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과학의 융합에 대한 고전인 <예술과 기술>에서 루이스 멈퍼드는 그 융합의 고전적 산물로 중국과 한국에서 발명된 세계 최초의 인쇄술을 들었다. 멈퍼드가 말하는 인쇄술인 목판인쇄는 중국에서 최초로 발명되었으나 금속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은 한국에서 최초로 발명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멈퍼드는 그 자랑스러운 우리의 세계사적 공헌을 분명히 밝히지 않았지만 그가 주목한 것은 그 최초의 인쇄술이 예술과 과학을 융합한 전형적인 기계예술이었다고 하는 점이다. 그것은 미적 상징이 실용에 선행한 인류의 초기 수공업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도구와 대상, 상징과 주체가 분리되지 않은 초기 인류 문화에서 수공업은 예술과 과학이 조화를 이룬 분야였고, 이는 목판인쇄보다 금속활자 인쇄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따라서 우리 역사는 예술과 과학의 융합에서 세계사적 기원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문화 접근성은 다른 어떤 지역보다도 한반도에서 가장 빠르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풍요한 문화를 창조했다.

 

멈퍼드에 의하면 그러한 과학과 예술의 융합은 서양에 인쇄술이 전래되어 발전한 사본의 전개과정에서 기술성이 심미성을 압도했고 그 결과 장인들은 추방됐다. 그럼에도 인쇄술은 기록어의 계급적 독점을 타파하고 일반 서민이 세계의 모든 문화에 접근하게 했다는 점을 멈퍼드는 중시했다.

 

과학기술이 발전시킨 기계에 의한 복제를 통한 예술의 민주화가 15세기 이래 달성되었고, 이는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됐다는 민주주의적 승리였다. 근대 사진술의 발명은 그러한 과학발달의 절정이었으나 사진에도 심미적 요소라는 인간의 선택가능성은 당연히 존재하여 예술로 승화됐다.

사진술에 의해 사람들은 전문가로부터 해방되고 아마추어의 지위와 기능이 회복됐다. 그러나 복제의 범람은 인간을 두 계층으로 분화시켰다. 즉 그 소수의 생산자와 다수의 수동적인 감상자 또는 자발적인 희생자였다. 나아가 ‘좀 더 빨리’라는 대량화의 원리가 ‘좀 더 시끄럽게’라는 선정주의를 유도하고, 나아가 ‘좀 더 공허하게’라는 상징의 허무를 결과했다. 특히 비인간화된 생활패턴에 의해 지배된 산업과 전쟁 등에 의해 현대 과학기술의 파괴적 경향인 환경오염과 비인간화를 초래했다.

 

그래서 산업화가 극도로 발전한 19세기에는 추악과 능률이 혼동된 흉악한 활자가 상징하는 과학만능의 기계시대가 됐다. 현대의 과학기술은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해 끊임없는 유행에 의해 악용되고 있다. 이는 분별을 위한 건전한 기초를 파괴하고 독자성이나 인격이 가장 중요한 인간적 체험과 진정한 예술의 활력을 파괴한다. 그래서 멈퍼드는 말한다. “과학기술에서는 하느님이면서 도덕에서는 악마가 되었고, 과학에서는 초인이면서 미에 대해서는 백치가 됐다.” 이에 저항한 윌리엄 모리스가 예술로서의 인쇄술을 부흥시킨 것은 인간과 과학의 관계가 기생이 아니라 공생이고, 기계의 실용적 이점이 인간의 자주성이나 발전을 위협하는 경우 그 즉시 기계와의 협동을 거절해야 함을 뜻했다. 따라서 낭비적인 대량생산체계를, 진정한 인간생활의 담당자인 소규모 기계들의 활용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모리스는 주장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냉정하고 강제적인 형식 속에서의 과학기술의 지배력 증대가 아니고, 열정과 자유를 내용으로 하는 삶의 갱신을 필요로 한다. 즉 전인성과 균형, 창조성과 자유를 특질로 하는 예술과 과학의 융합이 필요하다. 특히 급속한 고도 경제성장이 초래한 반인간적인 과학기술 만연의 풍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요구하는 21세기의 새로운 문화는 무엇보다도 우리 문화의 전통에서 그 기원을 찾아야 한다. 이미 천년도 더 전에 우리 선조들은 세계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과학과 예술의 융합을 선취했다. 새로운 천년의 출발점에서 우리는 선조들의 지혜를 부활하여 과학과 예술을 융합하는 새로운 르네상스를 만들어야 한다.

 

글 | 원시적 낭만주의자 박홍규 교수

폭 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다양한 분야의 융합을 논하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영국 노팅엄대학교, 독일 프랑크푸르트대학교에서 법학을 연구했다. 일본 오사카대학교, 리츠메이칸대학교, 고베대학교와 하버드 로 스쿨에서 강의한 박홍규는 노동법을 전공한 진보적인 법학자 또는 이 시대의 르네상스적 인물로 불린다. 아울러 그는 자신의 전공뿐 아니라 인문, 사회,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평전과 역서들을 출간하는 등 작가로도 인정받고 있다.