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일입니다. 초등학생인 큰 아이가 크게 칭찬받을 일을 해 소원을 물었습니다. 네일숍에 가는 것이랍니다. 예상 밖의 답안에 적잖이 놀랐지만, 엄마 체면에 말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죠. “알록달록 손톱에 색을 칠하고 학교에 가는 것이 썩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다”고 하자 아이가 쉽게 수긍을 합니다. 그래서 나온 타협안이 방학 중 어느 한 날 네일숍에 들르는 것이었습니다.

 

드디어 그날, 유치원생 둘째까지 데리고 아파트 상가 네일숍에 갔습니다. 네일숍이 처음이었습니다. 이용 방법도 요금도 잘 몰랐지요. 쭈뼛거리는 사이 네일 아티스트가 둘째 앞으로 분홍색 매니큐어를 대령합니다. 둘째는 분홍색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노란색과 연두색도 참 좋아합니다. 아이가 색을 직접 선택하도록 해도 될지 물었습니다.

 

“여자 아이들은 분홍을 좋아해서 고른 거다. 골라보라.”며 답했지만 네일 아티스트는 심기가 불편한 모양입니다. 둘째는 눈치가 빠릅니다. 분위기가 살짝 험상궂어지자 그냥 분홍색을 칠하겠다고 합니다. 그렇게 둘째 아이 손톱에는 분홍색이 칠해졌습니다. 열 살 배기 첫째는 자신의 차례가 되자 씩씩하게 네이비블루를 골랐습니다. 네일 아티스트가 의아해합니다. 아마 그 분에게 자연스러운 세상은 윤정미의 〈핑크 프로젝트〉같은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분홍색 옷을 입은 여자 아이가 온통 분홍 세상에 앉아 있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색은 분홍이야” 이렇게 말할 것 같은 분홍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숨결마저 분홍빛일 것 같습니다. 혹시 여자 아이들이 분홍색을 좋아하고, 남자 아이들이 파란색을 좋아하기를 바라는 것은 우리 사회가 아닐까요?

 

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분홍은 공주의 색, 파랑은 왕자의 색입니다. 하지만, 서양미술의 역사에서는 오히려 반대입니다. 분홍은 작은 빨강이었습니다. 빨강은 왕의 색깔입니다. 그러니 분홍은 왕자쯤 되겠군요. 간혹 마주하는 서양 명화 속 등장인물 중 분홍색 원피스를 입고 등장하는 아이들은 공주가 아니라 왕자인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 파랑은 좀 복잡합니다. 사회적 의미가 가장 많이 변한 색이라고 해야 할까요. 처음에는 천박한 색이었지요. 파란 눈동자를 가진 사람들은 이유 없이 천시를 당했습니다. 그러던 파랑이 성스러운 색이 된 것은 성모마리아가 파란 색 옷을 입으면서부터였습니다. 그 후로 파란색은 모성을 상징하는 어머니의 색이 되었습니다. 천박한 색에서 성스러운 색으로 신분 이동을 한 파랑은 오늘날 대중의 색입니다. 청바지가 출현하면서 의미가 다시 변한 것이지요.

 

좋아하는 색 때문에 오해받고 눈치 보지 않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또 그런 세상이 되기를 바라봅니다. 공주인지 왕자인지가 아니라 좋아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을 묻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글 | 미술평론가 공주형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수근론’으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고재 갤러리 큐레이터로 10년간 활동하였고, 2001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아이와 함께 한 그림』, 『색깔 없는 세상은 너무 심심해』, 『천재들의 미술노트』,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 등이 있다. 현재는 세 아이를 키우며 미술과 사람 사이에서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전시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