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들이 흘리는 땀에 세상의 온갖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다”
<서편제>의 속격 편 작품이자 100편째 연출작이었던 <천년학>의 흥행 실패로 현장을 떠난 듯 보였던 임권택 감독이 디지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로 101번째 메가폰을 잡았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임권택 감독이 생애 처음으로 시도하는 디지털 영화인만큼 오랫동안 단짝 촬영감독이었던 정일성 씨와도 떨어져 외롭게 작업한 작품으로 거장 임권택이 초심으로 돌아가 만든 첫 작품이다.
2006년 임권택 감독은 이청준 원작의 소설 <천년학>을 영화로 만들었다. <천년학>은 1993년 흥행신화를 낳았던 <서편제>의 속편 격 작품이자 임권택 식의 지독한 러브 스토리였다. 무엇보다 그의 100편째 연출작이었다. 하지만 영화는 실패했다. 아무리 거장이라도 늘 흥행에 초연할 수는 없는 법이다. 당시 임 감독은 크게 실망한 것처럼 보였다. 게다가 전작인 2003년의 영화 <하류인생>에 이어 두 번째로 참패를 겪은 터였다. 2001년 <취화선>으로는 칸영화제에서 대망의 감독상을 거머쥐었었다.
이제 임권택에게는 서서히 피로감이 몰려들고 있는 듯이 보였다. 주변에서 그런 얘기들이 있었을 법했다. ‘이제 그만 쉬시지요. 마침 이번이 100편째니 정리하기도 좋지 않겠어요?’ 임권택 감독은 <천년학> 종영에 앞서 앞으로 연출은 그만하겠다고 말했다. 사실상의 영화계 은퇴선언이었다. 실제로 임권택 감독은 학교로 갔다. 부산 동서대는 그에게 임권택 영화학교를 선사했다. 이제 그는 마지막 인생을 후진양성에 힘을 쏟을 것처럼 보였다.
101번째 작품이자 처음 만드는 디지털 영화 <달빛 길어 올리기>
연출밥을 먹으면 거기서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건 대가인 임권택 감독도 예외는 아니다. 100편의 영화를 끝으로 현장을 떠난 듯이 보였던 그가 사실은 지난 4년간 새로운 작품을 위한 암중모색을 해왔기 때문이다. 새로운 작품은 <달빛 길어 올리기>다. 이제 이 영화는 그의 101번째 작품이 될 터이다. “거이 뭐시냐(전남 장성이 고향인 임권택 감독은 여전히, 종종, 걸쭉한 호남 사투리를 쓴다), 사람들이 자꾸만 101번째니 뭐니 해 쌓는데 난 그렇게 생각 안해요. 이게 그냥 첫 번째 데뷔작인 것 같은 게, 느낌이 심상치 않아요. 막 떨리고 흥분되고 그런다니까요. 그러니 사람들도 그렇게 봐줬으면 좋겠어. 임권택의 새로운, 첫 번째 작품이라고.”
그건 그의 말이 맞다. 아니 적어도 타당은 하다. 왜냐하면 임권택으로서는 처음으로 시도하는 디지털 영화가 바로 이 <달빛 길어 올리기>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영화인만큼 오랫동안의 같은 현장 ‘지기(知己)’이자 단짝 촬영감독이었던 정일성 씨와도 잠시 떨어지기로 했다. 마치 데뷔작처럼 그는 외로운 작업을 시도한다. 거장 임권택이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이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전통 한지(韓紙)에 대한 것이다. 다큐멘터리처럼 들리지만 극영화다. 스토리는 이렇다. 만년 9급 공무원으로 처음에는 순전히 승진 좀 해보자는 심산으로 한지 만드는 일에 발을 담갔으나 나중에는 이 일에 인생을 걸게 되는 남자 종호의 이야기가 중심이다. 여기에 전통 한지가 사라져가는 현실에 절망하다가 종호의 한지 복원 계획을 알고 동참하게 되는 전문 다큐멘터리 감독 지원의 이야기가 얹힌다. 종호 역은 박중훈이, 지원 역은 강수연이 맡는다.
