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구의 정신사는 데카르트 이래로 신체와 정신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전통을 갖고 있다. 이러한 전통에 따르면 신체에 속하는 뇌는 물질작용에 불과하며 정신은 그와는 독립된 심적 실체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핀으로 환자의 손을 찌르면 그 신호가 뇌에 도달하는데 20밀리 초가 걸린다. 그러나 환자가 그걸 느끼고 보고하는 데까지는 0.5초(500밀리 초)가 걸린다. 이것은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솜씨를 요구하고, 계획적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의 상당 부분이 너무 빨리 일어나서 우리가 의식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당신이 무언가를 의식하기 전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고, 벌어진 후에야 그것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의식이 이 판단을 내렸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뇌는 이럴 때 어떻게 작용하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듯하다. 내가 그렇다고 확신하는 어떤 판단이 실은 나의 자유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뇌의 생리학적 작용에 의해 결정된 것을 내 의식이 나중에서야 합리화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뇌는 스스로 활동하는 물질이다. 이 뇌를 통과하지 않고는 어떤 감각활동, 인식, 운동 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음악도 인간의 활동인 한, 뇌의 물질작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제부터 이 글은 음악과 관련된 뇌의 이야기를 시작해 보려고 한다.

 

 

1. 듣는 것과 들리는 것

 

“당신은 어떻게 듣느냐”
“나도 모른다. 다만 나는 몸으로 듣는다 내 몸을 열어서 듣는다. 당신은 어떻게 듣느냐”
“나는 귀로 듣는다”
“귀로 듣는다는 것이 무슨 뜻이냐, 귀로 무엇을 듣느냐”

 

이 질문에 당신은 답할 수 있는가? 에블린 글레니는 완벽한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세계적인 타악기 연주자다. 그녀는 뺨으로, 맨발로, 손끝으로 진동을 느끼고 외운다. 귀로 듣지 않는 그녀를 통해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음악의 가장 기본을 이루는 ‘소리’는 물질 혹은 공기의 진동이다. 그러므로 그 진동은 귀로도 느낄 수 있지만 다른 기관으로도 느낄 수 있다. 아무도(동물도) 없는 숲에서 나무가 쓰러진다면 거기에는 아무 소리도 없다는 사실은 단순한 진실이지만 놀라운 일이다. 거기에는 ‘진동’만 있을 뿐이다. 우리의 뇌를 통과해야만 ‘소리’로 인식된다. 물분자가 뜨거워서 끓는 물이 뜨거운 건 아니다. 무지개가 일곱 빛깔을 가진 일곱 가지 종류의 분자들로 나란히 배열되어 있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현상들은 인간 혹은 동물의 뇌를 통과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에블린 글레니는 우리와는 다른 방식이긴 하지만 진동의 차이를 뇌로 보내 높은 소리와 낮은 소리, 큰 소리와 작은 소리를 구별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의 귀는 들리는 모든 것(진동하는 모든 것)을 듣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가청영역이라는 것이 있다. 즉 20Hz에서 20,000Hz 사이의 진동 주파수를 가진 소리만 들을 수 있다. 그나마 60세가 넘으면 내이의 유모세포가 경화되어 15,000Hz 이상의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그럼, 가청영역 내에 있는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어떤 일에 집중하면 다른 사람이 부르는 소리도 잘 못 듣는다. 또 어떤 경우에는 없는 소리도 있는 소리처럼 듣기도 하는데, 배음렬에 기초한 근본 주파수가 빠져 있어도 들리는 현상이 그런 것이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몇몇 동물들도 그러하다.

 

그런데 이러한 착각이 특별한 예외는 아니다. 우리의 듣는 행위 자체가 ‘왜곡’을 포함한다. 우리는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과 트럼펫의 소리를 분리해서 듣는다. 그러나 20여 대의 바이올린 소리를 따로 구분해서 듣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트럼펫의 배음을 하나하나 듣지 않고 1대의 트럼펫이 연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넓은 잔디밭을 보면서 잔디 잎을 세세하게 보지 않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이를 지각의 ‘무리 짓기’라고 하는데, 이 현상은 어느 정도는 자동적인 과정이다. 그래서 지각심리학자인 로저 셰퍼드는 우리의 지각 체계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우리가 보고 듣는 세상은 ‘왜곡(?)’되기 마련이라고 말했다.

 

우리의 지각은 왜 이러한 ‘왜곡(?)’을 할까? 진화심리학자들은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 필연적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언제 맹수의 공격을 받을지 모르는 숲 속에서 공기의 진동을 감지하는 것은 원시인류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작은 잎사귀의 움직임도 감지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러한 정보들은 늘 완전하지 않다. 예를 들어, 나무에 가려진 호랑이는 꼬리만 보고도 호랑이임을 알아야 한다. 또 25개도 넘는 잣나무와 10마리도 넘는 원숭이, 4마리의 뱀 등 너무 많은 정보들을 일일이 판단하고 있을 수 없다. 재빨리 어느 것이 위험하고 위험하지 않은지 분류하여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살아남는다. 그러면서 인류에게는 이러한 ‘무의식적 추론’이 의식도 하기 전에 재빨리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우리가 듣는다는 의식적 행위는 어떤 것은 생략하거나 보충하는 뇌의 자동적 해석(?)이 이미 진행된 후에 의식되는 것이다.

 

듣는 것과 들리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것, 뇌가 하는 모든 일을 우리가 의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음악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준다. 창조의 순간에도, 청취의 순간에도, 무엇보다 먼저 200만 년 전부터(초기 호모속의 출현) 형성되어 세대를 거치며 형성되어 온 유전자와 신경세포의 반응 시스템이 작동된다. 우리가 음악을 들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이유 중 하나는 200만년 전부터 전달되어 온 신경세포의 반응 때문일 수 있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음악, 함께 노래를 부른 것뿐인데 너와 내가 하나가 된 듯한 느낌, 락콘서트장에서 혼절하는 아이들, 시끄럽다 하면서도 비트 있는 음악을 들으면 먼저 어깨부터 들썩이는 현상, 음악의 이러한 측면들은 지금까지의 음악미학이나 음악철학이 다루지 않았던 주제들이지만 우리의 삶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음악적 현상들이다. 뇌의 시대에 밝혀지는 음악과 관련된 신경과학적 결과들은 이러한 현상들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음악의 강력한 힘에 대해 새삼 깨닫게 해 줄 것이다.

 

이미경의 뇌의 시대에 밝혀지는 음악의 비밀 시리즈
 ▶(1) 듣는 것과 들리는 것 – 세계적인 타악기연주자 에블린 글레니의 비밀
  (2) 음악과 의사소통 – ‘Hmmm-‘ – 백만년 전 전인류의 뇌에서 발견된 음악의 비밀
  (3) 음악과 동작 – ‘(읍!—) 오빤, 강남스타일’에 숨겨진 비밀

 

글 | 음악학자 이미경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작곡과 이론전공, 동대학원 음악학과를 졸업한 후, 독일 프랑크푸르트 예술대학에서 음악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2005년부터 2009년까지 한국예술종합학교 내 한국예술영재교육연구원에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연구센터에서 일하였으며, 현재는 전남대학교에 재직 중이다. 관심분야는 음악철학, 음악 미학적 분석과 음악적 창의성, 음악영재교육 등 다양하다. 다수의 음악미학과 한국작곡가들에 대한 작품 분석에 관한 논문이 있으며, 저서로는 『도전, 혹은 스밈(작곡가 이건용과의 대담)』,『철학, 예술을 읽다(공저)』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