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ㅣ 송보림 (미국통신원,brs77@columbia.edu)
* 이 글은www.missyusa.com의 칼럼 ‘엄마랑 배우는 박물관’ 2005년 11월 1일자 글의 내용에 바탕하고 있다.
세계 현대미술의 중심지라 일컬어지는 미국 뉴욕의 첼시지역에 자리 잡은 디아 아트센터(Dia Art Center) 는 그동안 미술계 종사자뿐만 아니라 많은 관광객들을 위한 명소로 자리매김해 왔다. 이 맨하탄 디아센터의 보다 큰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 아트센터가 뉴욕시에서 약 한 시간 반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디아비컨 아트센터 (Dia Beacon Art Center) 이다. 우거진 수풀과 흐르는 강물 사이에 세워진 센터에 들어서려니, 그 어마어마한 건물의 크기에 일단 압도된다. 원래 박스 인쇄 공장이었던 건물을 미술관으로 변모시킨지라, 대부분 커다란 규모를 지닌 현대미술작품들은 공장 특유의 분위기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어 전시되어 있었다.
아트센터 입구에서는 전시장 바닥을 이용해 전시된 워터 드 마리아 (Walter de Maria) 의 작품이 관람객을 맞이하고, 그 옆 갤러리에는 앤디 워홀 (Andy Warhol) 의 작품들이 넓은 방의 네 벽면을 꽉 채우고 있었다. 가도 가도 끝없는 전시장을 따라가려니, 앤디 워홀의 다른 작품을 비롯, 댄 플래빈 (Dan Flavin), 솔 르윗 (Sol LeWitt), 온 카와라 (On Kawara), 도널드 저드 (Donald Judd), 로렌스 와이너 (Lawrence Weiner), 리차드 세라 (Richard Serra), 리차드 스미드슨 (Richard Smithson), 아그네스 마틴 (Agnes Martin),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게하르트 리히터 (Gerhard Richter), 브루스 노먼 (Bruce Nauman) 등 그야말로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Dia:Beacon, Riggio Galleries, 2003. Photo: ©Richard Bar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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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명단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전시작품의 대부분은 1960년대와 70년대의 미국 미술계를 주름잡았던 작가들의 작품이다. 극단적이기까지 한 개념미술운동이 활발히 펼쳐졌던 시기라, 광활한 크기의 갤러리들에 전시된 작품들 중 많은 수가 극도로 개념적인 작업이다. 전시장 입구에서 받은 브로슈어를 펼쳐보니, 이 미술관을 운영하고 있는 디아미술재단 (Dia Art Foundation) 은1974년에 창립되었으며, 미술프로젝트를 시작단계부터 보존단계까지 지속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미술관 운영을 지향한다고 설명되어 있다. 또한, 이 재단은 전시, 퍼포먼스, 설치미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작업하는 작가들의 미술활동을 직접적으로 지원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전시장을 둘러보면 이러한 디아미술재단의 노력이 쉽게 느껴진다. 일반적인 전시공간에서는 설치가 어려운 어마어마한 규모의 작품들이 마치 맞춤옷같이 딱 어울리는 공간에 극적으로 실현되어 있다. 이는 미술 프로젝트를 위한 공간이 되기 위해, 그야말로 시작부터 끝까지 신경을 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미술의 천국, 그러나 누구에게나 다 그럴까
미술전공자인 필자의 시각에서 볼 때, 디아 비컨은 천국과 같은 공간이다. 아마도 모든 작가들이 일생에 한번쯤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 보길 소망하는 공간일 것이다. 지극히 미술적인 개념과 목적을 지닌 공간, 즉 흔히 미술작품에 대해 기대하는 시각적 즐거움을 찾아보기 어려운 개념적인 작품까지 소화할 수 있는 공간으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반대중에게는 어떠한가. 과연 그들에게도 미술의 천국 같은 공간이라 할 수 있을까. 철학적이고 조용하고 깊이 있는, 개념작가들의 작품 앞에서 필자는 갑자기 궁금해졌다. 이 시대의 미술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적어도 미술작품이 작가의 스튜디오를 떠나 갤러리라는 공간에 전시되었을 때는 관람자가 그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미술활동의 주된 요소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술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소통은 매우 중요하며, 특히 미술교육계와 미술관교육계에서는 많은 이들이 단지 이 원활한 소통만을 위해 몇 십 년 동안 연구를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술작품 감상에 대한 미술교육은 감상자의 성격에 따라 그 방식이 달라진다. 미술전공자냐 일반대중이냐에 따라서, 또한 어린이, 학생, 어른 등 그 연령대에 따라서 접근하는 방법이 달라지는데, 특히 현대미술 영역은 모든 대상에서 가장 까다롭게 다뤄지는 것이 사실이다. 미술적, 철학적 개념만을 다룬 작업들은 미술전공자에게도 이해 불가능으로 여겨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현대미술과 일반대중, 그리고 미술교육
“이해 불가능”. 필자는 이 다섯 자의 단어가 근대미술이 싹트고 현대미술이 발전되어 오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틈새를 비집고 나타나 미술과 대중의 사이를 유리시켜 왔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 전시장에 가기 싫은 이유로 “작품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특히 지극히 개념적으로 드러난 미술작품은 ‘시각문화’에 대한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하고 흔히 말하는 “이게 왜 미술이야”라는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부모가 현대미술전시를 관람하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그 자녀도 현대미술 감상의 기회가 줄어들게 된다. 즉, ‘이해 불가능’과 ‘왜 미술이야’ 이 두 가지 컨셉은 현대미술 감상교육에서 처음 극복해야 할 과제와 같다. 최근의 미술 감상 교육론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관람자와 미술작품 사이의 연결고리를 극대화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육학자들이 현대미술작품을 창작한 작가 자신도 작품을 감상하는 학생들과 관람자와 동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작품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삶을 투영해 볼 것을 권한다. 미술을 미술로만 보면 어렵지만,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개인적인 이야기와 연결시키면 훨씬 더 감상과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교육적 효과도 커지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놓는 대화법과 질문법을 많은 교육자들이 사용한다.
