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교육 – 예술의 가치가 구현되는 예술교육

글_김진엽(홍익대학교 예술학과 교수, 미학)

감성의 수련으로서 예술
예술교육은 중요하다. 왜 중요할까? 그 까닭 중의 하나는 예술이 교육을 시킬만한 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이 글은 예술교육의 중요성을 예술의 가치에 대한 언급을 통해 부각시키는 데 주목적이 있다. 그렇다면 먼저 예술이 지닌 가치가 무엇인지 언급하도록 하자.
예술이 지니는 첫 번째 가치는 감성 또는 감정의 수련이다. 이러한 가치는 특히 낭만주의 예술의 부흥기에 강조되어 왔다. 낭만주의 예술의 옹호자들에 따르면, 과학이 우리의 논리적 사유를 수련시키듯이 예술은 우리의 감성적 느낌을 수련시킨다. 예술은 우리의 감정을 표현하는 장이며 이러한 장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감정을 정리하고 명료화한다. 감정을 표현하는 수련이 안 되어 있을 경우, 타인에게 감정을 난폭하게 폭발시키는 또는 타인과 감정을 적절히 공유하지 못하는 부작용이 초래되기 쉽다. 우리는 사유하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울고 웃고 화내고 사랑하는 존재이기도 하기 때문에 사유의 수련만큼이나 감정의 수련도 조화로운 자아의 형성을 위해 개인에게 무척 필요하다. 때로는 냉정한 논리적 판단보다는 따스한 말 한마디나 미소가 우리의 삶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여러 삶들을
간접적이지만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
영화 <말아톤>(2005) 포스터.

구체적 삶의 경험, 상상력의 함양
예술이 지니는 두 번째 가치는 예술을 통해 우리가 여러 삶들을 간접적이지만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술은 고대 군주나 노예의 삶, 비극적인 여인의 삶, 파란만장한 의적의 삶, 불굴의 장애인의 삶, 꼿꼿한 선비의 삶, 불우했던 무사의 삶 등 다양한 시대를 살아간 다양한 인물들의 다채로운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삶들을 예술을 통해 간접적이지만 구체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비교, 성찰할 수 있다. 이러한 비교, 성찰은 특히 청소년들이 자신의 인생관을 형성하는 데, 그리고 자신의 인생을 꾸려 가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예술은 인생의 연습장 구실을 하는 것이다.
예술이 지니는 세 번째 가치는 그럴듯한 상상력의 함양이다. 철학자 칸트는 이를 오성과 상상력의 자유로운 유희라고 표현하였다. 예술에서 늘 강조되는 것이 상상력이다. 지금 이 곳의 지평을 넘어선 상상력은 예술의 자양분이다. 그렇지만, 그 상상력이 몽상이나 미망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 이곳을 넘어서지만, 지금 이 속에서 언젠가는 실현되리라는 기대를 가능케 하는 그러한 상상력, 즉 그럴듯한 상상력이 되어야 한다. 단테의 <신곡>,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베토벤의 <운명>, 영화 <반지의 제왕> 등 이른바 예술적 고전들은 이러한 그럴듯한 상상력의 보고이다. 몽상이나 미망은 현실 도피적이라 현실을 피폐하게 하지만, 그럴듯한 상상력은 유토피아적이라 현실을 풍요롭게 한다. 우리는 지금 이곳만을 살아갈 수는 없다. 때로는 위기가 닥쳐 지금 이곳을 벗어나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지금 이곳이 자기에게 맞지 않아 다른 대안을 모색해야 할 때가 있다. 이 때 예술을 통해 함양해 놓은 그럴듯한 상상력은 우리에게 지금 이곳을 넘어선 새로운 희망을 제시해 줄 수 있다.

예술의 세 번째 가치는 그럴듯한 상상력의 함양이다.
단테의 <신곡>을 토대로 한 토마스 판두르의 연극 <신곡>(1993 초연) 중 한 장면.

