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다양성, 탈식민주의적으로 실천하기 – 영어‘들’ 시대의 영어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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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부터 서울시립청소년직업체험센터 ‘하자’에서 글로벌 학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작년에 하자의 글로벌 프로젝트에서 ‘글로벌 감수성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는데 나름대로 반응이 좋다고 생각된 모양이다. 작년의 경험에서 아이들에게 좀 더 체계적으로 영어를 가르치자는 공감이 있었다. 어떤 영어를 어떤 방식으로 가르칠 것인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이 났다. 영국식이나 미국식 영어가 아닌 좀 더 탈식민적인 내용과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추상적인 수준에서 원리에 대한 말은 쉽다. 그러나 그걸 어떻게 실현할 수 있는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래서 어떤 이름으로 가는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 꽤 오랫동안 토론을 했다. 이름이라는 것이 문제의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드러내 주지 않는가? 문제는 문제의식만 그럴싸한 게 아니라 그것의 실현방법도 그럴싸해야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오랜 장고 끝에 꽤 괜찮은 이름을 하나 내었다. “영어‘들’시대의 영어 수업”

영어‘들’시대의 영어 수업이라고 이름을 지은 데에는 경험에서 유래한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처음 국제연대운동을 시작하면서 가장 골치 아팠던 것이 영어였다. 한국에서 태어나서 ‘성문 영어’를 보고 공부하며 자란 전형적인 세대인지라 말하고 듣기에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모두가 다 불평하듯이 한국의 영어공부의 병패가 온몸에 ‘육화(肉化)’되어 있는 존재였다. 그러던 나의 두통을 한 번에 날려준 사건이 처음 참석하였던 국제회의였다. 그 자리는 세상에 영어란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무수히 많은, 심지어는 서로 소통 불가능한 영어‘들’이라는 사실이었다. 영어‘들’의 향연이었다. 심지어 사석에서 너무나 유창한 미국식 영어를 구사하던 한 학자는 연단에 서자마자 무슨 말인지 하나도 들리지 않는 인도식 악센트로 따발총처럼 말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가장 고상한 영어는 토착화된 영어라고. 진짜 지식인(intellectual)은 그렇게 말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어(The English)에서 해방되어 나의 영어(an english)를 만들어나갈 수 있었다.

영어’들’시대의 영어 수업

두 번째 경험은 인도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 참석하였을 때이다. 수많은 인도의 지식인들이 연단을 차지하고는 미국과 미국적인 것, 제국과 제국적인 것, 제국주의와 제국주의적인 것에 대해 비난을 퍼부었다. 그리고 지역적인 것, 토착적인 것, 민족적인 것의 중요성과 그것을 옹호하자고 ‘영어’로 격정적으로 외쳤다. 그 감명적인 연설들 후에 숙소로 돌아와서 세계사회포럼에 초청받지 못한 한 학자와의 간담회가 있었다. 그 학자는 인도적인 것으로 반세계화를 외치는 그들은 ‘브라만 집단’들이며, 그들은 ‘우리 불가촉천민’들을 영원히 ‘지역적인 것’에 대한 강조 속에 저들의 ‘인도적인 착취구조’에 가두어두기 위한 수작이라고 질타하였다. 그들은 자신의 자식들이 영어를 배우는 것은 장려하지만, 우리 불가촉천민들이 영어를 사용하는 것은 제국주의에 포섭된 것이고 오염된 것이라고 비난한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국제연대운동을 시작한지 꽤 오래되고 난 후 한국에서 어떤 회의에 참석하였을 때의 경험이다. 한 참석자가 탈식민적 인식론의 필요성에 대해서 꽤나 길게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저녁을 먹으로 간 자리에서 그 회의를 준비했던 간사가 영어 공부를 해야겠다며 어디를 가서 어떻게 공부를 했으면 좋겠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필리핀보다는 말레이시아나 인도에 가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추천을 하였다. 조금 전까지 ‘탈식민주의’ 인식론을 이야기하던 그 사람이 대뜸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니 그 식민지 영어는 배워서 뭐할려고?’

‘식민지 영어’와 탈식민주의 인식론 사이

우리 교육현장의 문화다양성과 문화다원주의 교육의 병폐의 핵심은 두 번째 경험과 세 번째 경험 사이에 갇혀있다. 유감스럽게도 첫 번째와 같은 사건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탈식민, 다양성, 지역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언제나 순수한 원형질로의 회귀이거나 아니면 인식론적인 선언에 그친다. 전자는 과거를 무조건적으로 낭만화하는 민족적/종교적 근본주의의 위험함에 빠지며 지역적 착취와 억압, 차별의 구조를 재생산하는 기제로 전락한다. 인도에서 그것이 힌두교라는 종교에 대한 강조하면 한국에서는 민족에 대한 강조이다.

주로 이런 방식의 ‘문화다양성’에 대한 교육은 초등에서 중등까지의 교육현장에서 일어난다. 가장 낮은 수준에서는 교사들이 교육현장에서 민족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 문화적 다양성을 지키고 수호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우리 내부의 차이는 봉쇄된다. 우리는 한민족이니까. 이것보다는 조금 더 높은 수준에서는 우리 내부의 차이와 그것에 대한 인정을 이야기한다. 대부분 인권적 시각에서의 접근이다. 다름에 대한 차별과 착취와 억압에 대한 반대라는 보편적 인권론에 근거한 접근이다.