영화 만들기는 장인 정신과 일맥상통
<달빛 길어 올리기>의 시작은 전주국제영화제다. 구체적으로는 영화제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전주시와 전주시가 추진 중인 한지사업을 국내외에 알리기 위한 목적에서 시작됐다. 전주국제영화제의 송하진 조직위원장이자 전주시장이 임권택 감독에게 한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의뢰한 것이 얘기의 발단이었다. 송 위원장은 임 감독에게 딱 한마디, 곧 ‘한지는 만들어지면 천년이 간다’는 말을 전했다. 영화제 측의 간곡한 부탁으로 수락은 하긴 했으나 한지를 소재로 어떻게 영화를 만들까 ‘꿍얼대던(전라도 식으로)’ 임 감독은 현장을 돌면서 생각을 확 바꿨다고 한다. 임 감독은 전국의 전통 한지 제작지를 취재하며 한지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됐고 전주에 머물며 이야기의 얼개를 짜내는데 성공했다. 다만 촬영시기와 기간이 문제였는데 전통 한지는 원래 한겨울 추운 물속에서 만들어지는 게 최고이기 때문이다. 당초 기획은 지난 해 4월쯤이었으나 본격 촬영에 들어간 것이 지난 달 말에나 됐던 것은 그 때문이다. 다행이 이번 겨울은 ‘제대로’ 추위가 왔다. 스태프들에게는 죽을 맛이지만 그 추위 때문에 아마도 영화는 한지의 깊은 제 맛을 살려내는데 성공할 것이다.
“영화 환경이 많이 바뀌었어요. 새로운 감독들이 많아졌고 새로운 이야기와 새로운 장비들이 많아졌어요.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하기도 해요. 왜 당신은 늘 전통의 미학을 영상에 담는데 애쓰느냐고요. 근데 참 이상한 게, 난 그런 이야기에서 많은 드라마들이 느껴져요. 장인들이 흘리는 땀에 세상의 온갖 희로애락이 담겨져 있다고 보는데 영화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영화 만들기도 그런 장인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어요.”
아무리 새로운 영화가 많이 만들어진다 해도 영화는 영화다. 여기저기서 시각적 볼거리가 흘러넘친다 한들 영화는 역시 감성을 움직이는 그 무엇에 의해 생명이 지속된다. 잊혀 지지 않고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런 방식으로 대를 이어 인구에 회자된다. 지금껏 좋은 영화라고 하는 것, 명화라고 하는 것은 임 감독의 말처럼 한 컷 한 컷, 장인의 정신을 담아내려고 했던 작품들이었다.
“나 역시 이번이 새로운 작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전통의 미학을 디지털로 담아내기 때문인 거죠. 아직까지는 그래요. 디지털은 필름에 비해 심도나 깊이 면에서 좀 떨어진다고 생각하는데, 또 주변 사람들은 그게 그렇지 않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니까 이게, 이 <달빛 길어 올리기>가 뭐인가 새로운 합성이 될지, 아니면 아예 충돌이 일어나서 이상한 뭐인가가 될지 나 역시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게 사실인데, 그래도 꼭 시도해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CG로 만드느냐 자연산으로 담아내느냐의 차이
<천년학>을 만들기 전, 이제는 고인이 된 이청준 작가에게 임 감독은 자신이 이 영화를 어떻게 찍을 것인지 설명한 바 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그 뭐시냐, 산등성이에 해가 막 떨어지는 거여요. 그때 학 한마리가 탁 치고 하늘로 올라가는데 깊게 편 날개의 그림자가 산마루에 쫙 걸리게 하는 겁니다. 마지막 신을 그렇게 찍고 싶어요. 그걸 어떻게 잡을지 고민이어요”
당시 그 얘기를 들었을 때 어떤 사람들은 임권택 감독이 고루하다고 얘기했었다. CG ‘한방’이면 그런 고민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임권택 감독이 그걸 모를 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 장면을 CG로 만드느냐, 자연산으로 담아내느냐는 영화에 대한 시선과 태도의 차이일 것이다. <달빛 길어 올리기>는 임권택의 새로운 도전의 영화가 될 것이다. 한국 영화계로서도 새로운 미학의 영화를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될 것이다. 모두들 이제 3D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이구동성일 때 임권택 은 오히려 거꾸로 걸어가거나 느릿느릿 걸어가는 길을 택했다. 어느 것이 진정한 진보인지, 또 발전인지, 그건 정말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몫이 될 터이다.
기사가 좋았다면 눌러주세요!
비밀번호 확인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