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은 무엇을 위한 곳일까요? 많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면 ‘미술작품을 보고 즐기기 위한 곳’이 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꼭 조용히, 침묵 속에 사색하며 작품을 바라보는 것이 가장 좋은 감상 방법일까요? 오늘은 정수경 미술이론가와 미술관이라는 ‘공간의 유희’에 대해 함께 생각해봅니다.

 

리움에서 무한도전을 찍는다면? 이 무슨 생뚱맞은 질문인가. 사실 정말로 리움에서 무한도전 촬영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건 아니다. 다만, 읽는 순간 참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기를 바랐을 뿐. 미술관에서 예능프로그램을 촬영하며 시끌벅적, 왁자지껄 웃고 뛰는 장면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면, 당신은 정말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다. 물론, 최초의 자유로운 영혼은 아니지만.

 

Marcel Duchamp

Marcel Duchamp. First Papers of Surrealism(1942)

 

1942년 10월 14일, 맨해튼 중심가의 한 저택에서 ‘초현실주의의 첫 번째 서류들’이라는 전시가 열렸다. 오프닝에 초대된 미술계 인사들은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아연실색했다. 파티션으로 나누어 그림들을 걸어놓은 전시장 여기저기 천장으로부터 엉킨 실타래가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이들이 전시장에서 떠들며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이런 기막힌 오프닝 아이디어는 마르셀 뒤샹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아이들의 공놀이는 일회적인 것이었지만, 실타래는 뒤샹의 작품이었고, 전시의 끝까지 그대로 설치되어 공간을 어지럽혔다. 관람객들은 차치하고, 전시 참여 작가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터져 나왔다. 뒤샹의 실타래 때문에 자신의 작품이 제대로 감상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뒤샹은 무슨 생각으로 이런 디스플레이를 기획했을까? 뜻밖에도 뒤샹의 대답은 간단했다. “뭐가 문제인가?”뒤샹은 문제가 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무심히 답했지만, 이 무심하고 자유로운 영혼이 만들어낸 해프닝은 미술관의 전시 관례에 대한 반성적 회고를 촉발했다. 출발점은 그곳에서 사람들이 느꼈던 불편함, 혹은 불쾌감이다. 반세기가 넘게 지난 지금도 우리는 미술관에서 사람들이 떠들면 눈살을 찌푸린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공공장소이므로. 하지만 공공장소도 나름이다. 워터파크에서 남들이 떠든다고 뭐라 할 사람은 없다. 관건은 그 공공장소가 무엇을 위한 곳이냐에 있다.

 

미술관은 무엇을 위한 곳인가? 어리석은 질문! 당연히, 미술작품을 보고 즐기기 위한 곳이다. 그렇다면, 작품을 보고 즐기는 가장 좋은 방식은 어떤 것인가? 조용히, 침묵 속에 사색하며 바라보는 것인가? 여러분은 혹시 어떤 그림이, 조각이 너무 좋아서 만져보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가? 또 그 감동을 같이 간 친구와 그 순간 당장 이야기하며 나누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가? 그림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서 친구에게 묻고 싶은 적은? 그래서, 그렇게 했던가? 아니라면, 당신은 미술관 에티켓에 발목이 잡혀 있다.

 

미술관 에티켓이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몰랐고 뒤샹은 알았다. 프랑스 출신인 뒤샹은 미술관 에티켓이 근대박물관의 효시인 루브르의 개관 이후, 그러니까 상당히 최근에 와서야 정립된 줄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에티켓이 감탄스러운 작품 앞에서 인간이 보이게 되는 타고난 자연스러운 반응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도. 미술관 에티켓은 애초에 문화유산을 학습 자료로 삼아 대중들을 교육하려는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다. 지금도 미술관은 교육기관으로 분류되고 교육 프로그램들은 미술관 사업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이제 교육을 받기 위해 미술관을 찾는 것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불과하다.

 

지금 우리는 ‘즐기기 위해’ 미술관을 찾는다. 낭만주의의 세례를 받으면서 미술은 ‘미술을 위한 미술’, ‘유미주의’를 새로운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미술작품은 교육 자료가 아니라 유희의 대상으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전시와 관람의 에티켓도 교육에 적절한 방식에서 유희에 적절한 방식으로 변해야 할 터이지만, 미술관 에티켓은 그대로 이어져 왔다. 가까이 가지 마시오, 만지지 마시오, 떠들지 마시오. 도대체 어떻게 즐기란 말인가?

 

리움의 야외 전시장에는 루이스 부르주아의 걸작 ‘마망’이 있다. 알을 한껏 품은 어미 거미를 모티프로 한 이 작품은 모성애에 대한 놀랍도록 새로운,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준다. 찔리면 바로 죽을 것 같이 무시무시한 청동 다리를 8개나 가지고 있는 거대한 거미가 연상시키는 모성애는 어떤 것일까? 거미는 독을 연상시키고, 공격성을 떠올리게 한다. 어미는 그런 것이다.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표독스럽게 공격적이 될 수도 있다. ‘마망’의 어미 거미는 배에 품은 알집을 네 쌍의 다리들로 감옥의 창살마냥 둥글게 둘러 지킨다. 이 작품을 가장 잘 즐길 수 있는 감상의 자리는 어디일까? 어미 거미의 다리 창살 안, 알집의 바로 아래가 아닐까? 그 ‘안’에서 알집을 올려다보는 것은 기묘한 감정적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자리를 점하려다 황망히 쫓겨났다. 테이트 모던에서는 누구나 점할 수 있는 그 자리를, 에티켓도 모르는 무례한 관람자가 되어.

 
 

루이스 부르주아 마망

서울 리움 미술관의 마망   런던 테이트 모던의 마망   도쿄 모리타워의 마망

 

몇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어떨까? 리움에서 무한도전을 찍는다면. 이건 미술관이 예능프로그램에 문을 열어야한다는 뜻이 전혀 아니다. 무한도전을 즐겨보는 이들이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고정관념과 틀을 깬 미술관 유희에 대한 나의 바람을.

 

정수경

글 | 정수경 (미술이론학자)

서울대학교 미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했다. 우리의 삶에서 미술이 무엇이었고, 무엇이며, 또 무엇이면 좋을지에 대해 미술현장과 이론을 오가며 고민하고 있으며, 고민의 결과를 글과 강의로 풀어내고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강의하고 있다. 동시대 미술에 관심이 많으며, 최근에는 국내의 젊은 작가들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