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의 에 나오는 신묘(神妙)한 언어를 친근하게 전달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신묘(神妙)한 언어를 친근하게 전달

 

고(故) 무위당(无爲堂) 장일순 선생은 살아 생전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책 한 권을 짓지 않았다.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는 선생의 말년에 삶이 암으로 경각에 달려 있을 때 이현주 목사와 같이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뜻을 풀이하며 주고받은 말을 기록한 것으로 선생께서 생전에 책으로 남겨질 것을 안 거의 유일한 저서라 할 수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나이가 좀 차면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 몸과 마음을 조금만 허투루 둬도 ‘나잇값도 못 한다’는 핀잔을 받기 일쑤다. 젊은 친구라면 얼마든지 용인될 말과 행동도 어른이 하면 눈치 보이고 어색한 경우가 아주 많다. 그래서인지 좋은 말씀을 기록해놓은 책 한 권 정도는 옆에 두고 싶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책을 보고 따르게 된 말씀이라 해도 어디까지나 자신한테만 적용할 일이다. 말씀이 좋다고 그대로 젊은 친구들에게 말로 강요한다면 ‘고리타분한 어르신’ 되기 쉬우니. 정녕 그 말씀을 젊은 친구에게 전하려 한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강요하지 않고 실천할 때만 비로소 그 가르침이 전달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언행일치 본보기 보여준 원주의 ‘살아있는 예수’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는 이런 사실을 깨우치기에 더없이 좋은 텍스트다. 나는 언행일치의 본보기를 무위당 장일순(張壹淳) 선생한테서 본다. 장 선생은 서울대 미학과를 수학하던 중 6.25를 만나 학업을 중단한 채 고향인 강원도 원주로 돌아가 40여 년 간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살았다. 원주가 1970년대와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의 본산이었던 것도 장 선생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 스스로 큰 뜻을 세워 이름을 빛낼 만도 했건만 선생은 그러지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고 깊은 물처럼 밑으로 밑으로 낮은 곳으로 낮은 곳으로 임하였다. 원주 지역에서 ‘살아 있는 예수’라 불렸던 것도 그런 행동 때문이다. 시인 김지하는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하는 일 없이 안 하는 일 없으시고 / 달통하여 늘 한가하시며 엎드려 머리 숙여 / 밑으로 밑으로만 기시어 드디어는 / 한 포기 산속 난초가 되신 선생님’ 장 선생은 여러 호(號)를 가졌지만 노장(老莊) 사상에 심취해 선택했을 무위당(無爲堂)이란 별호와 일속자(一粟子)라는 별호를 나는 좋아한다. 여기서 더 가린다면 나는 무위당보다는 일속자를 더 친다.

일속자는 ‘좁쌀 한 알’을 가리킨다. 속(粟)자가 좁쌀을 뜻한다. 좁쌀 한 알이 무슨 뜻이겠는가. 아주 미약하고 하찮은 존재란 의미 아닌가. 선생 스스로 그렇게 자신을 낮추어 부르고 있는 까닭이 뭘까. 단순한 겸약의 미덕을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그건 선생의 우주관이다. 선생뿐만 아니라 인간이란 존재가 무한한 시공의 우주 속에서는 좁쌀 한 알과 같지 않겠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가 그런 존재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좁쌀 한 알이라 해서 무시해도 좋을 존재라는 뜻은 아니다. 우주는 그 하찮은 것들의 집합이고 그 하찮은 것들이 진정으로 존중받을 때 우주 질서가 조화를 이룬다는 데 더 깊은 뜻이 있다. 그것은 선생이 추구한 생명사상과 깊은 관계를 갖는다. 사실 이런 철학은 석가가 말씀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과도 맥을 같이 한다. 이 말을 잘못 읽으면 본인 혼자 독불장군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석가의 진의는 세상에 존재하는 만물 하나하나가 존재의 깊은 이유를 갖고 있으니 함부로 대할 일이 아니라는 게다. 장 선생이 스스로를 좁쌀 한 알에 비유한 것도 석가의 유아독존을 말씀하신 것과 다르지 않다.

 

이현주 목사와 <도덕경> 읽고 뜻을 풀이하며 주고받은 말 기록

 

장 선생은 특히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존경을 받으면서도 스스로 책 한 권을 짓지 않았다. 몸으로 살다 가면 그만일 뿐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근엄한 형태라면 어떤 것도 남기지 않겠다는 치열한 의지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짐작할 뿐이다. 마치 예수나 부처나 공자가 직접 책을 짓지 않은 것과 같다. 다만 그들의 삶과 행동이 성인의 범주에 들었기 때문에 주위에 있던 제자들이 그들의 말과 행동을 글로 남겨 오늘에 이르렀듯 장 선생의 주위에 살았던 사람들도 장 선생을 추모하며 몇 권의 저서를 남겼다. 그중 <무위당 장일순의 노자 이야기>는 선생께서 생전에 책으로 남겨질 것을 안 거의 유일한 저서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책은 선생의 말년에 삶이 암으로 경각에 달려 있을 때 이현주 목사와 같이 노자의 <도덕경(道德經)>을 읽고 뜻을 풀이하며 주고받은 말을 기록한 것이다. 이 책에서 특이할 만한 것은 노자를 읽으면서도 도(道)와 무위(無爲)를 골자로 하는 노자의 생각이 어느 새 공자나 석가모니나 예수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보여 준다는 점이다. 인류는 종교 때문에 갈라져 대학살을 일삼았다. 예수나 석가모니가 절대 원했을 리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인류 역사는 그들 성인(聖人)을 추종하는 자들에 의해 더 참혹한 결과를 보이기도 했다. 따라서 노자나 공자나 석가모니나 예수나 다 같이 인류가 모셔야 할 성인(聖人)으로서 동일한 반열에 계시다고 역설하는 선생의 깨우침은 빛을 발한다. 오늘도 믿음과 행동을 별개로 하는 수많은 종교인들이 한 번쯤 눈여겨봐야 할 가르침인 것이다.

 

‘체언체구(滯言滯句) 하지 말라’

 

주지하듯 ‘도덕경’은 ‘도가도(道可道) 비상도(非常道)’라는 명문장으로 시작한다. ‘道를 말로 하면 말로 된 그 道는 이미 道가 아니다’는 뜻이다. 장 선생은 이 말의 뜻을 풀이하며 불가(佛家)의 ‘체언체구(滯言滯句) 하지 말라’는 말을 인용한다. 석가모니 또한 ‘내가 한 말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을 막바지에 남겼는데, 매사 몇 줄의 말과 글에 사로잡힐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라 사이의 전쟁도 보통 사람의 다툼도 어찌 보면 본질을 바라볼 겨를도 없이 사소한 것에 체언체구 하며 막무가내로 대결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 책의 진가는 그러나 거대한 우주담론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장 선생은 노자의 신묘(神妙)한 언어를 딱딱한 글투가 아니라 사랑방에서 할아버지가 이야기 해주듯 구수한 말투(실제로 이 목사가 장 선생의 말을 녹음해 글로 옮겼다)로 읽어준다. 또 81장(章)에 700페이지가 넘어 다소 분량이 많지만 염려할 것은 없다. 어느 장이든 따로 읽어도 이해되지 못할 바는 없으며 틈틈이 한 장 씩 읽으면 오히려 느끼는 바가 더 클 수 있다.

 

이제 뭔가 삶의 지표를 갖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일독을 권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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