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사랑의 상처가 두려워 관계를 시작할 때부터 그 같은 사랑의 속성을 기꺼이 인정하는 연인이 있다. 여기 언젠가 닥칠 상실에 대한 공포로 애초에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으려는 젊은이가 있다. 또한 여기의 그는 인간이라면 거스를 수 없는 죽음과 소멸에 대한 걱정스런 마음으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있음과 사라짐, 생성과 해체가 반복되는 쪽을 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회적으로 금기시 됐던 자신의 사랑에 전적으로 열중했고, 원하는 누구나에게 나눠줄 수 있을 만큼 무한히 풍요로운 무엇을 가졌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사라짐으로써 지속적으로 부활하고 파괴됨으로써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역설적인 운명의 존재방식을 미술에서 고안했다. 쿠바 출신 유색인 이민자이자 동성애자로서 1980~90년대 당시 미국사회에서는 소수자일 수밖에 없었던 이. 하지만 미술가로서 사후(死後) 이십여 년이 다 돼 가는 현재도 그 예술만은 생생하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이.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Félix González-Torres)가 바로 그다.

 

1957년 쿠바 구아이마로(Guáimaro)에서 태어나 1996년 미국 마이애미에서 후천성면역결핍증(AIDS)으로 생을 마감한 곤잘레스-토레스. 39년의 짧은 생애 중 십여 년을 현대미술가로 살았던 그의 예술세계를 비평가들은 기쁨, 아름다움, 멜랑콜리 같은 “감정과 느낌의 경험”을 담은 미술, “상실감, 사랑, 욕망, 죽음, 그리고 애도를 말하는 부드럽고 우아한 속삭임”의 미술이라고 평한다.1)

 

또 어떤 큐레이터는 “곤잘레스-토레스의 이상적 세계에서는 사람들이 홀로됨을 견디지 않는다. 그들은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사랑하는 한 쌍으로 살아가고, 더 이상 불치병이나 원인불명의 질병으로 너무 이른 때 이별할 위험이 없다.”2) 고 썼다.

 

곤잘레스-토레스는 어떤 미술을 했기에, 혹은 그의 작품들이 어떠하기에 미술계 사람들이 이 같이 말하는 것일까? 비평가 개개인의 미적 판단과 큐레이터들마다의 취향을 발화의 당사자가 아닌 우리가 정확히 가늠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위의 인용들에서 공통적으로 두드러지는 점은 논자들의 의견이 하나같이 ‘감상적(sentimental)’으로 들린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외견상 그들은 예술을 평하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곤잘레스-토레스 미술의 핵심이 감정, 느낌, 사랑, 이별 등 인간 일반의 감각 및 감상성이라고 정의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사실은 논자들부터 감상적이 되어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곤잘레스-토레스 미술의 강점이다. 즉 그 미술이 우선 감상자 개인의 마음을 움직여 그/녀가 여하한 사회적 겉치레를 벗고, 자기 내면에 충실한 지각과 감정으로 온전히 작품과 만나도록 이끄는 힘을 가진 미술. 말하자면 비평가 또는 큐레이터부터 벌써 한 명의 감상자로서 곤잘레스-토레스 미술의 주관적이고 정서적인 차원에 깊이 물든다. 또한 소위 지식인이나 전문가라면 일종의 속물적 태도로서 사랑이나 이별을 다소 진부하고 낯간지러운 주제로 여기게 되는데, 그러한 자기검열에 앞서 매혹 당하고, 그 감정과 느낌을 밖으로 표현해 서로 어떻게든 공감하고자 하는 미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곤잘레스-토레스의 미술은 전적으로 작가 개인의 삶과 구체적 경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작품들이 누군가의 일기장처럼 은밀하면서도 소박하게 일상의 편린을 나열하거나, 순정만화처럼 사건과 감정을 다소간 나이브하게 묘사할 것이라 넘겨짚으면 곤란하다. 또 반대로 그 미술이 대수롭지 않은 사적 경험을 ‘명작(master piece)’ 또는 ‘작품(oeuvre)’이라는 이름 아래 과대포장하면서 우월한 태도로 감상자를 배제할 것이라는 식의 선입견을 갖지 않았으면 한다. 그와는 달리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들은 누구나 하는 사랑, 누구나 언제고 겪게 되는 상실, 누구나 맞이할 수밖에 없는 이별 또는 죽음을 오직 자신만의 경험, 자신만의 시각언어, 자신만의 감성으로 형상화한다. 동시에 그 ‘누구나’라는 공통성을 기반으로 감상자 ‘각자’의 고유한 경험과 생각과 취향이 작품 수용에서 발현될 수 있도록 작품 형식부터 전시 방식 및 컬렉션 조건에 이르기까지 새로 창안된 것이다. 이를테면 상대방과 완벽히 일치하는 사랑을 꿈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차이가 벌어지는 사랑의 속성을 동일한 공산품 시계 두 개로 육화한〈무제 (완벽한 연인들)〉(“Untitled” (Perfect Lovers)). 관객들은 작품의 일부인 사탕이나 인쇄된 종이를 원하는 대로 가져가 자신이 원하는 목적으로 쓰고3), 전시 주최 측은 작가가 남긴 설명서에 따라 작품을 설치하고 관객이 가져간 만큼의 양을 무한히 보충함으로써 작품의 현존과 부재를 지키는 방식의 설치작품 〈무제 (플라시보)〉(“Untitled” (Placebo)) 또는 〈무제 (출현)〉(“Untitled” (Aparicion)). 거기서는 동성애냐 이성애냐의 구분보다 ‘나’ 자신의 사랑이라는 가치가 앞서고, 작가의 의도가 먼저냐 관람자의 해석에 주도권이 있냐를 따지기 전에 개별적인 차이와 다양한 형태의 공감이 존중 받는다. 또 물질적인 작품의 소유가치보다 더 큰 가치, 요컨대 익명의 불특정 개인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예술을 향유하고 서로 공유하는 가치가 갈채를 받는다.

