 소외 등의 여러 요소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소외계층이라면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으로부터 접근권을 제공받아야 한다는 수혜적 대상으로 이해하게 된다. 그들에 대해 문화예술교육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는 식의 봉사적 의미에 따른 접근이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신의, 인천일보(2005년 11월 17일)
따라서 ‘소외자’ 관련 교육은 어떤 부분에 대한 ‘소외’인지를 잘 살펴 자기 안에 들어와 그 자신을 힘들게 하는 ‘다수성’을 발견하고 넘어서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도록 함으로써 어떤 치유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소외자’ 교육 역시 ‘다수자’ 교육인 것이다. 그러나 이 또한 ‘다수자’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그 성과에 있어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소수자’나 ‘소외자’나 모두 ‘다수자’로 인해 발생하고 고통을 겪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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