‘내가 생각하는 미술’과 ‘내가 보는 미술’ 사이의 간극 좁히기
미술교육학자 그레엄 설리번(Graeme Sullivan) 에 의하면, [웹진땡땡 제16호에 실린 그레엄 설리번의 현대미술교육에 대한 인터뷰기사 참조] 오히려 어린이들은 쉽게 현대미술감상에 접근한다고 얘기한다. 이는 현대미술은 어렵다는 어른들의 편견이 그들에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눈앞에 보이는 미술작품에 대해 자신에게 떠오르는 이야기를 솔직히 풀어놓기 때문에 감상과정은 개인적이고 창의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이 점은 일반대중의 현대미술감상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 교육학자들이 아무리 관람자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다고 그들을 이끌어도 일반인들에게 현대미술에 대한 애정이 쉽게 생기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반응에 자신 없어 하기 때문이다.
Andy Warhol, Shadows, 1978-79. Dia Art Foundation.
디아센터의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앤디워홀은 팝아트의 선구자로 미술의 영역과 대중문화의 영역을 효과적으로 연결시켜 영웅이 된 사람이다. 이 시각에서 보면 팝아트와 워홀의 작품은 대중에게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지만,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박스 같은 상자들을 전시해 놓은 워홀의 작품 앞에서 많은 이들은 “아니, 왜 이런 박스가 미술작품인거지?”라고 생각하기 쉽다. 즉, 일상과의 연결성이 오히려 감상의 폭을 줄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 관람객이 “이게 왜 미술이죠? 난 미술은 이러이러한 거라고 생각하는데 이 작품은 전혀 그런 요소가 없잖아요”하고 자신 있게 반박하기 시작하면, 미술적 소통은 아주 쉬워진다. 그 반문을 시작으로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고, 궁극적으로 관람객은 자신의 생각과 워홀의 작업 사이의 거리를 좁힐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 관람자의 경우, 속으로만 생각할 뿐 그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리차드 세라의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관람객을 압도하는 크기의 철로 만든 작품의 속을 거닐면서 한 일반인 관람객에게 가장 먼저 떠 오른 생각이 “이렇게 큰 철 작업을 대체 어떻게 접합하고 운반했을까?”라면 바로 이 이야기부터 세라의 작품제조 과정에 대한 이해를 시작할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과연 이게 제대로 된 작품 감상일까 하는 의문을 갖기 때문에 쉽게 감상을 위한 대화를 시작하지 못한다. 특히 세라와 같은 개념미술 작가들의 작품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한정되어있기 때문에 이런 어려운 점은 더 하다. 이 대중과의 소통의 어려움은 결국 70년대 말에 이르러 개념미술 운동이 쇠퇴하고, 80년대에 이르러서는 좀 더 비주얼이 강조되고 회화의 특성이 극대화되는 작업들이 나타나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대중과 현대미술 간의 소통은 서로 간에 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고 용감히 다가가야 한다는 인간관계의 기본원칙과 연장선에 있는 것이 아닐까. 또한 이러한 일반 관람객에 대한 진지한 이해는 감상교육의 바탕에 깔려있어야 한다.
작가-교육자-관람자, 모두에게 필요한 소통의 작업
디아센터에서 만난 거장들의 작품 앞에서 미술 감상을 위한 교육의 역할에 대해 떠올리게 된 것은 그 효과적인 미술공간이 그만큼 충분히 대중과 소통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신만의 세계에 극도로 빠져있는 작가들의 작품 앞에서 관람객 측면의 이야기를 꺼내서 그 메아리를 듣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이 분야 종사자들이 모두 동의하는 한 가지 확실한 점은 현대미술의 앞날에서 관객과의 소통은 중요한 과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소통은 다양한 연령층을 대상으로 하는 미술 교육적 접근을 통해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최근 우연히 갖게 된 한 작가와의 대화에서 그는 반성문의 한 문장 같은 말을 했다. 자신의 작품은 그동안 미술을 위한 미술이었던 것 같다고. 이제는 사람들의 삶과 깊게 연결된 그런 살아있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대중과의 소통을 위한 ‘살아있는 작업’은 오늘날 창작의 주체인 작가에게도, 소통의 중간매개자인 교육자에게도, 또한 자신만의 감상 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관람자에게도 필요한 일인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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