 

 

그의 작품 중 〈무제 (플라시보)〉를 예로 들어보자. 그것은 은박지로 싼 무수히 많은 사탕들을 전시장 바닥에 직사각형 형태로 얕게 깔아놓고 관객들이 편히 가져가도록 한 설치작품이다. 첫 선을 보인 1991년 개인전뿐만 아니라, 작가가 죽고 난 이후에도 전시를 위해 매번 새롭게 제작 및 설치되는 일이 허용돼 있는 그 작품은 곤잘레스-토레스가 자신의 연인이 에이즈로 죽어가는 과정을 옆에서 지키며 생각한 사랑과 이별, 상실과 기억하기, 소유와 나눔 같은 문제를 형상화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관객은 그 사탕더미 또는 그 낱낱이 어떤 조건을 취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상관없이 각자의 자유로 향유할 수 있다. 그 자유, 그 향유가 곧 곤잘레스-토레스가 자신의 작품으로 감상자에게 주기를 원했고, 자기 작품이 되기를 바랐던 바다. 다음과 같은 작가의 말이 그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나는 당신에게 이 달콤한 것을 준다. 당신은 그것을 집어 들어 입에 넣고 누군가의 몸을 빤다. 그리고 이런 방식으로, 나의 작품은 수많은 타인들의 몸의 일부가 된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단지 몇 초 사이, 나는 누군가의 입에 뭔가 달콤한 것을 넣어주는 것인데, 그것은 무척 섹시하다.”4)

 

이렇게 누군가의 안에서 녹아 타인의 일부가 되는 미술, 그것이 곧 곤잘레스-토레스의 미술로부터 본격화된 현대미술과 감상자의 공감적 관계다.

 
 

 

 


1) 권미원, 「예술작품의 생성: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 부활의 가능성, 나눌 수 있는 기회, 일시적 휴전」,
〈Felix Gonzalez-Torres: Double〉 전시 도록, 서울: 플라토, 2012, p. 121을 참조할 것.

 


2) 곤잘레스-토레스가 사망하기 1년 전인 1995년 그의 개인전을 기획한 구겐하임 미술관 큐레이터 낸시 스펙터의 말이다.
Nancy Spector, Felix Gonzalez-Torres, New York: The Solomon F. Guggenheim Foundation, 1995, p. 143.

 


3) 우리는 그 모습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다.
 http://artistsbooksandmultiples.blogspot.kr/2012/01/felix-gonzalez-torres.html

 


4) Nancy Spector, 같은 책, pp. 147-150.

이미지 출처
 http://wcma.williams.edu | http://www.flickr.com
Félix González-Torres 작가 정보 더 보기
 http://www.andrearosengallery.com | http://www.plateau.or.kr

 

 

글 |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미술평론가 강수미

시각예술, 미술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고 미학과에서 박사학위(발터 벤야민 사유에서 유물론적 미학 연구)를 받았다. 2005년 《번역에 저항한다》 전시기획으로 올해의 예술상(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7년 제 3회 석남젊은이론가상 (석남미술이론상운영위원회)을 수상했다. 지난 해 출간한 《아이스테시스》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철학 분야로 선정되기도 했다. 통찰력 있는 강의로 명쾌한 이해를 끌어내는 미술평론가 강수미는 깊이 있는 문화예술 이야기, 미술 세계를 통해 인간의 삶과 문화예술의 기원에 대한 전문가적 해석을 들려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