두 마리 토끼, 미적 관조와 비판적 성찰
예술이 지니는 네 번째 가치는 세상에 대한 관조적 자세를 익힐 수 있다는 점이다. 현대에 들어서는 추한 예술작품도 많지만, 그 이전에는 아름다운 예술작품들도 많았다. 어떻게 예술작품이 우리에게 아름답게 느껴질까? 물론 예술작품도 아름다워야겠지만 그 작품을 감상하는 우리의 마음 자세도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다운 마음의 자세 중 하나가 관조적 자세이다. 즉 일체의 이익이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예술작품을 무관심적으로 관조할 때 우리는 그 예술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세를 미적 관조 또는 미적 무관심성이라고 한다. 모짜르트의 아름다운 음악을 들을 때 우리는 일체의 이익이나 관심으로부터 벗어난 관조적 상태에서 편안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치열한 효율성과 이익을 추구하는 현대 생활에서 느림과 여유와 자족이 대안적 가치로 대두되듯이 미적 관조도 이 복잡한 현대의 삶을 비록 잠시나마 편안하게 해줄 수 있는 가치를 지녔다.
그렇지만 미적 관조를 불러일으키는 아름다운 예술은 가치 있고 아름답지 못한 예술은 가치가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름답지 못한 예술 또는 추한 예술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예컨대,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그리 아름다운 예술은 아니다. 김기덕의 <나쁜 남자>도 아름다운 예술은 아니다. 특히, 현대에 들어 추한 예술, 기이한 예술, 엽기적 예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러한 예술도 나름의 가치가 있다. 겉으로 아름답고 평온하게 보이는 세상의 이면에는 어둠, 추, 고통 등이 도사리고 있다. 그러한 어둠, 추, 고통 등이 때론 세상의 실체임에도 불구하고 미화되고 감추어질 때도 있다. 이때, 예술은 추하고 고통스러운 방식을 통해 세상의 미화된 장막을 걷고 세상의 추하고 고통스런 실체를 폭로한다. 예술은 사회의 주류에 자리 잡고 있기보다는 변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폭로의 행보는 날렵하고 방식은 도발적일 수 있다. 예술은 변방에 서서 다소 독특한 행보와 방식으로 주류 사회를 비판하며, 그리고 그러한 비판을 통해 사회에 기여한다. 현실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가능케 하는 일, 이 일을 예술이 지니는 다섯 번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은 사회의 변방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폭로의 행보는 날렵하고
방식은 도발적일 수 있다. 피카소의 <게르니카>(1937).

예술교육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술은 위에서 열거한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널리 교육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예술교육은 예술의 가치와 가능한 부합하게끔 이루어져야 한다. 감정의 수련, 다양한 삶의 간접적이지만 구체적 경험, 상상력의 함양, 관조적 자세의 마련, 사회에 대한 비판적 성찰 등의 가치를 북돋을 수 있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술교육의 주 대상이 되는 청소년들을 위한 예술교육의 현실은 이와는 거리가 멀다. 청소년들 삶의 대부분은 대학으로 향한다. 대학은 대부분 교과 성적에 의해 결정된다. 따라서 예술은 교과 성적을 올리는데 필요할 경우, 또는 교과 성적을 올리는 중간 중간 쉴 경우에 허용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미술, 음악 등 예능교과를 통해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경우이다.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는 등의 예능교과를 통해 문화 예술을 향유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이 경우도 내신 성적과 연관되면 사뭇 당혹스런 모습을 연출한다. 미술 숙제를 하기 위해 미술 학원을 다니는 청소년들, 늦은 밤까지 악기를 연주하며 실기 시험에 대비하는 청소년들, 노래의 악보를 한 음도 빼지 않고 다 외우는 청소년들, 이들 청소년들의 모습은 예술의 풍요로운 가치를 향유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이들의 모습은 내신 성적과 많이 연관되어 있다. 밤늦게까지 한 점의 점수라도 더 따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린다. 그곳에 예술은 이름만 있다. 그리고 그 이름은 청소년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후자의 경우는 하루 중 틈틈이 이루어지는 텔레비전 시청이나 주말에 이루어지는 영화 감상 등을 들 수 있다. 이 경우는 성적 향상이라는 부담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청소년들에게 즐거움을 준다. 그런데 이런 즐거움은 예술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너무 협소화할 가능성이 높다. 시트콤, 토크 쇼, 블록버스터 영화 등이 제공하는 즐거움이 예술이 제공할 수 있는 가치를 대표한다고 보기는 힘들다.
따라서 청소년들은 전자의 경우인 학교 안에서이든 후자의 경우인 학교 밖의 사회에서든 예술의 가치를 적절히 구현하고 있는 예술교육을 받기 힘들다. 학교 안에서는 입시와 연관되어, 사회에서는 문화산업과 연루되어 예술의 가치는 이리저리 훼손되고 있다. 적절한 예술교육 방식에 대한 고민을 통해 예술의 가치를 부흥시켜 나갈 때,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도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