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테가 1774년 출간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주인공 베르테르는 이성보다 감성을 중시하고, 사회 통념이나 외적 논리보다 자신의 내면에 더 귀 기울이는 청년이다. 그런 그가 자연의 품에서 우울증을 치료하고자 시골 마을을 찾는데, 거기서 베르테르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여인 로테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소설이 전개되는 내내 로테를 향한 정열과 번민, 희열과 고뇌, 자책감과 희망 사이를 왕복운동하며, 쾌락의 이미지와 규범의 현실 사이를 떠돌다 결국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마치 그의 몸이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을 방랑했듯이 영혼 또한 방랑했던 것이다. 또 어느 날 귀족들의 의례적인 파티를 견디지 못하고 해가 지는 언덕을 바라보며 호머의 서사시를 읽는 은밀한 쾌락에 잠겼듯이, 최종적으로 자기 마음 안에 침잠했던 것이다.

 

위의 문학에서 핵심을 꼽아보자면 정념, 자연에 대한 직관, 방랑, 침잠, 염세, 자유로운 영혼, 주정주의(主情主義, emotionalism)를 들 수 있다. 그리고 『낭만주의의 뿌리』에서 철학사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이 정의했듯이 “독창성에 대한 의식, 깊은 감정적 자기 관조, 사물의 차이에 대한 의식”을 거기에 덧붙일 수 있다. 이것이 요컨대 서구 정신사조에서 “혁명”이라 불릴만한 단절을 만들어낸 낭만주의의 특징이다. 다시 벌린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러한 낭만주의 혁명은, 합리적 이성에 의한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진리의 실현을 주창한 계몽주의(17세기 말~18세기 초)에 맞서 “예술 영역에서의 갑작스런 약진과 새롭고 격정적인 태도라는 방식”을 낳았다.

 

독일 18세기 후반은 바야흐로 낭만주의가 철학은 물론이고 문학과 미술을 앞세워 유럽 문화사에 유례없는 주관, 감정, 감성, 자아, 성찰을 중시하는 문화의 화려한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시기다. “질풍노도(Sturm und Drang)”라는 말이 거기서 유래했다. 또 자연에 경외감을 표하고, 내면 성찰을 위해 고독한 방랑자의 길을 즐거이 택하는 한편, 사랑의 순수하고 궁극적인 완성을 위해서 기꺼이 죽을 수 있는 낭만주의의 신념이 그렇게 형성되었다. 앞서 말한 괴테의 작품은 당시 그런 낭만주의의 도래를 이끌고, 낭만주의적 신념과 태도를 어떤 정교한 그림보다도 더 정교하게 밝혀준 일종의 지침서였다.

 

낭만주의 문학에 괴테가 있다면, 낭만주의 미술에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가 있다. 현재 독일에서는 그의 그림을 실은 우표가 일상에서 쉽게 쓰인다. 그 정도로 독일인들이 애호하고 자랑스러워하는 화가다. 또 독일미술사뿐만 아니라 서구 근대미술사 전반을 서술할 때 그와 그의 미술세계를 빼놓고는 논의가 안 되는데, 그만큼 프리드리히는 낭만주의 회화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것이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나온 1774년에 태어나 1840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보면 운명적으로 낭만주의자일 수밖에 없는 이 화가의 그림들은 흔히 ‘숭고회화(sublime painting)’라 불린다. 쉽게 말하면, 프리드리히의 그림 자체가 숭고를 주제로 한 회화작품들이며, 동시에 그의 작품들이 감상자에게 숭고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의미다. 좀 더 이론적인 설명을 위해서는 칸트의 ‘숭고’ 개념을 참조해야 한다. 왜냐하면 프리드리히가 그린 대부분의 그림들이 마치 그 철학자가 숭고에 대해 서술한 내용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 같기 때문이다. 예컨대 칸트는 『판단력비판』에서 “자연 그 자체를 목적으로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대해 가능한 직관들을 사용”하는 것이 숭고라 했다. 그리고 자연 자체가 아니라 우리 자신이 숭고한 감정을 갖게 되는 자연 현상으로 “높게 치솟아 금세라도 붕괴할 것 같은 절벽, 번개와 우레를 동반해 하늘 위에 층을 이루는 먹구름, 막대한 파괴력을 가진 화산, 황폐를 남기고 가는 태풍, 파도치는 대양, 힘차게 흘러내리는 높은 폭포 같은 것”을 예로 들었다.

 

프리드리히의 그림들은 이렇게 칸트 철학이 제시한 숭고의 예들에 대한 시각예술의 응답이자, 그 그림들 스스로 숭고의 대상이다. 『대양 앞의 승려』가 대표적이다. 그림은 크게 네 가지 차원의 공간을 보여준다. 짙푸른 바다가 그 하나다. 바다와 인접해 안개와 먹구름에 감싸인 부분과, 그 너머로 청명한 빛을 은은히 발산하는 부분으로 나뉘며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하늘이 그 둘과 셋이다. 마지막으로 그림의 가장 전경에 그려진 해안가가 있다. 프리드리히는 자연의 여러 공간을 이렇게 광대하고 다층적으로 묘사해놓고, 결정적으로 그 공간의 맨 아래 바닷가 가장자리에 티끌처럼 작게 한 승려를 그려놓았다. 따라서 그 승려는 바야흐로 막대하고 압도적인 자연 앞에서, 물론 그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자리에서 자신의 “직관들을 사용”해 정신의 고양을 경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프리드리히가 자신의 그림을 통해 가시적으로 표현한 숭고다. 그런데 숭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프리드리히의 그림 속 승려가 절대적인 힘의 공간으로서 자연 앞에서 느끼는 숭고의 감정은, 그 그림 밖에서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에게 전이되어 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액자구조처럼 그림 속의 숭고는 그림 밖의 숭고와 겹쳐지는 것이다.

 

앞서 우리가 참조한 곳에서 벌린은 계몽주의시대인 “18세기 초의 지배적인 미학 이론은, 인간은 자연을 비추는 거울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음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계몽주의에 맞선 낭만주의는 인간과 예술을 단순히 자연을 비추는 거울로 보는 데 만족하지 않았다. 괴테의 문학이, 그리고 프리드리히의 회화가 구현하듯이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주관과 예술의 독자성을 자연과의 관계에서 강조했다. 인간과 예술은 그때 세계를 모방하는 거울이기를 멈추고, 주관과 창조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마지막으로 베르테르의 말을 들어보자. “그러나 이 마음만이 내 유일한 자랑거리인데 (…) 아!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하지만 내 마음, 그것은 나만이 가지고 있겠지.”

 

글 | 한국예술종합학교 학술연구교수, 미술평론가 강수미

시각예술, 미술세계에서 인간의 삶을 들여다본다! 홍익대 회화과에서 학사,석사 학위를 받았고 미학과에서 박사학위(발터 벤야민 사유에서 유물론적 미학 연구)를 받았다. 2005년 《번역에 저항한다》 전시기획으로 올해의 예술상(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07년 제 3회 석남젊은이론가상 (석남미술이론상운영위원회)을 수상했다. 지난 해 출간한 《아이스테시스》는 문화체육관광부 우수학술도서-철학 분야로 선정되기도 했다. 통찰력 있는 강의로 명쾌한 이해를 끌어내는 미술평론가 강수미는 깊이 있는 문화예술 이야기, 미술 세계를 통해 인간의 삶과 문화예술의 기원에 대한 전문가적 해석을 들려주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