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가 얼마 전 산수(傘壽 우산산, 목숨수)를 맞으셨다. 80번째 생일을 맞은 사람을 부르기를 여든 살이라고 하고, 적기로는 팔순(八旬)이라고 적는데 할아버지 생신 연회장 앞에 붙은 ‘산수(傘壽)연’이라는 말은 생소한 말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가족들이 모두 ‘산수(傘壽)’라는 글자가 파뭍힌 얼음조각 앞에 서서 도대체 이 말이 어디서 생겨난 말인가 온갖 추측을 했다. 국어시간에 배운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이립(而立:30세), 불혹(不惑:40세), 지천명(知天命:50세), 이순(耳順:60세), 고희(古稀:70세)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막내 고모부가 내놓은 그럴듯한 의견은 팔(八)자가 산모양이니, ‘산’ 자를 쓰고 그럴 듯한 한자를 붙인 것이 아닐까라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우산산?’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찾아간 ‘지식인’이 내놓은 대답은 예전에는 80-90세까지 사는 분들이 거의 없어, 그 나이에 맞는 별칭이 따로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따라서 산수(傘壽)라는 것은 공자만큼 나이가 든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에 따른 별칭들은 논어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80, 90도 별칭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여 없던 표현을 만들어 냈는데 누군가 ‘산(傘)’을 파자(破字)하면 ‘팔(八)+십(十)’이라는 생각을 해낸 것이다. 어떤 이들이게는 본디를 모르는 어이없는 일일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언어와 문자를 가진 자들이 세월을 더해가며 언어유희를 덧붙여가는 재미있는 현상으로 보일 것이다.
지하철 역에서 마주친 15세기를 건너온 미소
할아버지를 뵙기 위해 경복궁 지하철 역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지하철이 들어오는 바람을 피해 뒷걸음질을 치다가 커다란 돌과 부딪쳤다. 뒤를 돌아보니 말을 탄 둥글둥글하게 생긴 무인이 가느다랗게 웃고 있다. 말도 주인도 가느다란 미소를 가지고 있다. 국보 제 91호 신라 6세기 경에 만들어진 기마인물상 모형이다. 안장을 비롯한 마구 일색을 갖춘 말을 탄 주인이 고삐를 느슨히 쥐고 바삐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다. 6세기에 띄운 미소를 21세기 지하철 역에서 만났다. 그도, 가느다란 미소도 산처럼 나이를 먹었다.
경주의 한 무덤에서 발견된 이 기마상은 일종의 주전자이다. 주인 기마상과 함께 시종이 뒤에 말을 타고 따라가는 모습인데 나란히 주전자와 컵의 일체형으로 저승길에 한잔 따라마시고, 같이 길을 걸어가는 벗에게도 한잔 따라주며 심심하지 않게 가시라는 기원이 담겨있는가.
어떻게 더 사실적으로 만날 것인가?
아르떼 사무실은 국립중앙 박물관 밖에 위치해있고, 화장실을 가기 위해서는 뒷문에 비밀번호 네자리를 입력하고 요란한 신호음을 내며 들어가야 한다. 박물관 뒤편 사무실 복도에 섰는데 위층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계단을 올라가 냄새를 쫒아가다보니 냄새는 사라지고 고구려 장천 1호분 벽화 모형 앞에 서있게 되었다. 양치질을 하며 복도를 걸어갔던 나는 박물관 미술팀이 고구려 벽화 모형 안에서 상의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 좁은 공간 안에 무덤 속 벽화 모형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싶은 그들의 욕망이 토론으로 불타고 있었다. 양치질을 하고 있던 나를 발견한 그들이 당황해서 ‘들어오시면 안된다’고 쫒아내었고, 철문이 닫히며 고구려 벽화로 통하는 문이 사라졌다. 중국 벌판의 과수원 사이에 있다는 장천 1호분의 무덤 주인들의 사랑이 내세에서도 이어지기를 바라며 그려놓았던 벽화의 감동을 세종로의 박물관 안에 모형으로 어떻게 재현할 것인가 고민하던 박물관 직원들.
40은 불혹이고 50은 이순이라
가을이 시작된 오후, 선선한 박물관에 표를 끊어 들어갔다. 4-50대 아주머니 자원활동 도슨트들이 박물관 안을 유유히 걸어다니며 유물들에 말을 건다. 두 아주머니가 짝을 지어 걸어가며 신라관 안의 유물을 서로에게 설명하며 연습하신다. 한 아주머니가 말한다.
“40은 불혹이고, 50은 이순이라.(실은 틀린 말이다) 이순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든지 삐딱하지 않게 듣는다는 거 아니가. 그래서 50이 되면 이것들이 하는 말이 술술 들려오고, 문화예술도 귀에 척척 감겨드는 것이 아니가.”
한 해설사는 어린아이 둘과 함께 온 아주머니와 동행하며 청동기 시대를 설명해준다. 한 부족장이 가슴에 구리빛 거울을 달고 햇빛을 받아 눈이 부시게 빛나며 신의 아들임을 입증한다는 장면이다. 아주머니의 구수한 이야기 솜씨를 재현할 수 없는 손 끝의 키보드가 아쉬울 따름이다. 고려실에서 만난 커다란 석류에 작은 원숭이 두 마리가 매달려 있는 귀여운 연적과, 조선 백자 실에서 만난 빨갛게 익어 향기를 풍기는 모양의 연적. 가느다랗게 웃는 신라인 기마상과 손가락만한 크기의 토우들, 모형으로 재현되어 만난 고구려 고분. 삶을 담아 만든 것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이야기를 건다. 가만히 쳐다보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엄마가 내준 숙제
좋아하는 만화책 중에 골동품점에 관한 것이 있다. 사람들이 골동품에 담긴 혼에 마음이 끌려 물건을 사가고, 골동품점 주인은 물건 구매자와 파장이 맞지 않는 골동품을 다시 회수하기 위해 분주하고, 그로 인해 발생한 사건들을 처리하느라 매일매일 우당탕탕한다는 이야기이다. 사람들은 모기장 하나를 샀다가 묘한 꿈을 꾸기도 하고, 귀여운 복숭아 모양의 연적을 사간 여학생은 마음을 빼앗긴다. 신라시대의 토우들이 어느 날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요즘 자주 박물관에 가고 싶어진다. 자기들이 살았던 집 모양이라고 거칠게 빚어놓은 집모양 토우, 손가락만한 사람모형 토우들, 깨졌지만 여전히 투명한 유리그릇, 원숭이가 매달린 탐스런 청자 석류. 이것들을 만졌을 손길들이 가느다랗게 미소를 던진다.
어렸을 적 엄마는 주말이나 방학이면 차비와 입장료를 쥐어주고,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에 다녀오라 명한 후 공책 한권 가득히 보고 듣고 온 것을 기록하도록 했는데, 오리고 붙이는 재미로 즐거워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그 작업에 지금 이야기가 붙고 있다. 옛 사람들의 손짓이 역사가 되었듯, 내 손짓도 역사로 흘러간다. 그들의 손끝에 남은 이야기들이 지금 미소로 말을 건다. 이순(耳順)이 되기 전에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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