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된 신과 만나는 방법

인간이 된 신과 만나는 방법

 

무신론자인 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에 관심이 많다. 술자리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와 싸움으로 번질 만큼의 난상토론을 기꺼이 즐기며,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심지어 고대 신화에 이르기까지 종교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는다. 만일 신실한 신앙(특히나 기독교인이라면)을 가진 분들이 이글을 읽게 된다면, 글의 내용에 미간을 찌푸리기보다는 ‘이런 관점도 있군’ 하는 식의 아량을 베풀어주길 진심으로 바란다.

 

 

인간의 모든 희로애락을 화학물질(호르몬)과 약간의 전기신호가 주재한다는 식의 철저함엔 이르지 못할지라도, 나약한 인간의 본성이 ‘신’이라는 초자연적 존재를 만들어냈고, 거기에 기대 삶을 위로한다는 내 생각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신 혹은 종교가 허상이라고 믿고 있는 내가, 종교라는 이름하에 행해지는 일들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일견 당연하다. 이를테면, 개신교의 예배 시간에 행하곤 하는 ‘통성기도’는 솔직히 약간의 공포감까지 느끼게 만든다. 가톨릭 특유의 엄숙함은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을 만들기도 하고, 식당 문 앞에 서서 공양을 기다리는 승려의 모습도 가히 보기 좋은 풍경만은 아니다. 물론 해당 종교의 신자들에겐 더 없이 성스러운 행위들일 테지만….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난 종교에 관심이 많다. 술자리에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친구와 싸움으로 번질 만큼의 난상토론을 기꺼이 즐기며, 기독교, 불교, 이슬람교, 심지어 고대 신화에 이르기까지 종교에 관한 책들을 즐겨 읽는다. 그건 아마 어릴 적 기억의 연장에 기인할 터다. 초등학교 때부터 제법 머리가 굵어지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개신교 신자로 열심히 살아왔던 경험. 조직을 배신한 자가, 이전에 속했던 조직을 해하지 못해 더욱 안달이 나는 것처럼, 종교에 대한 내 거부감은 나름 치열했던 이전의 경력(?)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존경의 대상이 아닌 종교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관제 구호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 사회는 더 이상 다이내믹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다이내믹하다. 정치와 문화, 역사, 경제 등 어느 한 분야도 조용하지 못한 대한민국의 현실은 차분하고 엄숙해야 할 ‘종교’ 역시 피해가지 못한다. 역사적으로 봐도,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생적으로 기독교(천주교)가 자리 잡은 나라다. 서학(西學)을 연구하던 학자들 사이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정기적인 집회(예배)로 이어지게 되었다. 서구에서 파견돼 온 선교사들은 이미 우리 식으로 미사를 올리는 조선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세계 교회사에서도 유례가 없는 일이다.

 

서학의 한 분야로 시작해 순교자를 내며 공인되고, 광복과 동란 이후 사회 재건에 어느 정도 공을 세웠던 기독교는 이제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집단이 되었다. 신자 수만 해도 전체 종교인의 20%에 육박해 불교에 이어 2위다. 국가 최고 지도자인 대통령이 개신교 장로 출신이며, 목회자가 사회를 이끌어가는 오피니언 리더가 된 지도 오래다. 그런데 요즘 기독교가 심상찮다. 존중은커녕 비난과 욕설을 듣는 일이 허다해졌고, 오히려 개혁의 대상으로까지 지목받는다.

 

존경 받는 전직 총리는 ‘교회 안에 예수가 없다’며 이런 현실을 개탄하기도 했다. 존경 대신 손가락질을 받는 종교. 현대의 종교가 이 지경에 이른 이유는 뭘까? 얄팍한 지식으로 감히 말하자면, 인성(人性)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하다. 그야말로 신격화된 신의 존재 앞에선 반성이나 자책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대신 아집과 교만, 맹신이 자리잡게 된다. 죽은 자를 살려내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던 예수만 찬양하지 말고, 사탄의 유혹 앞에 괴로워하던 예수, 십자가 위에서 ‘할 수만 있다면 거두어 달라’며 인간적 고통에 몸부림치던 예수의 모습 중 인간에게 더 큰 울림을 주는 것은 무엇일까.

 

예수 가족의 무덤이 발견된다면?

