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예술교육이라 부르는 것이 지금 여기에서 새삼, 문득, 거듭, 재차 주목을 받고 있다면 거기엔 필시 어떤 맥락이 있다. 이 맥脈과 락絡을 볼 줄 알고 다룰 줄 알아야 뭘 해도 된다. 우선 맥은 이것저것 제각각처럼 보이는 사회의 요청들이라고 해두고, 락은 그것들을 겹쳐보고 연결하며 하나로 꿰는 시대의 발상이라고 해보자. 그럼 맥락이란 ‘온갖 사회의 요청들에 두루 관통하는 시대의 발상’쯤 된다.
문화예술교육 맥락의 진화
우리가 익히 아는 가장 오래된 맥락은 문화예술의 장르마다 도제 방식으로 전공자를 훈육 훈련시킨다는 발상에서 나왔다. 이는 대학을 정점으로 삼는 근대 국가의 교육제도로 기획되어 빠르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 교육제도는 급변하는 사회의 요청들과 꾸준히 담을 쌓은 결과 공룡처럼 둔감하고 무능해졌다. 현재는 고비용 자부담의 문화예술 전공자를 ‘과잉 공급’하고 대량의 ‘품질 저하’를 낳는 저효율의 온상이 되어 구조조정이나 학생 및 학부모에 의해 대량 리콜을 당하기 직전까지 와 있다.문화예술교육의 또 다른 맥락은 근 6년여 동안 친숙해졌는데 앞의 것과 풍경이 퍽 달랐다. 문화예술의 프레임이 생산자에서 향유자로 옮겨간 것이다. 즉 문화예술의 향유 대중을 다양한 방식으로 교양하고 고양하자는 발상이다. 여기엔 가급적 이른 나이 때부터 보다 많은 대중을 예술의 미래 고객으로 교양시키자는 예술 중심의 시각부터, 대중의 삶의 질을 고양하기 위해 문화의 자율성, 다양성, 공동체성을 원리로 문화예술교육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스펙트럼이 넓었다. 이 맥락은 현재 진행으로 중간 평가를 받으면서 버전을 업그레이드하거나 사양specifications을 달리하는 전환점을 마주하고 있지 싶다.
사회에 영향을 끼치는 문화예술교육
이렇듯 변질과 변화를 겪어온 문화예술교육의 두 가지 맥락 위에 있으면서도 또 다르게 새로운 맥락이 등장했다. 지난 5월 넷째 주에 열린 2011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 주간에 발표된 ‘2011 문화예술교육 정책비전’이다. 정책비전 1번 목표가 눈에 띈다. “문화예술교육은 사회문제에 포괄적 관심을 가지고 사회통합에 기여한다.” 이는 ‘예술을 위한 예술’ 또는 ‘향유를 위한 문화예술’과 각을 달리하면서 ‘사회문제의 솔루션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을 포착하는 발상이다. 여기에 2번 목표를 포개서 보면 그 맥락이 한층 또렷해진다. “문화예술교육 정책 대상을 학생과 취약계층에서 전 국민으로 확대한다.”목표 1과 2를 하나로 꿰면, 언뜻 정책 목표가 더 광범위해지고 더 추상화되었다는 착시도 불러올 수 있지만, 이 맥락의 차별성은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다. 향후 문화예술교육이 주목할 사회문제, 경청할 사회의 요청들은 학생이나 취약계층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전 계층의 온갖 문제이자 요청이라는 것. 이것이 “포괄적 관심”의 뜻이 아닌가 싶고 이를 “사회통합”이란 가치 기준의 통합적 솔루션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의 “기여”를 살피고 평가해보자는 발상인 셈이다.
좁혀서 보면 ‘예술을 위한 예술(교육)’과 ‘향유를 위한 문화예술(교육)’의 영토랄까 몫이랄까 하는 것은 따로 계속 있을 터이기에, 전체 사회계층의 문제이자 요청에 두루 관통할 시대의 발상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의 맥락은 더욱 차별화될 수밖에 없다. 이점에서 이번 정책 비전은 문화예술교육의 그간 정책과 견주어 볼 때 방향 전환의 뜻을 담고 있다. 남은 변수는 정책의 속도 조절이겠고 시범사업이나 첫 시도의 성과를 가늠하면서 ‘의미는 있으나 소폭 행보’가 될지 정책의 방향 전환을 보다 대중적으로 재확인하면서 ‘속도전을 분명히 하는 광폭 행보’가 될지 판가름이 이루어질 것이다.
