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되는 노년기를 우리가 너끈히 통제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인생이라는 여행길은 언젠가 끝날 것이 자명하지만
 그 기간뿐 아니라 여러 단계로 그 길을 나누는 방식, 안락과 즐거움의 정도는 본질적으로 우리에게 달렸다는 점을,
 나는 과감하게 주장한다.


 

1853년 영국 의사 바너드 반 오벤은 자신의 책 한 구절에서 건강한 노년에 도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을 이렇게 단언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현실 속 노년은 정말 두 세기 전에 통제 가능한 노년에 대해 긍정했던 그의 주장이 실현되는 장일까요.

 

‘저렇게 아름답고, 품위 있게 나이 들 수만 있다면.’ 간혹 그림 속에서 우리는 멋진 노년과 조우하기도 합니다. 18세기 독일의 화가 자이볼트(Christian Seybold, 1695~1768)의 〈그린 스카프를 걸친 노파〉처럼요. 세월의 흔적이 탄력을 잃은 피부와 깊게 팬 이마와 눈가의 주름살에 확고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림과의 첫 만남에서 우리의 시선은 담담함과 고요함이 깃든 눈동자에 사로잡힙니다. 세상을 응시하는 흔들림 없이 주인공의 눈빛이 존경스럽습니다. 젊음이 섣불리 흉내 낼 수 없는 연륜의 무게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모든 노년이 〈그린 스카프를 걸친 노파〉와 같이 차분하고, 품위 있게 통제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모양입니다. 18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기수 제리코(JThéodore Géricault, 1791~1824)가 그린 노년의 여성들을 보며 생각해 봅니다.

 

1819년 가을, 화가는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게 됩니다. 바로 그 해 미술의 역사에서 기념할 만한 순간을 만든 〈메두사호의 뗏목〉이 발표되지요. 그도 그럴 만합니다. 이 그림은 바다 위에서 벌어진 표류자들끼리의 13일간의 폭동과 살인 그리고 식인 행위 등(에 대한)의 끔찍한 사건을 다룬 것입니다. 그는 이 사건을 예술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남 다른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시체공시소와 의과대학에서 직접 시체를 관찰했고, 프랑스 혁명기 단두대에서 잘린 머리들과 절단된 사지들을 연구 한 후, 그리기도 했지요. 결코 유쾌한 경험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림이 완성되는 과정에서 그는 이미 지쳤겠지요. 게다가 〈메두사호의 뗏목〉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그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의 마음의 병은 전문가 도움을 받아야 할 만큼 더 깊어졌습니다.

 

숙모와의 사이에 사생아를 낳고, 센 강에 몸을 던져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서른 한 해 짧은 생을 격정적 사건 속에서 살다간 화가는 치료 중 그림을 의뢰받습니다.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의 병명만 확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담당의사는 그를 복잡다단한 인간의 내면을 표현해 줄 적임자로 확신하였습니다.

 

〈도박에 빠진 여인〉과 〈질투에 사로잡힌 여인〉은 우울증 치료로 인연을 맺은 담당 의사가 의뢰한 광기에 사로잡힌 이들의 초상 중 일부였습니다. 그림 전체에 불안정하고, 기이한 분위기가 감돕니다. 보는 이를 뒤숭숭하고, 조마조마하게 하는 기류는 주인공들의 시선에서 비롯됩니다. 분명 어딘가를 향하고 있지만 〈도박에 빠진 여인〉의 공허한 동공에는 초점이 없습니다. 병적인 시선이 현실 세계에 닿지 못하기는 〈질투에 사로잡힌 여인〉도 마찬가지입니다. 바깥세상에 시선을 던지고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만의 세계에 갇힌 채 나이 들고 있습니다.

 

노년은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랍니다. 7세기의 대주교 이시도루스는 노년은 우리를 쾌락과 욕망에서 해방시킨다는 점에서 좋지만, 우리 신체를 쇠약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나쁘다고 평했습니다. 하지만 중독과 망상에 사로잡힌 이들의 노년은 단점투성이인 것만 같습니다.

 

고령화 사회의 진입을 코앞에 두고 노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습니다. 노인이라는 존재와 노년의 의미는 1970년대 《노년》에서 시몬 드 보바르가 쓴 것처럼 ‘부끄러운 비밀, 금기시된 주제’를 넘어 당당히 사유해야 할 사회적 화두로 자리 잡았습니다.

 

 노년에는 스스로 싸우고, 권리를 지키며, 누구든 의지하려 하지 않고,
 마지막 숨을 거두기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려 할 때만 존중받을 것이다.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노년에 대한 사유의 다양함이 담긴 팻 테인의 신간 《노년의 역사》에서 가장 마음에 남는 구절은 노년에 대한 키케로의 언급이었습니다. 하지만 노년에 관한 멋진 그의 말이 현실에서도 꼭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노년의 역사》 출간과 함께 노년은 무작정 견뎌야 할 시련의 시기가 아닌 그 자체로 즐겨야 할 삶의 단계로 ‘올바르게’ 인식해야 한다는 행복한 담론이 차고 넘쳤던 10월 말, 치매를 앓던 부인을 꼭 2년간 정성껏 간호하던 70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하고 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70대의 남편도 아마 키케로가 말한 것처럼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스스로를 통제하는 존중받는 노년을 꿈꾸었을 것입니다. 100세 시대 나눠야 할 미담이 아닌 비극적인 사건이 되어 버린 70대 부부의 이야기가 안타깝습니다. 행복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노년이 보장되는 사회를 상상해 봅니다. 노년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사회적 차원의 책임감 있는 성찰 없이 노년에 대한 장밋빛 담론만 이어진다면 상상은 현실이 되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장담 또한 어려울 것 같습니다. 100세 시대, 우리 노년 또한 적어도 완전한 하나의 비극은 아닐 것이라고 말이지요.

 

글 | 미술평론가 공주형

홍익대학교 예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수근론’으로 미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학고재 갤러리 큐레이터로 10년간 활동하였고, 2001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부문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사랑한다면 그림을 보여줘』, 『아이와 함께 한 그림』, 『색깔 없는 세상은 너무 심심해』, 『천재들의 미술노트』, 『착한 그림 선한 화가 박수근』 등이 있다. 현재는 세 아이를 키우며 미술과 사람 사이에서 글을 쓰고, 강의를 하고, 전시를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