 

범접할 수 없는 초자연적 영역에서 인간적인 삶의 영역으로 내려온 신을 만나는 건 그 자체로 큰 재미와 논란을 부른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가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것도 그런 이유다. 지난 2007년 번역 출간된 <예수의 무덤>이란 책은 픽션이 아닌 현실이란 면에서 더욱 흥미롭다. 책의 저자는 두 명이다. ‘심차 자코보비치’는 에미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세계적인 다큐멘터리 제작자이자 감독이다. ‘살아 있는 인디애나 존스’라는 별명이 말해주듯 왕성한 호기심과 모험심으로 세계 각처를 누빈다. ‘찰스 펠리그리노’는 수중 고고학과 고생물학 박사이며, 범죄 과학수사 기법을 고고학 분야에 접목시킨 선구자다. 타이티닉호 탐사, 폼페이 발굴, 월드트레이드센터 참화 현장 등에서 진실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작업에 참여했다. 심차와 찰스의 발굴활동을 지지하며, 책 중간 중간 훌륭한 조언자의 역할을 하는 이는 영화 <아바타>의 감독 ‘제임스 캐머런’이다. 그가 영화감독 이전에 화성 탐사선의 착륙 시스템을 설계했고, 유로파 우주 탐사선을 공동 설계한 뛰어난 과학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80년, 예루살렘 탈피오트에서 1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 발견된다. 발굴에 나선 고고학자들은 무덤 속 유골함에서 충격적인 이름들을 발견한다.마리아, 마태, 유다 그리고 요셉의 아들, 예수 등이었다. 고고학자 중 어느 누구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자신들이 엄청난 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다음에 드러난 유골함의 주인공은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라 ‘마리암네’였고, 학자들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복음서 어디에서도 마리암네라는 여자는 언급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어서 발견된 ‘예수의 아들, 유다’는 이 무덤이 나사렛 예수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결정적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25년이 흐른 뒤, 심차 자코보비치는 골동품 시장을 통해 나온 ‘요셉의 아들, 예수의 동생, 야고보’라고 새겨진 유골함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과정에서 탈피오트의 무덤과 유골함들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다. 그가 마리암네라는 미지의 여인을 찾아낸 건 ‘도마복음, 빌립행전, 마리아복음’ 등의 ‘영지주의 복음서’였다. 놀랄만한 사실은 여기서의 마리암네가 막달라 마리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다. 마리아나 예수, 요셉, 야고보와 같은 이름은 예수가 활동하던 당신 유대에서 영희나 철수보다 흔한 이름이었다. 뒤에서 ‘요셉’이라고 부르면 몇 십 명이 한꺼번에 뒤를 돌아봤을 거란 뜻. 하지만 두 콤비는 이미 남의 집 지하가 돼버린 무덤을 발굴하기 위해 집주인을 설득하고, DNA 분석, 방사능 검사, 수학적 통계 등 가능한 수단을 모두 동원한 과학적 수사를 통해, 무덤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예수(가족)의 무덤’임을 입증해낸다.

 

인간이 돼 더욱 가까워진 신

 

예수는 과연 인성을 지닌 신이었을까, 아니면 신성을 지닌 인간이었을까. 무덤의 발견이 논란이 되는 건, 신의 영역에 이미 확고히 들어선 예수를 인간의 역사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직접 예수를 만지고 그의 음성을 들었던 초기 유대-기독교파와 막달라 마리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예수의 인간적 생애 역시 깊은 무덤 속에 묻히고 말았다.

 

밝혀진 고고학적 사실에 따르면, 예수는 부활해 막달라 마리아와 혼인했고, 유다라는 이름의 아들까지 두었다. 그리고 행복하게 잘 살다가 가족들의 유골함이 놓여 있는 가족묘에 안장된다. 책의 내용은 분명 도발적이다. 독실한 신장 입장에선 불경스러울 지도 모른다. 하지만 엄숙하기만 한 예수 혹은 종교에 염증을 느끼던 나 같은 부류의 사람에겐 청량제와 같은 신선함을 안겨주었다. 더욱이 신화가 아닌 역사의 예수를 인정한다는 건, 반(反)종교인의 입장에선 엄청나게 전향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무슬림을 자극하는 지극히 원리적인 포교활동보다 백배는 낫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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