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다한|청소년 대중문화탐험단 ‘꿍시렁’
작년 봄, 우연히 ‘청소년 대중문화 탐험단 ‘꿍시렁” 1기가 되었다. ‘꿍시렁’은 청소년들이 주체가 되어 다양한 문화생산현장, 소비현장을 탐방하고 비평을 하는 청소년 단체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든 첫 시작이 어렵듯이, ‘꿍시렁’ 활동 또한 순탄치 만은 않았다. 워크숍을 세 차례나 받긴 했지만, 친구들 모두 ‘비평’을 해 본 적 없어서, 감이 잡히질 않는다고 호소했다. ‘무엇이 비평인지, 무엇을 써야 하는지, 어떻게 쓰는지, 또 내가 쓴 게 비평은 맞는지’ 등의 고민과 두려움 탓에 초창기에는 카페에서 ‘비평’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비평에 대한 두려움이 어느 정도 해소된 뒤에는 ‘일정을 우리 스스로 짜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졌다. 당초 계획은 문화연대에서 짠 계획에 따라 활동하는 것이었고, 한 동안 그렇게 했었다. 그런데 여름부터는 우리 스스로 활동 일정과 계획을 짜야 했다. 굉장히 힘들었다. ‘활동계획을 짠다’는 것은 단순히 무엇을 할 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꿍시렁’의 존재 목적과 활동 목표부터 우리가 다시 생각하며 잡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매번 모임이 끝난 뒤, 뒤풀이 자리에서 앞으로의 활동에 대해 논의했지만 언제나 명쾌한 답을 얻진 못했고, 답을 얻어도 그대로 행해지지는 않았다. 이 외에도 크고 작은 시행착오가 많았다. 그런데, 이렇게 여러 시행착오를 겪으며 ‘꿍시렁’ 활동을 하는 동안 ‘문화를 보는 우리의 시각을 넓혀줄 “문화교육”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작년 한 해 절실히 느낀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에 대한 생각을 이 지면을 통해 풀어본다.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이하 문화교육)’은 청소년들이 문화를 보는 ‘시각’을 넓혀주어야 한다. 청소년들의 ‘문화적 시각’을 키워주지 않는 문화교육은 아무리 질 좋은 것이라도 ‘주입식/수동적 교육’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주입식/수동적 문화교육은 문화교육을 받는 청소년들이 문화교육 방침에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부작용을 초래한다. 그렇게 되면, 청소년들은 모두가, 똑같은 관점을 지닌 획일적인 문화 소비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이들에게서 21세기의 경쟁력인 창의성은 찾기 힘들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현재 우리나라의 대학 입시 제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수능 중심의 획일적인 현 대입제도는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을 다 똑같은 ‘문제 풀이 선수’로만 만들어 놓았다. 이런 ‘문제 풀이 선수’들이 모여있는 우리나라 대학의 국제적 경쟁력이 매우 낮다는 보도는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보다 주체적이고 비판적인 청소년을 키우기 위한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은 그들의 시각을 넓혀주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청소년들의 ‘문화적 시각’을 넓혀줄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체험’과 ‘비평’의 방법이 효과적이다. 비즈니스맨들은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일을 하기 때문에 사람들 이름을 외우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한다. 비즈니스맨들을 위한 한 실용서에서는 사람들의 이름을 쉽게 외우기 위해서는 ‘많이 돌아다니고’ 명함을 받으면 ‘입으로 소리 내어 읽으라’고 한다. 일단 ‘몸을 써서’ 돌아다니고, 명함의 이름을 눈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자신이 ‘직접 읽어보는’ 것은 바로 ‘체험’과 ‘비평’의 방법이다. 문화교육도 마찬가지다. 넓은 문화적 시각을 갖추기 위해서는 일단 다양한 문화를 광범위하게 ‘체험’해야 한다. 하지만 체험만으로는 나와 같이 할 순 있어도 내 것이 될 수는 없다. 반드시 내가 스스로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그 방법으로는 ‘비평’이 제격이다. 사람들이 어렸을 때 배운 자전거 타는 법을 십 년이 넘게 타지 않아도 쉽게 잊어버리지 않는 이유는, 몸으로 익혔기 때문이다. ‘비평’이 바로 몸으로 직접 해보는 작용을 한다.
