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Jazz)가 어린이를 만난다? 얼핏 보면 좋은 그림을 연상하기 힘든 만남이다. 나만 해도 재즈는 어려운 음악, 감상적인 음악, 복잡한 음악, 심지어 졸린 음악이라는 생각을 불과 몇 년 전까지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재즈의 매력을 즐길 수 있기에는 적잖은 우연과 시간을 필요로 했다. 홍대의 한 카페에서 우연한 기회에 라이브 재즈 연주를 보게 되었고, 그것이 주는 감동은 오랜 기간동안 다양한 재즈 음악을 찾아다니게 했다. 그런 노력들이 재즈의 깊은 매력까지 느낄 수 있게 도와주지 않았나 싶다. 재즈의 매력을 발견하고 즐길 수 있는 지금, 재즈 음악은 나에게 있어 다른 어떤 장르의 음악보다 매력적으로 들려온다. 하지만 여전히 어린이들과의 만남은 감을 잡기 힘든 그림임이 틀림없다. 까다로운 감각과 쉽게 지쳐버리는 어린이들의 성향. 그것은 이 글을 읽는 독자의 어린시절을 떠올리면 쉽게 이해되지 않을까 싶다.
2004년 8월 8일. 난 이 힘든 만남을 지켜보기 위해, 서대문에 있는 정동극장을 찾았다. 콘서트의 이름은 ‘한충완의 기분 째지는 째즈 콘서트’. 나야 공연장에 들어서기 전부터 기분이 째질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입구 앞 어린이들의 표정은 그렇지 않은 듯 했다. 방학숙제 때문에 엄마 손에 이끌려 어쩔 수 없이 공연장을 찾았다는 표정, 아이들 방학숙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황금 같은 휴일을 소비하고 있다는 표정들이 적지 않게 눈에 띄었다. 설상가상으로 공연장 안의 무대는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랜드 피아노 한대와 드럼 세트, 그리고 베이스 기타와 앰프가 무대를 구성하는 전부였다. 공연 기획이 참 엉성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원하게 ‘실패작’ 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연출이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런 생각들은 콘서트의 문이 열리면서 급변하게 되었다.
콘서트의 주인공인 한충완 교수. 이 콘서트에서 그의 화려한 이력이나, ‘한충완’ 이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명성에 대한 에너지도 그 어떤 큰 힘에 눌려 수그러들고 있는 듯 했다. 난 어느새 그런 것들을 까맣게 잊고 오직 재즈에 푹 빠져 있을 수 있었다. 엉성한 무대가 뿜어대는 사운드는 이미 나의 발뒤꿈치와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고, 그런 사운드를 내는 연주자 한충완 교수의 모습도 진지하기 보다는 차라리 장난스럽고, 푸근하기까지 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슬쩍 눈을 옆으로 돌렸을 때,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방식으로 음악이 묻는 질문에 대답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까딱이는 사람, 손바닥으로 무릎을 치며 리듬을 타는 사람, 심지어 어떤 꼬마는 그 작은 키로 일어나 뒤뚱뒤뚱 춤까지 추기도 했다. 이것이 재즈의 힘인가? 분명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한충완 교수가 가지고 있는 내공이 이 광경에 한몫하고 있지 않았을까? 공연장에서 울려 퍼지는 재즈는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듯 했다. 나는 그런 음악을 들으며 한편으로는 한곡이라도 더 듣고 싶은 조바심과, 그 조바심으로 인한 설렘이 수없이 교차하고 있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준비한 이벤트(이 공연에는 총 두 가지의 이벤트가 있었다. 그중 하나는 장난감 BB탄 총알을 넣은 플라스틱 통을 관객들에게 나누어 주어 음악을 함께 연주하는-그 통은 악기 ‘쉐이커’의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였다-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한명의 관객을 무대로 초청해 즉석에서 재즈 잼(Jam)을 선보이는 것이었다)들은 관객과 무대의 벽을 없애기에 충분히 훌륭한 역할을 해 냈으며, 한충완 교수의 어눌한 말투와 썰렁한 재치는, 아이들로 하여금 푸근하고 따듯한 마음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처음에 우려했던 어려울 것 같은 두 존재의 만남은 훌륭한 중매쟁이 한충완 교수 덕에 성공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이 조금 부족한 공연이 막을 내렸고, 다들 푸근한 마음으로 객석을 빠져 나갈 수 있었다.
이 콘서트는 ‘대담함이 만들어낸 성공적인 콘서트’라는 후기가 따라 올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아무도 시도하려 하지 않았던 실험. 하지만 그 결과는 누가 뭐래도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억지로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을 꼽으라면, 무대 연출에서 조금 더 빛을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썰렁한 무대가 연출자의 의도적인 연출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무대가 너무 소박하고 좁은 탓에, 눈으로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이 너무 없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눈 한번 마주치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연주에만 몰두 한 두 명의 리듬 세션(재즈에서 베이스와 드럼을 리듬 세션이라고 칭한다)들이 섭섭하기도 했고, 덕분에 튀거나 화려한 연출에 익숙해 있는 아이들과 나의 눈을 자극하기에는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마 튼튼한 기획과 연출이 한충완 교수와 만난다면, 두 번 다시 만나기 힘든 공연을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공연장을 나오는 나에게서 한 가지 큰 변화를 발견하게 되었다. 음악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까탈스러운 귀를 가지고 있는 대중으로서, 바라보기에는 둘도 없이 아름답지만 막상 들어갈 엄두는 나지 않는 바다의 지평선처럼 재즈를 생각해 오던 나. 그런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가지고 있는 재즈 전문 지식이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재즈 연주곡이나 하나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에게 이 생각들은 결코 작지 않은 변화이자 충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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