그리고 최근 하인스 워드의 출현은 여기에 힘을 좀 더 보탠 것으로 이야기된다. 혼혈에 대한 갑작스러운 이 관심은 우리 내부가 얼마나 다양한가를 보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이야기되는 듯하다. 우리가 내부의 차이를 얼마나 인정하지 않는가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한다는 성찰들이 막 시작된 듯하다. 심지어 ‘우리 모두는 혼혈’이라는 과격한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곰곰이 뜯어보면 하인스 워드의 출현 이후 혼혈들에 대한 인권과 그들의 잠재력에 대한 강조조차 대단히 민족주의적이다. 여전히 그들의 차이에 대한 인식은 우리 모두가 ‘혼혈’인 ‘한국인’이라는 틀 속에 갇혀있다. 우리 모두가 한 핏줄에서 우리 모두가 혼혈로 ‘하나’되었다. 차이를 인정하는 방식조차 차이를 지우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차이를 지우는 방식으로 차이를 인정하는

좀 더 진보적인 사람들이 이끄는 교육현장으로 가보자. 이분들의 무대는 주로 대학 강단이다. 여기서 탈식민과 문화다양성은 언제나 그렇듯이 인식론이다. 우리 내부와 언어가 얼마나 식민화되어 있는가를 돌아보는 성찰의 기제로서의 탈식민주의이며, 지구적인 헤게모니에 지역적인 것을 살리자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런 인식론은 구체적인 실천에서는 참으로 무력하다. 당장 영어교육을 생각해보자. 이들은 미국식/영국식 영어를 가르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한다. 그렇다면 한국 사람은 한국말만 해야 하는가? 이런 민족주의적 접근에 대해서도 이들은 반대한다. 그럼 어떤 영어를 어떠한 방식으로 가르치자는 것인가? 이 부분에 대해 이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우물쭈물한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은 양쪽 모두 ‘지역적인 것’과 ‘세계적인 것’을 물과 기름처럼 이분법적인 것으로 가른 다음 그것을 인식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탈식민과 문화다양성은 인식의 문제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로 ‘진화’해야 한다. 영어공부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사실 허탈하게도 탈식민화된 영어란 바로 콩글리쉬이다. 싱글리쉬(싱가폴의 지역 영어)나 인글리쉬(인도의 지역영어)와 소통 가능한 콩글리쉬를 가르치는 것이 탈식민화된 영어공부이다. 그것은 본토영어라는 이름으로 미국식/영국식 영어를 혹은 원어민영어라는 이름으로 앵글로색슨들의 영어를 중심화하는 것이 아니라 이 영어들을 한 지역의 영어로, 한 인종의 영어로 가두어두는 것이다. 미국식/영국식 혹은 화이트 앵글로색슨의 영어를 영어‘들’ 시대의 한 영어로 축소, 혹은 원래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인식의 차원에 갇히지 않는 문화다양성

물론 한국말도 잘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그 한국말에는 사투리도 포함되어야 한다. ‘바른말 고운말 쓰기’라는 이름으로 표준어는 한편에서는 지역 사투리를 말살하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영어에 맞서 수호하여야할 민족정체성의 핵심이었다. 후자에서 표준어는 문화다양성에 의해서 보호되어야할 지역적인 것으로 위치 지어졌다. 그것에 의해 이미 수많은 사투리와 지역적인 언어들이 파괴되었음에도 자신은 지켜져야 할 지역적인 것으로 선언하는 것은 참으로 뻔뻔스러운 일이다. 이 사태의 한가운데에서 이것은 실현시킨 것이 바로 교육현장이 아니었던가?

이처럼 지구화시대에 우리 교육 현장에서 문화다양성과 탈식민주의는 그것을 하나의 규범, 즉 지구적인 수준의 헤게모니적인 것에 맞서기 위해 지역의 헤게모니적인 것을 지키자고 주장하는 뻔뻔스러운 규범으로 담론화되어 있다. 이것은 결국 전지구화 시대에 위기에 처한 지역의 엘리트들의 지적 헤게모니를 옹호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수작에 불과하다. 이것은 탈식민과도 문화다양성과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좀 극단적으로 말해 지역토호세력의 헤게모니와 이권 지키기에 불과하다.

지금 늘 다른 것과 융합되고 변이되며 ‘지금 이 자리’에 속해 있는 실천적인 ‘토착적인 것’과 영원히 과거에 흘러들어가는 ‘토호세력의 헤게모니/이권에 속한 것’은 쉽진 않지만 구분해야한다. 따라서 교육현장에서 문화다양성으로 발견되고 이야기되고 옹호되어야하는 것은 교육현장에 와 있는 학생들의 삶에서 이미 실천되며 재구성되고 있는 지역적인 것, 탈식민적인 것이다. 이미 훌륭히 지역적이고, 지역의 기억이 새겨져 있는 콩글리쉬와 같은 것 말이다. 다만 교육현장에서 의식적으로 실천해야하는 것은 이 콩글리쉬를 살짝 비틀고 열어 다른 지역 영어와 소통 가능한 것으로 만드는 작업이다. 그것 역시 다른 지역 영어‘들’과의 소통, 그 자체가 소통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본토 영어 원어민 영어로의 회귀가 아니라. 이것이 소통가능성을 향해 무한대로 열려 있는 문화다양성 교육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