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불쑥 생각 하나
_ 노동
온몸이 움찔, 찔린 듯한 아름다움. 통 느끼지 못하다가 경주박물관 야외에 놓인 불상에 그만 찔리고 말았던 적이 있습니다. 찬연한 햇살을 뒤로 하고 아주 살짝 아래로 향한 그 각도에 반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런 차이를 만들 수 있을까? 발견해 낼 수 있을까? 오래 가지고 있는 고민입니다. 백석의 시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중 ‘사랑은 하고/눈은 푹푹 날리고’라는 구절에서 ‘은’대신 다른 말을 집어넣어 봅니다. ‘사랑을 하고/눈이 푹푹 날리고’, ‘사랑도 하고/눈도 푹푹 날리고’. ‘은’이라는 말이 오는 순간, 어떻게 이루어지는 걸까요? 실려 있는 생각과 관점이 드러날 때, 삶이 예술임을 발견하고 드러나게 하는 순간, 덮쳐오는 발견의 예술은 또 어떤가요? 솔루션으로써 접근하지만 미션의 해결 차원을 넘어 그 자체를 비평하며 미션의 근원에 대해 긴장을 유지하는 팽팽한 순간을 보게 되는 것은 또 어떤가요?
그러나 아름다움을 알게 되면 될수록 투여된 예술 노동과 숙련에 대가를 지불할 사회 구조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음 또한 알게 됩니다. 명동 창고극장을 지나갈 때 발견하게 되는 문구.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 없지만,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 작업실에서 만난 목수이자 작가인 누군가가 들려주셨던 말을 생각나는 대로 옮겨본다면 ‘투여한 노동시간 만큼의 작품 대가를 제안하는 것일 뿐, 예술 시장에서 매겨지는 값어치에는 동의하지도,관심 있지도 않습니다.’
얼마 전 간만에 함께 일하는 성원들과 토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는 제안을 누군가가 하기도 했고 마침 시간도 잠깐이나마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집중하고자 하는 사회적 가치와 사회적 과제, 그 과제를 택한 이유, 현재 우리가 하고 있는 접근 방법의 유효함에 관해 돌아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성원 중 한 명의 두어 문장이 귀에 와 박혔습니다. “예술의 순기능을 믿지만 그건 저의 믿음이고, 우리는 그 말을 묻어 두고 또 다른 가치와 접속하려고 하는데…. 숫자 혹은 뚜렷이 보이는 카피로 누구나 알기 쉽고 공감할 수 있게 만들기란 참, 또 한 번, 어렵네요.” 그래요. 묻어 둔다 친다면, 그 ‘월등함’이라는 쟁점과 별도로 ‘아름다움’을 생산하고자 하는 노동에 지불할 의사가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자유 시장이라는 건 언제 도래하는 걸까, 문득 오래된 책장의 책처럼 질문이 툭 떨어졌습니다. 은유로도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세계라면 가능할 수 있을까요? 20세기 말 추측했던 평균 소득 2만 불의 시대가 왔지만 엥겔지수는 너무도 높고 양극화 속 이웃들은 눈 감아도 선명합니다. 우리 예술 노동자도 거기에 월세 살고 있고요.
요즘 불쑥 생각 둘
_ 육아
신세도 지고 참여도 했던 하자마을 어린이방이 지난 3년 간의 여정을 마무리하며 저희 단체가 머물고 있는 하자센터에서 다른 곳으로 옮깁니다. 이주여성과 청소년, 여성(가장)이 함께하는 사회적 기업 ‘오가니제이션 요리’가 주도적으로 세운 어린이방인 이곳은 저희 단체의 어린이들도 머무른 곳입니다. 일하다가도 아이가 어찌 지내는지 금세 들러볼 수 있고, 점심 먹고 찾아 온 어린이들과 책을 함께 고르고 읽어줄 수도 있었던 곳이었죠. 돌이 갓 지난 아기를 어린이와 함께 돌보는 프로그램을 제안해 그 과정을 함께 지켜볼 수도 있었던 ‘비인가’ 어린이방이었습니다.
