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우주는 몸에서부터, 우주를 내 몸으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우주는 몸에서부터, 우주를 내 몸으로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이문재 시인이 대중 매체와 인터뷰한 세 편의 글을 찾아 읽었다. 하나는 서평월간지 <라이브러리 & 리브로>와 나눈 인터뷰(2009년 7월호)였고, 다른 두 개는 각각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와 <나비>란 이름의 문화웹진(nabeeya.net)과 진행한 인터뷰였다. (공교롭게도 이 두 편은 지난 해 9월 22일 같은 날짜에 실렸다) 인터뷰 내용의 공통점은 시인 이문재의 생태주의 문학관이었다. <조선일보>는 특히 ‘환경과 생명 가치 내세운 한국 생태시의 대표 작가’란 제목으로 그의 ‘시단 위치’를 양껏 추켰다. 이력서(履歷書)의 이(履)는 ‘신발 이’ 자(字)다. 걸어 온 내력이란 애기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족적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을까? 궁금했다.

 

“1988년에 낸 첫 시집 ‘내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줄 때’는 백일몽의 시기였습니다. 성장기에서 20대 초반에 이르는 시기였지요. 1993년에 펴낸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은 각성의 시기였습니다. 이때 몸의 문제, 도시적 삶의 문제, 즉 생태-환경문제에 눈을 떴습니다. 1999년 <마음의 오지>, 2004년 <제국호텔>을 지나오며 생태-환경문제에 대한 시야와 시력을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근원-관계와 관련하여 정치-윤리적인 관점을 확보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를 저는 ‘지구적 상상력’이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근원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 것입니다.”

 

2번째 시집 <산책시편> 펴내며 생태-환경문제에 눈뜨다

 

명쾌했다. <시사저널> 취재부장과 대학강사를 거쳐 경희사이버대 미디어문예창장과 교수 자리로 ‘의자’를 몇 번 바꾸는 동안 그의 시세계에는 큰 변화가 일었다. 김달진문학상(1995), 소월시문학상(2003), 지훈문학상(2005), 노작문학상(2007) 등으로 시단이 그의 작품에 화답한 시기 역시 그의 변화된 족적과 정확히 맞물리는데, 어떤 계기가 ‘각성제’였을까? 두 번째로 궁금했다.

 

“20대 후반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내가 명색이 시를 쓰는 사람인데, 나를 위한 시간이 하루에 단 1분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어요. 그래서 도시 안에서 월급을 받으면서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이렇게 살아가도 되는 것인가, 그러면서 산업자본주의 문명, 좀 더 구체적으로는 도시 문명이 강조하고 있는 속도주의에 대해서 많은 성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개성에서 남북 문인들 몇 사람이 모여 <통일문학> 창간호 편집회의를 할 때였다. 그 때 필자도 곁에 있었는데, 북측 문인 한 사람이 “이 시인과 흡사한 분위기의 시인 한 사람이 북에도 있다”고 인사한데 대해 그는 “그 사람도 시 잘 쓰죠?”라고 농담했다. 맞다. 그의 농담처럼 그는 시를 참 잘 쓴다. ‘생태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서정시의 새 지평을 연 시인’이란 평가가 어울릴 만큼. ‘뛰어난 모든 시는 생태주의 시’라고 잡지(‘라이브러리 & 리브로’) 인터뷰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그런가? 그는 생태시인이다. 생태문학이란 뭔가? 세 번째로 궁금한 점이었다.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사안

 

“저는 ‘생태’라는 말과 ‘환경’이란 말을 함께 쓰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 합니다. 왜냐하면 환경이라는 말의 개념에는 인간 중심주의가 들어 있기 때문에 저는 가능하면 생태라는 말을 쓰려고 해요. 제가 생각하는 생태 문학의 개념은, 첫 번째는 인간 중심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이 가장 핵심적인 사안입니다. 두 번째는 다양성, 총체성, 순환성, 연결성이란 네 가지 원칙을 갖는 문학, 그것을 저는 ‘생태문학’이라고 오래 전부터 나름대로 정의해 놓고 있습니다.”

 

산성눈 내린다. / 12월 썩은 구름들 아래 / 병실 밖의 아이들은 놀다 간다. / 성가(聖歌)의 후렴들이 지워지고 / 산성눈 하얗게 온 세상 덮고 있다 / 하마터면 아름답다고 말할 뻔했다. / 캄캄하고 고요하다. / 그러고 보면 땅이나 하늘 / 자연은 결코 참을성이 있는 게 아니다. / 산성눈 한 뼘이나 쌓인다 폭설이다. / 당분간은 두절이다. / 우뚝한 굴뚝, 은색의 바퀴들에 / 그렇다, 무서운 이 시대의 속도에 치여 / 내 몸과 마음의 서까래 / 몇 개의 소리없이 내려앉는다. / 쓰러져 숨쉬다 보면 / 살핏줄 속으로 모래 같은 것들 가득 / 고인다 산성눈 펑펑 내린다. / 자연은 인간에 대한 / 기다림을 아예 갖고 있지 않다. / 펄펄 사람의 죄악이 내린다. / 하늘은 저렇게 무너지는 것이다.

