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내일의 불안을 덜어주는 영화에 관한 이야기
J. 페페 저
공감의 기쁨 | 2013.04.01
빵 굽는 사람 중에서도 장인 급에 해당하는 사람은 날마다 다른 식빵의 질감과 향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비가 내리는 날의 식빵, 건조한 날의 식빵, 몹시 추운 날의 식빵, 그리고 어떤 메이커의 식재료를 사용했을 때의 각각 다른 식빵. 슬프고 괴로운 마음으로 구워낸 식빵과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구워낸 식빵도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요즘 내가 인물드로잉을 배우고 있는 선생님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미술용 연필에 대해서도 각각 다른 얼굴들을 알고 있다. 각 브랜드별로 어떤 것이 더 유분이 많은지, 그 유분에 따라서 그림은 어떻게 달라지는지. 그리고 종이의 결에 따라 선은 어떻게 다르게 보이는지, 연필심을 눕혔을 때와 세웠을 때 어떤 느낌의 선이 나오는지.
그만큼 많이 알고 그만큼 많은 세월을 함께 보낸 것, 그리고 어떤 마음과 애정을 가졌는지에 따라 우리는 훨씬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무심하게 데면데면할 수도 있다.
영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가르치는 시간”의 저자 J. 페페는 삶을 연구하는 문화집시라는 간략한 프로필에서 범상치 않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만, 왜 그녀가 자신을 굳이 자세히 소개하지 않으려 했는지 책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영화를 보고 영화를 통해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했던, 그 수많은 기록들을 통해 자신을 그대로 알리고 싶었을 게다.
그런 행위를 보고 있는 나는 처음에는 불편하기도 했다. 우리가 흔히 책을 고를 때 보는 것이 상세한 저자소개이며, 이 책처럼 영화에 관련된 책이라면 각 챕터마다 다루고 있는 영화에 대해 간략한 소개라도 주었어야 했지 않았나 하는 불평 아닌 불평.
저자소개를 통해서 우리는 저자의 전문성을 따진다. 이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할 만한 분이었군. 이 사람은 영화평론을 전공했으니 믿을 만 하겠군 등등. 영화에 대한 정보를 꼼꼼히 페이지마다 넣어준 책이라면 “아, 이 책 만든 편집자들이 성의를 보였네. 그렇지. 역시 이 감독에 이 배우니까 이런 좋은 영화가 나왔지.”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런 정보 하나 없이 덜렁 맨 몸과 맨 마음으로 다가온 책 “우리를 가르치는 시간”. 나 역시 꽤나 영화를 즐기고 좋아하는 사람인데도 실상 아는 영화가 채 절반이 되지 않는다는 불편한 진실까지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책을 읽어 내려가면서 나는 이 책을 쓴 사람의 시선과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영화와 함께 세상을 겪어내고 있는 삶의 철학가, 스크린의 문화집시를 만날 수 있었다.
삶이 녹록치 않을 때면 극장에 가라.
너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가운데 다른 삶을 엿볼 수 있다.
영화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주인공들의 삶을 상상해 보라.
비극적인 삶, 화려한 삶, 성공한 삶, 사랑하는 연인들의 삶, 헤어진 연인들의 삶, 예술가의 삶, 전장에서의 삶…….
그 가운데 바로 우리의 삶이 있다.
누군가의 비극에 마음이 아팠다면 이미 그 삶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삶을 통해 함께 아파하고, 울고, 웃고, 긴장하고, 기뻐하며 자신의 삶을 재정립할 수 있다.
– 서문에서
이 책은 모두 여섯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의 챕터를 힐링팝콘 1, 2, 3과 같이 제시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 책 속의 이야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대를 독자들을 향해 보내고 있다.
나의 삶을 바꾼 것처럼 누군가의 삶에 기분 좋은 변화를 주고 그런 변화의 기쁨을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준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일정 온도에 도달하면 톡-톡-톡- 연쇄적으로 터져 풍성해지는 팝콘처럼.
– 서문에서
힐링팝콘 첫 번째는 ‘손이 할 수 있는 위대한 일’로 위안의 손, 사랑의 손, 치유의 손과 같이 다양한 손에 시선을 돌린다. 두 번째 ‘삶이 버거운 날’은 혹독한 삶의 무게를 뚫고 나가게 하는 사랑과 믿음의 이야기이고, 세 번째는 ‘길들인다는 것’으로 관계 맺기에 대해 말한다. 네 번째 ‘영혼을 위로하는 한마디, 괜찮아!’에서는 친구와 이웃이 건네주는 위로가 주는 치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다섯 번째 ‘물음표가 느낌표로 바뀌는 순간’에서는 삶의 깨달음을 얻는 순간들을 이야기한다. 저자는 ‘세상을 향한 물음표 때문에 답답하고 때로는 그 의미를 찾는 일을 포기하고 싶지만, 신기하게도 사실은 그 물음표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여섯 번째 ‘우리를 가르치는 시간’은 시간여행자에 관련된 영화를 여러 편 소개하며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여행이라는 흥미로운 주제조차 결국에는 현재로 돌아오기 위한 장치이며, 현재라는 삶을 좀 더 의미 있게 살아내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시 서문으로 돌아가면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나요?”라는 남학생의 질문이 등장한다. 사실 맞는 말이다. 한낱 오락거리가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겠는가. 적어도 영화는 혁명가의 무기가 되어선 안 된다. 영화를 보았다고 해서 영화처럼 살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기엔 우리 삶은 너무나 바쁘고 고달프니까. 이때 저자는 일본 홋카이도 조선학교 아이들의 일상을 다룬 「우리 학교」를 연출한 김명준 감독을 만나게 된다.
“영화는 세상을 바꾸진 못합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것입니다.”
60편의 영화를 통해 톡-톡-톡- 팝콘처럼 터져 나와 풍성해지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를 포함한 많은 독자들이.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조금씩 변화시켜 나가기를 소망한다.
“항상 소통의 공간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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