지난 3년 동안, 10대부터 50대까지 두루 모인 저의 일터 안에서는 어린이들이 태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여성이 많은 단체에 찾아오는 귀한 선물인 동시에 이제 부락이 나서야 하는 때가 점점 다가온다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고마운 선물이 많아졌으면 합니다만, 이는 한편 짧게는 1년에서 길게는 몇 년, 성원들의 노동과 업무의 분배, 시간의 설계가 달라져야 한다는 이야기기도 하고, 몸을 써 차이에 골몰하는 노동 특성을 지닌 작업자의 작업이 멈춤과 분절을 경험하게 된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영·유아의 경우 여러 가지 신경이 쓰이는데요. 아기를 맡길 곳이 마땅찮으면 때에 따라 멈춤이 길어져 단절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영·유아를 둔 여성에게 노동과 육아의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다는 것은 ‘일과 행복’이 그 관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이야기일 겁니다. 이는 일하는 여성 상당수가 겪는 고민이겠지요. 사회적으로 지불할 의사가 합의되기 쉽지 않거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노동일 경우 일로 얻은 소득의 대부분 또는 그 이상이 임신과 출산, 그리고 탁아에 지불될 수도 있습니다.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베이비 푸어’. 4대 보험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경우에 금세 닥쳐 오는 ‘워킹 푸어’. 하자마을 어린이방이 사라지면서 여하튼 저희 단체도 새로운 육아 해법을 찾아야 하는 때가 왔습니다.


겹쳐지는 상상
_ 조합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인디언의 격언 중 하나입니다. 일로 엮인 부락이 나서려면 아직 임신과 출산, 육아 문제가 체감되지 않는 20대 동료의 이해와 수고가 함께 필요해집니다. 최근에 대두한 ‘세대론’은 과거보다 계급 과제를 훨씬 더 잘 드러냅니다. 절박하고 불안한 자기 과제와 더불어 다른 세대에 대한 이해도 요구하게 됩니다. 예술 노동은 때론 숙련, 어떤 때는 지혜와 지식, 겪은 시간만큼 통해 아름다움의 차이 생산 가능성에 가까이 다가서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뛰어 넘으며 청년이 만들어내는 발언이 가장 놀라운 성취를 만들어 동시대와 접속하기도 합니다.
세대와 예술 생태계와 사회 속 다양한 이웃과 관계 맺는 그곳에, 조금 나은 차이와 성취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생산력’에 대한 갈망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잘 빚은 항아리와 같은 예술 작품을 만나려는 갈망과 노력과 노동이 거기에 있습니다. 예술가이자 동시에 교사로서 이웃을 만날 때에도, 마을과 지역을 재생하는 매개자로 작업을 시도할 때에도, 동시대와 긴장 관계를 팽팽하게 맺으며 아름다운 관점을 만들어 낼 때에도 이 사실은 유효합니다. 예술이 만나는 교육은 그 질적 도약과 예술적 순간을 빚는데 주목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술가란 고만고만한 작업에 안주하지 않고 자꾸 전진하며 기존 모델을 해체하면서 나아갑니다. 교육도 예술일 수 있습니다. 거기에 전업 예술과 누구나 예술이 만나는 공통분모와 잘 빚은 항아리에 대한 갈망이 있지 않나 합니다.
타 분야에 비해 아직은 빈약한 토대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의 어린이와 청소년 예술이 다행스럽게도 그 교집합에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교육과 예술이 만나는 곳. 육아와 생산물의 질적 비약을 함께 도모할 수 있는 곳. 차이를 만들어 내는 노동이 그제서야 실감나는 곳. 육아공동체, 교육협동조합, 예술협동조합이 만나는 곳. 함께 예술을 갈망하며 이야기하고 다듬고 매진하며 노동하는 곳. 공동육아가 이루어지는 곳은 교육장이자 아름다운 생산물을 만들어내는 연구소가 됩니다. 어린이를 돌보며 청년은 중년을 뛰어넘는 예술 작업물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함께 좀 더 아름다운 것으로의 질적 도약에 주목하게 된다면 요즘 제 주변에 맴도는 노동, 육아, 세대와 관련된 생각이 하나로 꿰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곳은 복지와 사회적 안전망과 생산력이 겹쳐지는 곳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거기에 어떤 장애물이, 어떤 생각하지 못했던 다른 관점이, 어떤 문제가 도사리고 있을까요? 제게 귀띔해 주실 수 있을까요?
관점과, 관점을 다룬 글의 경이로움과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지?’에 온통 관심이 팔려 있어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대단한 결과가 나왔던 것도 아니고 때로는 실패했다 싶기도 합니다만, 그게 문화기획자라는 이름을 붙여 업으로 하고 있는 제 관심사였습니다. 칼럼과 비평, 연구서는 제가 상상해 볼 ‘꺼리’를 제시해 주고 다양한 관점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그 글들과 관점을 받아먹는 사람이니 그런 글을 잘 차리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살다 보면 어떤 시기에 특정하게 꼬리를 무는 고민들이 하나로 연결되어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질문하고 상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처럼요.
글_ 문화기획자•문화예술 사회적 기업
‘이야기꾼의 책공연’ 공동대표 황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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