그런데, 이러한 ‘체험’과 ‘비평’의 방법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문화교육에 대한 청소년들의 거부감이 사라져야 한다. 현재의 청소년 문화교육은 대부분 청소년 단체들이나 시민단체, 문화기반시설 등에서 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행하는 ‘청소년 문화교육’은 접근 기회 부족, 소재의 전문성, 입시 부담 등의 문제로 일부 청소년들만이 혜택을 받고 있다. 일부만이 정보를 얻고, 흥미를 갖는 청소년 문화교육은 효과가 적다. 따라서, 우선 청소년단체들끼리의 정보망 구축 등의 방법을 통해, 문화교육이라는 것이 있었는지도 몰랐다는 청소년들이 생기지 않게 해야 한다. 그리고, 기존의 문화에 청소년들을 끌어들이는 방식이 아닌, 청소년들의 생활에서 문화를 이끌어내는 식으로 접근해서 너무 어렵다는 청소년들이 없게 해야 한다. 가령, 청소년들이 하루 동안 가장 많이 쓰는 물건인 신발이나 펜, mp3 플레이어 등으로도 충분히 문화를 끌어낼 수 있다. 신발에서는 고급메이커로 대표되는 과시와 차별화 문화, 펜에서는 일본 펜 ‘Hi-Tec-C’에 대한 선호를 통한 일본에 대한 청소년들의 생각, mp3를 통해서는 공유문화와 다양한 장르에 관심이 많은 특성 등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있는지도 몰랐고 딱딱하고 어렵기만 하던 문화교육을 변화시켜 거부감을 없애준다면, 보다 많은 청소년들이 참여할 것이다. 참여 청소년의 비율이 커진 뒤에라야 앞서 말한 ‘체험’과 ‘비평’의 방법이 효력을 발휘할 수 있다.
문화적 시각을 넓혀주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고 다양한 방면의 문화체험’이 행해져야 한다. 한정된 문화만을 접하게 한 뒤, 문화적 시각을 키우라는 것은 청소년들에게는 고통이다. 뿐만 아니라, 청소년 시기는 장래의 진로를 결정하는 시기 이므로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거쳐야 할 ‘문’과 같다. 그런데 인간이란 존재는 눈 앞의 것에 익숙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청소년들에게 한정된 문화만을 접하게 하는 것은, 창의성을 가진 주체적인 청소년을 길러내려는 문화교육을 원점으로-획일적인 문화교육 상태- 되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많은 문을 만들어서 이것저것 다 체험해보게 해야 한다. 성장기의 청소년들이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하듯이, 문화적 시각의 성장기에 해당하는 청소년들은 ‘문화체험’에 있어서도 편식을 해서는 안 된다. ‘광범위하고 다양한 방면의 문화체험’의 예로 꿍시렁 초창기 때 친구들은 만화, 록, 영화 등 각자의 관심영역만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라이브 공연장 탐방과 공연 캠페인 참여, SICAF 탐방, 독립영화감독과의 인터뷰, 영화제 탐방, 음악캠프 스튜디오 탐방 등 다양한 방면의 활동을 하고 나니, 보다 넓고 활발한 ‘문화비평’이 가능해 졌다.
문화적 시각을 넓혀주는 두 번째 방법은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비평하기’이다. 앞서 말했듯이, 광범위하고 다양한 문화체험을 한 다음에는 ‘비평’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청소년들이 ‘비평’이란 단어만 들어도 거북해한다. 이런 막연한 두려움은 ‘비평이란 기존의 문화평론가들이 쓴 어려운 글들 같은 것’이라는 선입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비평’이란 결코 ‘평론’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평론’은 비평의 한 수단일 뿐이다. ‘문화비평’이란 자신이 체험한 문화에 대해 여러 가지 방면으로 생각해보고, 그것의 효용이나 가치, 문제점 등을 자유롭게 말하는 활동이다. 그러므로, 일단 청소년들에게 ‘비평’의 의미를 다시 알려주고, 선입관을 없애주어야 한다.
그리고 비평방법이 다양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비평할 수 있게끔 이끌어야 한다. 청소년들에게는 그들만의 취향, 즉 ‘스타일’이 있다. 이런 ‘스타일’을 이용해야 한다. 가령, 원래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면 글로써 표현하게 하고, 글보다는 그림이 편한 사람은 그림으로 표현하게 도와주고, 시 쓰는 게 익숙한 사람은 시로써 표현하게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표현’을 한다는 비평활동 자체이지, 비평의 형식이 아니다. ‘ON 문화 교육 뉴스 레터’의 ‘꿍시렁’ 코너에서는 청소년들의 문화에 대한 느낌들을 싣고 있다. 이 코너에 실린 글 중간중간에 작년 ‘문화캠프’에서 만난 분께서 청소년들의 ‘비평’내용에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그려주시는데, ‘자신에게 편한 방식으로 비평’하는 좋은 사례이다.
시대는 바야흐로 문화의 홍수시대에 접어들었다. 곳곳에서 다양한 문화의 범람이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문화의 성장’측면에서는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문화교육’측면에서는 독이 될 수 있다. 문화 자체는 그것의 도덕적인 옳고 그름을 밝히지 않고, 그로 인해 그릇된 문화들 또한 문화의 홍수 속에서 마음껏 떠다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도 ‘문화교육’이 절실한 시점이다. 특히, 올바른 ‘문화적 관점’이 확고히 자리잡지 않고, ‘문화적 시각’이 좁은 청소년들에게는 더욱더 필요하다. ‘광범위한 문화체험’과 ‘편한 방식의 비평’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문화교육’을 가능케 할 것이다. 하루빨리, 청소년들의 ‘문화적 시각’을 넓히는 ‘청소년 문화예술교육’이 효력을 발휘하여, 청소년들 스스로 그릇된 문화를 가려내고 올바른 문화 향유를 위해 나아가는 날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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