사회통합의 가치를 보여 줄 행보 기대해
이점에서 대한민국 문화예술교육 주간에 사업 설명회를 가진 ‘별별 솔루션’ 공모사업은 문화예술교육 정책이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기업에 대한 선택적 지원에 나섰다는 의미를 넘어서 있다. 이 공모사업은 앞서 본 대로 전 계층의 문제와 사회의 요청에 대해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기업이 두루 관통할 수 있는 시대의 발상으로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를 보는 시금석으로, 여기에 어떤 족적이 남느냐에 따라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맥락이 앞의 첫째와 둘째 맥락과 다른 가치(“사회통합”)를 선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그러나 ‘예술을 위한 예술’과 ‘향유를 위한 문화예술’ 역시 “사회통합”의 가치에 기여하는 지라, ‘사회문제의 솔루션으로서 문화예술교육’이 “사회통합”의 가치를 드러내고 공유하는 새로운 면모를 통해서만 왜 다른 맥락인지를 증언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대체 무엇이겠느냐고 묻는다면 ‘별별 솔루션’ 공모사업을 펼쳐 보일 (문화예술 분야) 사회적기업들의 올해 모습을 잘 지켜봐야 할 것 같다. 다만 그 길이 전 계층의 문제와 사회의 요청에 대한 직접적인 수용이자 즉각적인 응답으로부터 출발해야 되지 않을까 싶고, 이로부터 문화예술에 관한 담론, 정책, 조직, 사업 전반에 걸쳐 정체성의 재조합에 열려있는 자기 파괴의 도전과 극단적인 혁신의 실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럼에도 그것이 대관절 무엇이냐고 다시 묻는다면, 이를테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술에 내재한, 예술 본연의, 궁극적으로는 예술로 귀결되는, 예술적인…’ 등등의 전통이나 원론이나 상징이나 관행과도 같은 일종의 ‘계급장’을 떼고서도 해당 사업과 조직이 사회적 지지를 획득하고 존립의 힘을 갖게 되며 담론의 생명력을 만들게 되는 그 모든 시행착오 속의 성공이라고. 한 마디로 예술이라는 말을 부러 싹 빼놓고서도 – 마치 신자유주의, 라는 개념을 쓰지 않으면 아무 것도 설명이 안 될 것처럼 하는 경우들처럼 – 그 쓰임새와 효능과 파급력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절박한 시대의 요청과 염원
문화예술교육에 새로운 맥락이 등장한 것은 그만큼 온갖 사회의 요청들이 절박하다는 상황의 반영이자 이를 제각각 처방하는 것이 아니라 두루 관통할 시대의 발상으로서 간절히 고대하는 염원이 크다는 뜻일 것이다. 이런 차원의 발상이 나오려면 혼자 득도해서 구하거나 누군가를 열심히 따라 해서 얻는 것은 아닐 게다. 주체의 극심한 몸살과 같은 변태의 과정을 통해 탈바꿈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문화예술의 생태계에 서식하며 문화예술교육에 주목하는 이라면 눈앞의 도도한 강(온갖 사회의 요청들)을 정말 건널 것인지, 건너기로 했다면 저 배(사회문제의 솔루션으로서 문화예술교육)를 탈 것인지, 강 저편(사회통합의 혁신적 실험 결과)에 당도했다면 배를 머리에 지고서 나아갈지(점진적 추구) 배를 강기슭에 두고서 내처 달려 나갈지(극단적 추구)를 누구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그럼 질문부터 바뀌게 된다. 맥락은 사건의 전말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하는 질문의 변화와 함께 진화하기 때문이다.
소비자 의사결정의 맥락효과라는 말이 있다. 예컨대 ‘사회문제, 솔루션, 혁신, 주체의 변화, 문화의 재구성, 예술의 가치’와 같은 말들을 이 순서대로 늘어놓았을 때 우리는 먼저 제시된 단어나 정보부터 맥락화하여 인지하기 때문에 나중 단어와 정보는 앞선 맥락 안에서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술적인 인생’이라는 순서의 서술은 예술적이지 못한 인생과 대비되는 맥락을 만들지만 ‘모든 인생은 예술’이라는 서술은 모든 인생이 다 예술이라는 전혀 다른 맥락을 만들어 의미의 전환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 이치대로 키워드를 질문으로 바꾼다면, 이번 유네스코 세계 문화예술교육 주간에 첫 선을 보인 문화예술교육의 새로운 맥락은 ‘별별 솔루션’의 경우에 무엇보다 참여 주체들이 질문을 어떻게 바꾸어 순서를 재배열하는가에 성패가 달려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것은 없다. 보지 못하던 것을 보게 되었기에 안 하던 것을 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정답을 내려놓고 질문을 바꿀 때 시작된다.

글_ 사단법인 씨즈 상임이사 김종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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