 

그의 두 번째 시집 <산책시편>을 통해 발표한 ‘산성눈 내린다’ 전문이다. 그가 말한 ‘백일몽 이후 각성’의 대표적 작품으로 그는 이후 줄곧 ‘몸아 미안해…’ 이 말을 즐겨 쓴다. 감기가 왔다고 투덜대는 필자에게도 언젠가 그는 ‘그동안 혹사시켰던 몸에게 아주 많이 미안해 할 일’이란 핀잔을 문자로 남기며, 몸과 많이 대화하라고 충고했다. 몸에게 왜 미안해해야 되는 것인가? 이점이 궁금한 점 네 번째였다.

 

 

밥 먹는 것 자체가 / 매번 기도일 수 있다면 / 밥을 몸속에 떠 넣는 것 자체가 / 언제나 기도일 수 있다면 / 우리 몸이 저마다 신전일 수 있다 / 먹는 것이 매순간 기도일 수 있다면 / 지구가 하나의 거대한 신전일 수 있다 …(중략) 우리의 식탁이 끝이다 / 우리의 진정한 혁명은 / 우리의 최후의 진정한 혁명은 / 식탁에서 일어날 것이다 / 식탁이 우리의 최후의 맨 처음이 될 것이다

 

4번째 시집 ‘제국호텔’ 이후 발표한 근작 ‘혁명을 위한 기도’에 ‘몸’과 ‘도시적 삶’에 주목하고 있는 그의 생각은 잘 드러나 있다. 몸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모든 문제가 몸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생태문학은 현재와 같은 삶의 방식이 지구를 훼손한다고 판단합니다.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하고 폐기하는 전 과정에 지구 자원이 대량으로 소모됩니다. 경제가 성장을 하면 할수록, 그러니까 우리가 편리하면 할수록 지구는 망가집니다. ‘근원’과 ‘관계’를 염두에 둔다면,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양식과 생활방식을 답습할 수가 없습니다. 생태주의자들은 인류의 현 상태를 ‘침몰 직전의 타이타닉호’라고 표현하는 데 조금의 주저도 없습니다.”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기원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이러한 절망만 있을까? 올 초 그가 발표한 “도시귀농 프로젝트-미래에서 부친 편지”에는 절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기원이 만화처럼 그려져 있다.

 

“(전략)우리는 도시를 개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스팔트와 시멘트를 걷어냈습니다. 간선도로 위에 고가도로를 올려 그 상판을 농장으로 만들었습니다. 빌딩과 아파트, 학교 옥상 위에도 흙을 올렸습니다. 그 사이 많이들 싸웠습니다. 대통령이 몇 번 물러났습니다. 초국적 기업의 사주를 받은 용병들이 트랙터를 몰고 와 도심을 뒤엎기도 했습니다. 그해 봄, 대통령궁 안에서 모내기하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시청 앞에서 토마토를 땄습니다. 겨울에는 고가도로 농장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했습니다. 도시가 푸르러졌고, 사람들이 자기가 키운 먹을거리를 나누었습니다. 서로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저기 공동체가 생겨났습니다. 우리의 도시귀농을 배우러 오는 외국인들이 많았습니다. 자동차를 버린 중국 대학생, 댐을 폭파한 인도 정치인, 핵발전소를 폐쇄한 러시아 과학자, 국가의 복지정책을 거부한 스칸디나비아 교사도 찾아왔습니다.”<도시귀농 프로젝트 中>

 

그는 지금 ‘몸’에 대한 사유를 지나 ‘근원’ ‘관계’ ‘치유’ ‘새로운 삶’ ‘지구’를 향해 시세계를 확장시키고 있는 중이다. 이러한 그의 시세계에서는 글이, 문학이 세계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절망적으로 말하는 자성의 목소리를, 무색하게 만드는 내면의 힘이 있다.

 

아무리 파도 기름이 나오지 않았다. / 그래서 지구 반대편을 팠다. / 생각이 에너지다. / SK에너지 // 아무리 해도 사람들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 / 그래서 텔레비전 반대편을 보았다. / 맞다, 생각이 에너지다. /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 지구를 그만 파야 한다. / 그만 파야 할 뿐만 아니라 / 생각이 에너지라는 생각이 팠던 / 지구의 저 수많은 구멍들부터 막아야 한다. // 지금 지구 반대편으로 달려가 / 구멍을 뚫고 기름을 뽑아 올리는 생각은 / 새로운 에너지가 아니다. / 지구에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비는 / 생각이 진정한 에너지다(하략)

 

그의 근작 ‘생각이 에너지다’를 읽다 보면, 그 내면의 힘이 얼마나 센가를 우리는 가늠할 수 있다. 이 얼마나 힘 있는 울림의 목청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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